<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1부 숙제

고은
2020-04-22 16:38
582

<2장 민본주의는 번역어다>

 

 

1. '슬픈 동아시아'

- 서양에서는 이미 서양
의 우월주의, 즉 '자민족 중심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다.
-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서양문화를 본 뜨며 끝없이 분화해가고 있는 반면에, 한자문화는 성장을 멈추었다.
-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다. 서양 베끼기= '슬픈 동아시아'

 

2. 번역의 시대

(1) 인트로
- 남의 개념을 빌려다 써야한다는 것이 진짜 슬픈 오늘날의 현실이다.
- 대부분의 단어들은 서양 번역어이고, 이 한자어들은 일본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의 손을 거친 것이다.
(2) 소사이어티 : 사회
- 소사이어티는 서양만의 특수한 사회현상이었으므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할 수 없었다.
- '사회'가 소사이어티의 번역어로 정착하는 과정을 보면, 번역어 전쟁이 얼마나 갈등 속에서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3) 사이언스 : 과학
- 번역어 전쟁은 특히나 '사이언스'와 '데모크라시'에서 극대화되었다. 두 개념은 서양의 힘과 질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중 사이언스는 폭력과 지식, 즉 힘을 함축하고 있었다.
- 이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이언스는 격치, 학문, 과학으로 연이어 번역되었다.

 

 

3. 데모크라시

(1) 데모크라시 번역의 역사
- 사이언스가 일본에서 일어난 번역어 전쟁이었다면, 데모크라시는 동아시아 삼국이 모두 참여한 전쟁이었다.
- 중국에서는 본래 '군주'를 의미하였던 '민주'가 그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서, '군주'와 대비되는 데모크라시 개념이 되었다.
- 일본에서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는 체제'로, 민본주의를 '주권은 군주에게 있지만 인민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체제'로 다르게 번역되었다.
(2) 데모크라시 번역의 정치성
- 일본의 '민본주의' 번역은 천황제를 의식하고, 그 내에서 데모크라시를 운용하기 위해 한 번역이었다.
- 중국의 '민주주의' 번역은 군주제를 철폐하려는 지식인들의 정치적 욕망이 반영된 번역이었다.
- 번역은 중립적이지도, 무색투명하지도 않다. 특수한 정치적 고려가 개입한다.

 

 

4. 조선의 경우
(1) 1920년대 잡지 <개벽>
- 민주주의와 민본주의가 모두 데모크라시의 번역어임을 밝히고 있다.
- 동시에 민주주의와 민본주의가 어떻게 다르게 번역되어 사용되는지도 밝힌다.
- 링컨의 연설 내용 중 민주주의는 of the people과, 민본주의는 for the people과 연결짓는다.
- 민본주의가 오래되었음을 지적하며 맹자와 연결시킨다.
(2) 그 이후
- 민주주의가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자리잡는다.

 

 

5. 맹자사상은 '민본'인가

(1)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민본주의
- 데모크라시의 번역어 지위를 놓고 벌인 삼국의 전쟁은 "동아시아의 열망이 데모크라시에 집중되었음을 방증하는 사례"(54)
- '민주주의'는 풍요롭게 발전하였지만, '민본주의'는 민주주의에 나아가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맹자 곁에 머무르게 되었다.
(2) 맹자와 민본주의
- <맹자>에 민본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 '인민이 정치의 근본' 혹은' 군주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를 의미하는 '민본'은 맹자 고유의 주장이 아니라 고대 동양사상의 일반적 특징이다.
- '민본'은 일본인들이 천황제를 보전하면서도 데모크라시를 번역하려는 모순된 욕망을 담은 허위 개념일 뿐이다.
- 맹자와 민본주의의 조합은 데모크라시 번역과정에서 생긴 우연한 만남일 뿐이다.
- "데모크라시의 번역 과정과 여기서 패배한 번역어 민본주의가 해묵은 맹자 사상에 덧붙는 과정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사례로도 보인다."
- '맹자=민본주의' 등식의 진짜 문제는, 맹자 사상이 비상할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댓글 6
  • 2020-04-22 19:43

    1장 위민은 없다

    ‘즉(卽)하여 살기’는 주희의 표현에 의하면 진기(盡己)이다. 아버지로서 선생으로서 오롯이 그 순간의 ‘나’로 사는 것. 이는 상대방 또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어미의 자식사랑, 공자의 호학(好學)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위하여 살기’는 무엇인가.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각 속에는 나를 희생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내가 베풀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게 된다. ‘위하여’의 문제는 오늘을 내일을 위한 도구로 소외시키고, 또 나를 나로서 살아버리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 상대방에게 내 욕망을 투사시켜 상대를 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타락시키는데 있다. 일례로 이광수의 삶을 들 수 있다. 이광수가 동포를 위하여 스승으로 자처할 때 그 관계는 수직적이었으며, 위함을 받는 동포는 계몽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표출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전봉준의 위민(爲民)의식과 이광수의 행동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우환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선비가 앞장서서 백성을 지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자가 『대학』에서 사용한 ‘신민(新民)’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보통 위민사상의 전통을 맹자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맹자는 위민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위민이란 군주가 국가의 소유자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곧 위민정치는 국가가 군주의 사유물이라는 전제와 또 그것을 인민에게 널리 베푸는 시혜의 실천이라는 조건을 충족할때라야 가능한 표현이다. 맹자는 군자를 관리자로 보았다. 군주에게 맡겨진 국가 관리 책임, 곧 인민 생명의 보존과 그 생활의 보전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을 뿐 국가의 소유자는 아니다. 따라서 위민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맹자는 위민이 아닌 무엇을 주장했는가. 인민이 군주가 베푸는 위민정책의 시혜자이거나 대상물이 아닌, 정치의 어엿한 주체임을 맹자는 여민(與民)으로 개념화한다. 여민에는 인민과 군주가 더불어서 국가를 구성하여 또 정치를 함께 행한다는 뜻이 있다. 여민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맹자가 꿈 꾼 왕도(王道)의 세상이 실현된다.

  • 2020-04-24 16:18

    <프롤로그>
    생태의 눈으로 <논어> 읽기
    1. 일상을 일상답게 살기의 어려움
    배병삼샘은 잘 먹고 잘 자기 어려운 이유가 일상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이어트를 “위하여” 먹고, 뽀얀 피부를 “위하여” 자는 것 등등 이렇듯 무엇을 “위하여” 먹고 마시면서 오히려 일상적인 먹기와 잠자기를 소외시키고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자신이 얼마나 먹어야 배부른지 몰랐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묻는다.
    2. 배운다는 것
    그는 먹는 것 잠자는 것을 배우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무엇을 위한 삶이 아닐까? 먹을 때는 먹음 자체가 되고, 잠잘 때는 잠자기 자체가 되는 것. 이것은 공부의 급선무라고 한다.

    공자는 밥 먹을 때는 말이 없었고, 잠을 잘 때도 말이 없었다. <논어> 향당 10편8장

    또한 상대방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나를 위하여 자연물을 사물화하지 않고, 또 한편 나 자신을 자연물을 섬기는 도구로 만들지 않는 사잇길에 공자의 생태주의가 깃든 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상을 즐기면서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열쇠는 무엇인가. 그는 “눈”이라고 한다.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재발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참된 공부의 첫걸음이라는 것. 여기서 재발견이란 대수롭지 않던 일상을 낯설게 도출하는 체험을 통과하는 순간이 이상을 재발견하는 때이다. 세상을 관찰하는 나, 세상의 중심이던 나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시공간과 주변 풍경이 거꾸로 주인공이 되는 전도된 경험을 통과하는 것이다.

    공자가 개천가에서 물을 보고 말했다. “이렇구나, 흘러가는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흐름이여.” <논어> 자한 9편16장

    공자는 순간 개천을 재발견한 것이다 고작 개천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체험한 것이다. 우주의 중심이 나가 아니라 저 흘러가는 물임을, 물속에 자연의 진리가 흐르고 있음을 문턱 깨닫고 토로한 것이다. 자연은 내 사진의 배경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논어>는 뒤집어 보기, 나를 중심으로 세상 보기에 길들어 있던 눈을 뒤집어서 거꾸로 세상을 보도록 가르치는 책이다.

    3. 극기복례-발효의 과정
    어떻게 하면 일상을 느끼면서 살 수 있을까?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길을 제안한다. 극기는 자신의 이기심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예는 다른 사람을 세계의 주인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복례는 함께 더불어 살기를 말한다. 이때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논어>의 미생고처럼 자신의 집에 없는 식초를 옆집에 빌려다 주는 것은 “위하여”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상대를 위한다면서 도리어 너와 나를 구별 짓고, 보상과 명성 등을 바라는 소외와 차별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친구와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는가? 필자는 <증여론>의 원시부족들을 예로 든다. 주는 사람은 마치 내버리듯이 무심히 주고, 받는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관계가 서로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까? 배병삼샘은 콩이 소금을 만나 된장이 되는 발효과정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중심을 벗어나는 것을 콩이 소금에 섞이는 과정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을 콩이 된장으로 발효되어 더 이상 콩과 소금으로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콩이 단독자로 존재하려고 하면 똥이 되고, 썩어버린다. 이를 두고, 극기복례의 과정 그 자체로 생태적이라고 한다.

    4. 공자의 생태정치학-내가 변하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
    공자사상의 핵심어 “인”이란 함께 더불어 살기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생태 정치란 무엇인가? “위하여”의 논리를 거부하고, 그대가 있음에 내가 존재하는 “함께 더불어”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여기가 덕치의 세계요, 또 여민동락의 세상이며, 극기복례가 실현되는 마당이다. “위하여” 세계에서 너는 나의 수단이 되고 나는 너의 수탈자가 되지만, “함께 더불어” 세계 속에서 너와 나는 우리로 발효되고, 또 동식물, 산과 강, 나아가 일마저도 물질덩어리가 아닌 이 세계의 또다른 주인공으로서 대접받는 세상이 된다. 생태정치가 이뤄지는 곳이 여기다.(26P)

  • 2020-04-27 08:00

    3. 충효는 없다
    유교에서 이해하는 사람 : 서양의 '존재론적 인간'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
    남이 있음으로서야 비로소 내가 있음.
    공자 : 태어난 후 3년의 기간은 피치 못하게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로 보며 이 보살핌이 일방적이기에 이 절대적 의존을 회상하며 되갚는 의례가 삼년상이라 함.
    재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삼년상이 너무 길다고 지적, 공자 인문학적 측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삼년상의 의의 제시.
    삼년상에는 부모에게조차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오연한 자존심이 들어있는 듯하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그 신세를 꼭 갚으려 들고, 반면 남을 도와준다면 도움 준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지 뒤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사람이 유교적 인간이다. - '위하여'가 없는 칼칼함.
    "군자는 탓을 제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탓을 남에게서 구한다"

    1. 효란 무엇인가
    내리사랑과 치사랑, 인류만이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내리사랑과 치사랑을 주고받으면서 화목의 꽃을 피워냄
    공자의 프로그램은 이 사랑의 순환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기운인 화목을 가족의 문턱을 넘어 이웃, 사회, 국가, 급기야 온 세계로 퍼뜨리려는 것.
    가화만사성,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는 전개과정 속에 들어있음.

    사랑=효도는 가족이라는 인간공동체 속에서, 경험과 의식적인 학습을 통과할 때 길러진다는 사실

    순자의 자도편 : 도를 좇지 임금을 따르지 않고, 정의를 좇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서 큰 행실이라 할만하다.
    효도란 결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유념해둘 일.
    효라는 유교적 개념은 정치적 통제와 거의 관련이 없다.(미국 현대 유교학자 뚜웨이밍)

    2. 충효는 없다
    [논어]에는 '효도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서 군주에게 충성하라'는 식의 논조가 단 한 곳도 없다.
    거꾸로 '충과 효는 다르다'는 증언은 있다.
    공자가 제시하는 이상적 인격체로서의 군자란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부모에게는 순종할지언정 나라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해야함.
    이를 맹자는 부자유친-부모 자식 사이는 친밀함을 위주로, 군신유의-군주와 신하 사이는 의/불의를 매개로 하는 관계로 여겨 구별. 주희는 부모 자식 관계는 천합,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의합으로 봄.

    3. 충이란 무엇인가
    '각각 맡은 제 소임을 다하는 것'
    충의 본래 의미는 군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누구든 (임금조차도, 아니 임금부터) 제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충실성, 성실성을 뜻한다.
    충은 제 스스로 행동을 돌이켜 살피는 성찰과 반성의 기제를 동반
    충효로 쓰는 용례는 거의 없고 신뢰라는 말과 함께 쓰이거나 역지사지의 서와 함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
    충효라는 말은 격이 다른 개념의 조함. 효는 실천적, 충은 진정성과 자기성찰 등을 뜻하는 추상적이고 가치적인 개념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다음과 같이 씀
    공자는 충의 대상을 반드시 군주로 한정하지 않는다. 효를 중요한 도덕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효행일 뿐 생명을 희생하라고 가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충효,는 '공자의 유교에는 없다'는 증언. 논어를 봉건적 상하관계엥서 작용하는 '멸사봉공' 이라는 뜻의 충효로 읽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의 봉건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를 것 없음.

    4. 충효의 기원
    한비자가 말한 '효제충순'은 유교 본연의 미덕인 '효제충신'과 닮았으니 속뜻은 천지차이이며, 이는 의도적 왜곡임.
    충은 자아에 대한 성찰적 개념, 신은 상대방에 대한 성실성. 특히 신은 공자 정치경제학의 고갱이!
    유교의 충은 자기성찰, 한비자의 추은 군주에 대한 충성.
    일본은 유교국가인 적인 없었음.
    일본의 가족 '이에'는 혈연공동체라기보다 직업공동체임. 양자로 들어간 가문의 성을 따르고 가업을 이음. 성씨 개조가 문제되지 않는 가족관.
    우리가 유교적 덕목으로 오해해온 멸사봉공, 대의멸친, 상명하복 등은 '일본식'가치.
    양자로 간 사람이 가업을 계승하여 번창하도록 하였으면 이것이 곧 충!
    일본-친아버지가 양아버지를 죽였다면 당연히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그 목을 사당에 바쳐야한다는 나라.
    조선과 읿본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창씨개명을 잘못해석한 이광수.
    가족이 인공적 조직일 때 충과 효는 이음동의어가 됨.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을 격으며 일본의 관습이었던 상명하복, 멸사봉공, 대의멸친 따위의 '군국주의적'언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여 마치 조선시대 내낸 이 따의 삶이 그러했던 양 오해함.
    '부모에 효도=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등식은 본래 유교와 관계 없음!!!
    유교에 충효는 없다!!!

  • 2020-04-27 08:43

    5. 가족을 다시 보자

    1. 살처분의 시대
    맹자는 말한다, 홀로된 사람이 굶고 얼어 죽는 사회는 불의하다고. 치욕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불인하고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제 몸의 살을 찌우기 위해 남의 목숨을 함부로 죽이고, 이웃의 죽음을 방관하는 잔인무도한 짓을 우리 모두는 모르는 척 저지르고 있다.

    사회가 낙오자로 찍기만 하며 찍힌 이가 알아서 나머지 쓸모없는 가족을 사회로부터 제거한다. 이건 연쇄살인, 아니 청부살인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너무 조용하다.
    -이대근,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2011.2.17.
    사람들의 '고독한 삶'과 '무고한 죽음'이 낭자하던 시대가 있었으니 우리는 그 때를 '춘추전국시대'라 부른다.

    2. 춘추전국시대
    우리는 사람을 오해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하늘이 부여한 고유한 권리를 가질만한 '천부인권'의 고매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동물이다. 짐승은 싸움은 하나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조직적으로 동족을 살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은 전쟁을 치르는 동물 Homo Furens, 조직적으로 동족을 잘 죽이는 자를 '영웅'이라고 숭배.
    맹자가 "사람에게 짐승과 다른 점이 드물다"라고 개탄했던 내막을 직시할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생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른바 백가쟁명으로 알려진 이 시대 사상들은 책상 앞에서 인간과 사회를 관념적으로 논한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빚어진 질서와 평화에의 바람으로 읽어야 한다. 그 중엥서도 특별히 [논어]와 맹자의 장광설 뒤에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아픔과, 세태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인류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공자와 맹자의 문제의식은 '사람의 역사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말았을까' 그리고 '이 야만의 사태를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응축됨. 맹자 독학으로 백가에 대해 연구하는 중, 권력자를 위한 사상이 아닌 인민의 고통에 공감하며 인간의 운명을 두려워한 유일한 사상가로 공자를 만난다.
    맹자는 공자의 인간세상의 타락에 대한 두려움에 공감함. 직접 제자가 아니면서도 책을 통해서 스승으로 섬김.-사숙하였노라
    "인류가 생겨난 이래 공자와 같은 스승은 없었노라"고 찬탄

    3. 고독한 인간, 관계 속의 인간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고독에서 빚어진 사태다!
    맹자는 당대 정치의 급선무가 사람에게 사람이 두려움으로 와닿게 만드는 '고독'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호소함.
    맹자에게는 경제적 빈곤도 문제지만, 관계가 끊겨 처지를 알릴 데 없이 홀로됨, 사회적 고독이야말로 최악의 인간조건임.
    공자와 맹자는 고독한 사람은 곧 짐슴의 처지로 타락하게 된다고 염려.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오로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라야만 회득될 수 있음. 유교와 서양 근대사상의 갈림점
    사람들을 고독의 존재로 몰아가는 폭력의 구체적인 현상은 '가족해체'
    맹자, '부자리', "아비와 자식이 흩어져버렸다"
    유교는 춘추전국시대의 급격한 사회해체를 극복할 가족의 복원을 핵심 과제로 삼는다. 공자와 맹자는 가족의 재건을 새로운 문명의 초석으로 제시했던 사상사. 이것이 공자가 효를 중시했던 까닭이요, 맹자가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함양하는 공간으로 가족을 설정했던 까닭이요, 나아가 위대한 효자로서 순울 재해석 했던 꺼닭이다.(9장 '왜 요순인가' 참고)

    4. 가족의 재발견
    인이란 일차적으로 가족적 관계를 얼마나 능숙하고 익숙하게 수행하는가에 따라 획득된다. '인'의 배양처가 가족이요, 그 동력이 효다. 공자는 가족 속에서 치사랑=효도의 중요성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확신시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순환에서 발생하는 따뜻한 기운이 화목. 화목의 운영원리는 화이부동이란 말에서 명징하듯, 나와 상대방이 서로 다름(차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화이부동은 동화(내리사랑, 권력)와 이화(차이, 타자)가 팽팽하게 긴장하면서 공존하는 역설적 과정. 사랑잉라는 구속성과 서로 다르다는 이질성이 길항하면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살아 숨 쉬는 공동체. 유교의 가족사랑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제 새끼와 제 부모만을 아기는 '가족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됨.

    5. 가족에 대한 증오
    왜 현대한국사회는 가족을 무시할까?
    지난 100년간 한국인에게 가족은 개인을 억합하고 노예화하는 감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00년간 한국인의 북극성이엇던 근대화와 서구화를 이루기 위해 가족의 질곡을 해체하고서 개인의 해방을 이뤄야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증오, 가족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가족의 파괴는 전면적이고 의도적으로 이뤄졌고, 그것이 문명의 이름으로 숭상됨.

    6. 가족을 다시 주목하자
    서구 개인주의는 "인간의 부재와, 가치와 당위의 부재"를 초래했는데, 이것은 "서구 근대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며, 공동체와 도덕, 종교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절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시도의 논리적 결과(정화열).
    "군자는 그 자식을 멀리함을 배웠노라" 진항의 말
    자기자식이라고 사사로이 아끼지 않는다.
    유교의 가족주의란 오히려 '가족마저도 공공의 영역으로 공개하는 뜻'이라는 정의도 가능.
    '유교=가족주의=공공영역의 부패'라는 등식은 유교 경전의 근거를 갖지 못한, 경험적이고 인상적인 비평.

    가족 속에서 몸에 익힌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차마 남의 아픔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마음, 또 여기서 발화된 타인과 아픔을 함께 해소하려는 손 내밈을 마을과 국가에 미치고, 나아가 온 세상에까지 넘실대도록 만들기, 이것이 유교의 꿈이다.
    유교에서 가족은 단순히 경제적 곤궁을 돕고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방어하는 안전망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다움(사랑)을 배양하고 보존하며 끝내 세상을 화목하게 만드는 풀무인 것이다. 이제쯤 우리는 유교의 가족주의, 가정의 본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때가 되었다.

  • 2020-04-27 16:47

    4장 삼강과 오륜은 다르다.

    삼강오륜은 오랫동안 유교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져 왔다. 오륜=상하관계=유교의 보수성의 등식.
    1. 삼강과 오륜
    삼강오륜만큼이나 사서삼경이 같이 불린다. 사서삼경이란 ‘네 권의 책과 세 권의 경전’이라는 뜻이다. (사서 – 중용, 논어, 맹자, 대학/3경 – 시, 서, 역) 삼강오륜은 ‘세 가지 강과 다섯가지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삼강 –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오륜 –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흥미로운 것은 삼강오륜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요소는 소재적으로 완전히 겹친다. 이런 사실에서 사서삼경과 다르게 삼강오륜은 삼강과 오륜 중에서 선택해 따를 수 있는 것으로

    2. 삼강
    삼강이란 무엇인가. 한나라는 진나라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외유내법(겉으로는 유가를 표상하면서 속으로는 법가)를 통치술로 삼는다. 외유내법은 일통과 삼강오상의 논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유교와 법가가 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일통으 논리 - 곧 황제를 중심으로 천하를 수직적으로 결합하려는 논리, 삼강오상의 논리 - 제국의 통치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
    이 외유내법은 동중서가 음양론에 기초해 만들었다. 풍우란은 이것을 두고 “삼강의 주종관계는 서로 바뀔 수 없는 것이고 영원히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고 비평한다. 삼강의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고 상하 차등적이다. 삼강 논리의 정점은 군주에 있는데, 군주를 꼭대기에 둔 피라미드 제국체제 건설이 일통과 삼강오상이 지향하는 것이었다.
    삼강 구조의 핵심은 부위자강과 부이부강이다. 가족이념으로 인해서 군위신강이 파생된 것이다. 이것은 이것은 오륜의 첫 번째가 부자유친인 것에서도 드러난다. 가족 내에서 지배복종 상하체제로 군신관계를 기획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삼강의 윤리는 여기저기서 보인다. 백이숙제열전에는 충효의 논리가 깔려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 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백이숙제는 사기열전을 통해 효와 제, 충을 아우르는 삼강 윤리의 대명사가 됨으로써 제국이 부식하려 했던 충효의 범전이 되고 나아가 가정에서 효하는 자가 나라에 충성한다는 시나리오를 형성할 토대가 된다. (전단열전도 마찬가지로 열녀 설화를 만들고, 천자문도 해당한다.(84쪽 참고)
    요컨대 삼강은 군주와 아버지, 남편이 주체가 되고 신민과 자식 그리고 아내가 객체가 되는 주종관계의 윤리다. 이것은 상하관계 권력관계 지배 복종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3. 오륜
    유교에서부터 인륜의 중요성은 강조되지만 구체적으로 다섯가지 덕목으로 제시된 것은 전국시대 사상가인 맹자에 의해서다. 맹자는 오륜을 두지 못한 사람을 옳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주의해야하는 것은 삼강과 오륜의 차이, 그 중에서도 부자, 군신, 부부관계다. 부자유친이란 부자의 관계가 친을 원리로 작동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군신유의도 마찬가지다. 두 관계의 원리는 의에 있다. 이 친과 의는 쌍방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오륜은 상호간에 동시적으로 적용된다는 특징으로 이 점을 주희는 친(親)을 도(道)로, 의(義)를 기(器)의 체계로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부부와 장유, 붕우의 관계에서도 상호간 원리는 별과 서, 신이다.
    오륜의 요지는 쌍방적이고 상호적 관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교의 보수성을 상징하는 것은 삼강으로 바뀌어야 한다. 유교의 본래 가치는 삼강이 아니라 오륜의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4. 삼강오륜? 삼강 대 오륜
    유교의 대명사로 쓰이는 삼강오륜의 속살은 이렇게 다르다. 삼강오륜은 같은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 삼강은 군신관계를 앞세우고 오륜은 부자관계를 중시한다.
    * 삼강은 군주 중심 상하지배를 가족에 투사하려는 정치적 기획이었고, 오륜은 전쟁으로 가정이 붕괴되는 전국시대를 뚫고 가족윤리를 부자관계에서 찾으려는 맹자의 시도다.
    * 삼강이 상하 지배종속 수직적 권력 관계를 구조로 한다면 오륜은 상호성 상보성 쌍방의 횡적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 유교를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본질로 삼고 논어와 맹자를 경전으로 삼으려면 오륜이 옳고 삼강은 그르다.
    * 중요의 관점을 유교의 핵심으로 본다면 삼강이 옳고 오륜은 퇴행적이다. 조선시대 정치사상사 역시 삼강vs오륜으로 볼 수도 있다.
    * 유교 사상사의 내부를 삼강vs오륜, 위민vs여민의 대립구도로 읽는다면 무차별적으로 ‘동양사상’이라 여겨지는 유교, 도교, 법가, 불교를 다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2020-04-2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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