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프로젝트> 7강 후기

새털
2020-05-07 21:01
264

  <성의 역사> 3권에서는 헬레니즘의 시대 로마 제정기의 자기수양을 다룬다. 내가 처음 <성의 역사>를 읽었을 때 가장 '과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자기배려기술의 황금기라고 하는 이 시기의 수련법들이었다. 힘들게 운동과 일을 하고 와서 몹시 배가 고픈 상태에서 잘 차려진 식탁을 노예에게 먹게 한다거나,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연상하는 수련법을 통해 고통으로 요동치는 마음상태를 평온하게 가라앉힌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수련법이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이렇게까지 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재작년 고전대중지성에서 <주체의 해석학>과 함께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의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이 거부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몇몇 사례가 아니라, 한 권의 책을 통해 찬찬히 들여다본 스토아학파의 사유와 그것을 수련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따져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인생의 주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또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삶이 방만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니 책을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이상해 보이는 것들에는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는 터이다.

 

  그리고 올해 다시 <성의 역사>를 읽으며 나는 어떤 질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헬레니즘시대는 자기배려기술의 황금기가 된 것일까?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고 개인주의와 자기점검에 몰두하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뉴밀레니엘이라고 하는 요즘 세태가 헬레니즘시대와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 가족도 방어벽이 되기 힘들고 어떻게든 '자기'의 경쟁력을 키우든 멘탈을 키우든 해야 살아남는다는 '위기의식'이 트렌드가 되었다. 헬레니즘시대와 오늘날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방식은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제국의 시대가 되면서, 권력의 장은 복잡해졌고, 도시국가의 자유민 남성일지라도 제국의 항제를 대리하는 공무원에 불과하게 되었다. 능동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쳤던 고전기의 윤리는 제국의 대리인에게는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고전기 해야 할 일과 가치를 인정받는 일들이 선명했던 것에 비해, 로마 제정기에는 이것들이 모호해졌다. 그래서 이 시기 귀족 남성들은 자신들이 갈고 닦아야 하는 자기수양의 기술을 탐색해야 했다. 이전과는 다른 자기수양의 기술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고전기 귀족 청년들이 정치가로 입문하기 위해 자기수양의 기술을 연마했다면, 이제는 정치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것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목적인가? 그래서 고전기 자기수양의 주체가 정치에 입문해야 하는 청년이었다면, 헬레니즘시대에는 이런 연령구분 없이 일생에 걸쳐 자기수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마치 오늘날 '평생학습' 개념이 자리잡고, 생애주기별 건강검진처럼, 생애전환기를 대비한 학습을 받아야 한다고 홍보하는 것처럼, 헬레니즘시대에는 자기수양은 '평생학습'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치를 하기 위한 자기수양이라는 목적과 상관 없이 누구나 해야 하는 '보편적'인 생활의 기술이자 생활철학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그간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을 문탁샘은 언급하셨다. 푸코가 헬레니즘시대의 자기수양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보편성'에 있다고.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고 닦아야 한다는 '보편성의 윤리'가 정치가 무력하거나 정치가 실종된 시대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착상이 푸코를 추동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도식화하는 근대는 동일성의 원리로 작동한다. 동일성의 원리를 돌파하고자 하는 탈근대의 철학은 차이와 타자와 생성의 철학으로 탈주하고자 했다. 이런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벗어났을까? 여전히 뭔가 뭔지 모르는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그 미로는 여전히 근대자본주의 아닌가? 도대체 이 철옹성 밖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는 것인지?......그런데 혹시 차이가 아니라 보편성이 그 해법이 되지 않을까?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와 같은 현대정치철학자들이 입각해 있는 노선이기도 하다. 여기에 푸코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지난 강의에서 이 부분이 언급되어 비몽사몽하던 정신상태가 찰나지만 잠시 초롱초롱해졌다. 

 

  어느 책을 읽던 칸트만 나오면 참 어렵다는 선입견이 든다. 한 번도 칸트를 정독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가? 푸코는 칸트를 철학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철학이란 인식론, 논리학, 윤리학으로 구획지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 위치한 지반에 대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작업이라는 것을 보여준 철학자가 칸트라고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탁샘의 전달이고, 나는 아직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푸코의 철학도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반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학파의 생활철학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들이 고대그리스와 헬레니즘의 철학자들이라는 것이다!! 뭔가 연결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있던 것들이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 그것이 지금의 나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찰나적으로 들었다. 공동체의 생활철학과 자기수양, 신자유주의와 자기관리. 비슷해 보이면서도 달라 보이는 이것들에 나는 어찌 다가가게 될까? 그래서 <성의 역사> 3권의 후반부가 궁금해진다. 또 야금야금 번역되고 있는 푸코의 강의록이 궁금해진다. 이러다 또 고대그리스를 패대기쳐버린 푸코의 사유는 도대체 어떤 회로를 그려가고 있는 것인지......그런데 또 나는 왜 이렇게 자기수양이 부족해 왜 이리 바쁘고 정신 없는 것인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칸트강좌를 열어볼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자기수양을 어찌 해야 하는 것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뭔가 집중하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동학들에게 함께 힘내자고 말하고 싶어요.

  "놓치마 정신줄!!"

 

 

 

 

댓글 4
  • 2020-05-08 08:53

    수업시간에 전 정줄을 놓고 건너편 카센터에 있었나봐요 못들은, 아니 안들려서ᆢㅎㅎ 얘기가 후기에서 똭 감사해요~
    그럼 자기수양이 보편적 윤리로서의 대안일수도 있다면 결국 사랑, 용기, 정의 ᆢ머 이런 개인의 덕성 함양이 저항점?

  • 2020-05-08 09:44

    고대 그리스의 자기 배려는 그 자체로 생활철학이었고 삶정치였다면
    제정기 로마의 자기 수양은 생활철학이 그대로 딱! 삶정치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지금 탈근대적으로 탈주하려고 하는 것이 생활철학이고 삶정치라면
    어떤 부분은 보편과 또 어떤 부분은 차이에서 가져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아니면 새로운 개념어가 나오든가.
    아무튼 공통(보편)과 특이성(차이)이라는 이 두 개념의 조화가
    어떻게 내 안에서 일어나게 할 것인가가 문제의 관건인 거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자기관리는 철학의 부재, 정치의 부재 그리고 윤리의 부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 수양과 다른 것 같습니다.
    새털의 후기를 읽으니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공부를 해야할까 좀 감이 잡히네요~ ^^

  • 2020-05-08 12:05

    <성의 역사2>와 <성의 역사3>에서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제정기의 쾌락의 활용을 개괄하면서 푸코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이는 <성의 역사1>에서 말한 욕망을 억압과 해방의 관점이 아닌 쾌락의 활용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삶의 양식에 대한 탐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법에 의한 금지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닌,
    스스로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실존의 미학,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기 테크놀로지로서의 쾌락의 활용에 대한 탐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지식/권력의 생산적인 측면이 새로운 윤리를 생성시키는 것과 연결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새로운 윤리를 생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생각... 생각...^^

  • 2020-05-08 16:16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고 닦아야 한다는 '보편성의 윤리'가 정치가 무력하거나 정치가 실종된 시대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착상이 푸코를 추동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누구나 갈고 닦는 윤리로 무력한 시대를 통과하자는 말씀?
    음.... 절차탁마가 생각나는 군요^^ ㅋ 자르고 다듬고 쪼고 갈아서 삶의 '미학'을 구현한다.... 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96
N [3월 30일 세미나]4주차 <감정의 문화정치> 결론과 후기 발제와 메모는 여기로
겸목 | 2024.03.27 | 조회 18
겸목 2024.03.27 18
395
3주차 <감정의 문화정치> 6,7장 후기 - '사랑(감정)'은 움직이는 거야 (6)
라겸 | 2024.03.24 | 조회 103
라겸 2024.03.24 103
394
< 2주차 > 감정과 문화정치 ,3-5장 후기 (3)
정의와미소 | 2024.03.22 | 조회 43
정의와미소 2024.03.22 43
393
[3월 23일세미나]3주차 <감정의 문화정치> 6~8장 발제와 메모 (7)
겸목 | 2024.03.22 | 조회 73
겸목 2024.03.22 73
392
[3월 16일 세미나] 2주차 <감정의 문화정치> 3~5장 발제와 메모 (6)
겸목 | 2024.03.13 | 조회 59
겸목 2024.03.13 59
391
1주차 <감정의 문화정치> 1~2장 후기 (2)
겸목 | 2024.03.13 | 조회 80
겸목 2024.03.13 80
390
[3월9일세미나] <감정의 문화정치>1~2장 발제와 메모 (9)
겸목 | 2024.03.08 | 조회 105
겸목 2024.03.08 105
389
[3/9 개강 공지] 3월부터 '감정'을 열공해봅시다
겸목 | 2024.02.28 | 조회 105
겸목 2024.02.28 105
388
<초대> 2023 양생프로젝트 -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에세이발표 (10)
문탁 | 2023.12.02 | 조회 403
문탁 2023.12.02 403
387
<공지> 17주차- 파이널 에세이 수정안 조별 피드백 (11)
문탁 | 2023.11.27 | 조회 226
문탁 2023.11.27 226
386
<공지> 17주차- 파이널 에세이 초안 조별 피드백 (9)
문탁 | 2023.11.21 | 조회 203
문탁 2023.11.21 203
385
<공지> 16주차- 파이널 에세이 개요발표 (1박2일) 워크숍 (9)
문탁 | 2023.11.13 | 조회 193
문탁 2023.11.13 193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