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마을경제학 개론 #4] 희소성이 없는 세계

뚜버기
2019-11-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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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4]

희소성이 없는 세계

 

최근 뉴스에서는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생활고를 견디기 어려워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극이다. 비보가 전해질 때마다 다들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조금 지나면 잊혀져버리고 또 다시 비극이 되풀이 되는 현실이다. 기본 소득과 같은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면 극단적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면 누가 일하려 들겠는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라고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을 것이 뻔히 짐작 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마을경제 이야기를 할 때도 비슷한 곤란함이 있다. 선물경제니 호혜적인 관계니 하는 것들은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요즘 같은 때엔 한계가 있다는 거다. 주어진 게 한정된 세상, 치열한 경쟁 없이 제 몫을 찾기도 어려운데 자기 몫을 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겠냐는 이야기엔 힘이 빠진다. 밑빠진 독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창고를 떠올릴 수는 없을까.

 

저절로 조절되게 내버려두라

로셀의 비너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연의 아낌없는 베풂을 느끼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에게서 젖이 나와 아이를 키운다. 좀 더 크면 자연이 아이를 먹이고 성장시킨다. 프랑스 남부 로셀 마을 뒷산 양지바른 중턱에는 ‘로셀의 비너스’라 불리는 여성 신체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투박하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상이 떠오르게 하는 자세를 하고 있어서 아마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 풍만한 가슴을 한 부조 속 그녀는 한 손에는 들소의 뿔을 들고 한 손은 아이를 밴 듯 볼록한 배를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연의 생명력이 여성의 몸에 깃들고 증식하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한 모습이다.

 

직감하고 있던 자연의 풍요를 언제부터 사람들은 마를까봐 조바심나는 희소한 자원으로 뒤바꾸어 이해하게 된 걸까. 때는 18세기 말 영국. 생산력이 발전하고 무역이 왕성해지면서 전체적인 부의 크기가 비약적으로 켜졌지만 동시에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호대상자들의 수 역시 엄청나게 늘어났다. 빈민아동을 모아 받은 구호세금을 횡령하고 강제노동을 시켜 자기 배를 불리는 악덕 구빈원장이 등장하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말을 비교하면 전체 인구가 약 세배로 늘어나는 동안에 빈민구호 지방세는 약 20배로 늘었을 정도로 극빈자 문제는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빈민구호는 일 하려 들지 않는 게으른 자들을 더 늘릴 것이다, 공공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봐야 민간제조업에서 더 많은 실업이 생길 것이다. 시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빈민고용은 온 나라의 민폐라는 주장이 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참 익숙한 주장이다.

 

당시 막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해가던 초기 경제학자들로서는 이 수수께끼같은 비정상적 상황을 어떻게든 설명해 내고 해법을 제시해야만 했다. 1795년 조셉 타운센트가 발표한 한 논문은 구빈법 문제에 중요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다. 칠레 연안 로빈슨크루소 섬을 늘 통과하던 스페인 무역선원들은 섬에 염소 몇 마리를 풀어놓았는데, 염소의 수가 무서운 속도로 늘면서 영국해적들의 식량창고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에 스페인 당국이 섬에 한 쌍의 개를 풀어놓았더니 염소와 개의 개체수 사이에 균형이 생겼다는 것이다. 타운센트는 여기서 “인류의 수를 조절하는 것은 식량의 양”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인간은 실제로 동물이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정책 따위는 필요하지 않으며 식량의 희소성과 굶주림의 고통이 저절로 균형을 이루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영국인들의 의식 속에 단단히 자리잡게 된다. 다윈도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선택설을 정립했다고 한다. 하지만 염소와 개 이야기는 요즘으로 치면 가짜뉴스라고 봐야 한다. 염소는 개가 접근도 할 수 없는 암벽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개의 먹잇감이 된단 말인가.

 

어쨌든 토마스 맬서스(1766~1834)는 한 발 더 나갔다. 그는 농업의 생산성 증가는 한계가 있는데 반해서 인구의 증가율은 실로 폭발적이기 때문에 인구 증가가 식량생산을 초과하는 경향은 만성적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따라서 빈민구제책 따위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며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은 무자비한 현실에 순응하는 길 밖에 남지 않는다. 이제 희소성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법칙이자 인간의 조건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살아남은 자가 정의이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다.

 

사탄의 맷돌이 갈아버린 공유지

 

빈곤의 문제가 과연 한정된 자원이라는 조건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영국의 빈민구제정책의 역사를 심도깊게 탐구한 칼 폴라니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빈민 문제는 16세기 전반 영국 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했다. 전통적인 사회질서 안에서는 정주법이 있어서 아무데나 가서 살 수 없었다. 대신 장원 내의 공유지는 누구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될 수 있었다. 가난한 이들은 공유지에 기대어 대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또 병들고 일할 능력을 잃게 되면 교구라는 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본적인 구호와 돌봄은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의 형상을 잃을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양모 산업이 번성하게 되자 명목상의 소유주였던 귀족과 지주들이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경작지들을 목초지로 바꾸었다. 군대를 동원하고 불을 질러 촌락들을 헐어 없애고 그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던 농민들을 내쫓았다. 마을과 토지는 황량하게 메말라갔다. 버젓한 농가의 가장들이 한 떼의 거지와 도둑으로 전락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의 잔혹한 폭력성을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뒤이어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어 닥친 엄청난 규모의 경제개발은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오갈 때마다 노동자를 빨아들였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여기서 내팽개쳐진 이들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줄 공동체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 어떤 제동장치도 없는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파탄일로였다. 공동체가 없다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 품위마저 포기하기 쉽게 만든다. 도시 근교 농촌에는 사탄의 맷돌에서 갈려나온 빈민들의 타락상이 지옥처럼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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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경제학자들은, 민중들의 삶의 근간이 파괴되었다는 시대상은 외면한 채 빈곤의 원인을 자연현상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진단을 내린 것이다. 이후 논의는 이렇게 이어졌다. 살든 죽든 내버려둬라, 알아서 균형을 맞출 것이다. 노동자가 쥐꼬리만한 임금만 받고 일해야만 하는 것도 자연법칙이다. 왜냐? 임금이 올라가서 잘 먹게 되면 애를 많이 낳아 노동자 공급이 늘어나게 돼서 다시 임금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관여하지 말고 그냥 둬라, 다 저절로 조정된다. 바로 이런 흐름이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이론적 출발점이자 도그마가 된 것이다. 하지만 빈곤 문제는 결코 조정되고 균형을 찾지 못했다. 조정된 것은 빈곤이 아니라 빈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굶어죽는 것은 그들이 운이 없거나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되었다. 빈곤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 내가 거기로 떨어지지 않게 애써야 할 일이 되었을 뿐이다.

 

유쾌한 파멸이 될 것인가, 저주의 몫이 될 것인가

 

희소성 담론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본다고 해서, 근거의 근거없음을 밝혀낸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이 백팔십도 전환되기는 쉽지 않다. 애덤 스미스의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그랬고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그랬듯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 가설들은 우리의 행위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행동은 그 가설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다음 순간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 된다. 필요한 것이 사라지기 전에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을 얻기 위해 치르는 희생이 클 거라 느끼면 느낄수록 더 움켜쥐어야만 안심이 된다. 결핍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축적해야 한다.

 

1퍼센트의 자산가, 아니 이제는 0.1%의 초자산가가 전체 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할 때조차 희소성의 전제는 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한정된 부를 극소수가 독차지했다는 데 있다. 게임의 룰이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분노할 뿐 우리가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희소성의 전제가 버티고 있는 한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해결 불가능한 과제가 된다. 마을경제를 이야기 할 때조차 함께 나누자는 쪽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렵다.

 

그런데 프랑스의 지성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는 『저주의 몫』(196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선 삶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한 가지는 ‘태양 에너지는 풍요와 발전의 원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런 대가 없이 에너지를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는다. 태양은 결코 받는 법 없이 준다. 천체 물리학이 이 끊임없는 태양의 사치를 측정해내기 전부터 인간들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저주의 몫』 69쪽.)

 

그는 태양이 대가없이 베푸는 에너지가 삶의 가장 일반적 조건이며 부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주어지고 있다고 까지 말한다. 덕분에 우리는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성장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사회와 체제를 이루며 삶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 에너지가 있다면 그 초과분은 대가없이 상실되어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보편적인 원리라고 바타이유는 말한다. <저주의 몫>은 인류가 어떻게 과잉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왔는가를 동서고금의 예를 통해 알려준다.

 

북서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포틀래치도 과잉에너지를 소모시키는 파괴의 장이었다. 조상을 추모하는 제의나 자녀의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서 벌어지는 포틀래치에서 추장은 손님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선물 공세를 편다. 수 만장의 허드슨담요, 50대의 축음기, 재봉틀 40대, 가면 50개, 카누 50척, 금팔찌 60개가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초대받은 다른 추장은 답례로 더 성대한 포틀래치를 열어야 체면이 서기 때문에 포틀래치는 매우 경쟁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띤다. 심지어 상대가 끽소리 못하도록 답례가 필요없다는 제스쳐로 동판을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생선기름을 불태워 버리기도 한다. 추장들은 경제적으로 거덜이 날 정도로 통 크게 부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 명예를 얻는다. 그 과정은 공동체 내부에 부를 고루 퍼지게 하고 넘치는 에너지를 파괴하여 축적이 불러올 재앙을 막는 “유쾌한 파멸”의 현장이었다.

 

부엔 비비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렇게 보면 산업의 발전 또한 넘치는 에너지로 인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경제 성장이 희소성의 세계를 헤쳐 나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과잉에너지를 없애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생산적 소모와 달리 경제 성장은 과잉 에너지를 생산활동에 씀으로써 오히려 에너지 규모를 키우고 과잉이 더 넘치기 만든다. 무한정 에너지규모를 키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초과하는 에너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낭비되어 버린다. 움켜쥘래야 움켜쥘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움켜쥐고자 할 때 그것은 “저주의 몫”이 되고 늘 재앙이 뒤따랐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바로 경제 성장으로 생겨난 과잉의 위험과 저주의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생산에만 매달리면서 초래된 비극이었다. 부의 상징인 백층짜리 건물이 돌진하는 비행기에 의해 한 순간 무너져 내려버린 일 또한 움켜쥐려 했던 과잉의 에너지가 일으킨 재앙 아니었을까.

 

도시라는 폐허에서 살아남기

 

얼마 전 스위스의 한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펴낸 「2019 글로벌 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0.9%가 글로벌 부 총액의 43.9%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상위 0.9%의 자산기준선은 백만달러(약 11억원)이다. 또한 한국 성인 인구의 절반은 전 세계 수준에서는 상위 20% 안에 드는 걸로 분석된다. 말하자면 글로벌 관점에서는 우리들 중 대부분은 많이 가진 쪽에 속하며, 더 냉정하게 말하면 경제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수탈자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타이유의 이야기도 납득하기 어렵고 통계지표도 공감되지 않는다. 20%가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촉발하지 않는다. 1% 때문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 분노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결핍감이 마음먹기에 따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뿌리내리고 살아갈 터전도, 터놓고 지내는 이웃도 없는 뜨내기 도시인의 삶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피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각자 고립되어 기껏해야 가족 단위로만 생활하기 때문에 좁은 시야로 제한된 세계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글로벌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관계하고 몸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점점 좁아진다. 딱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만이 내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과잉보다 희소성이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이웃의 삶보다도 미디어에 노출되는 셀럽들의 화려한 삶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에 상대적 빈곤감은 점점 커진다. 그런 삶의 방식 속에서 살아갈 때 희소성의 세계는 점점 공고해진다. 그에 따른 결핍감과 불안감은 현대인들을 점점 분열적으로 만든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19세기 영국 빈민촌의 지옥도는 스펙터클로 가득한 21세기에도 그려지고 있다. 일자리 찾아 몇 날 며칠을 냉동 컨테이너에 짐짝처럼 실려 부자나라로 가던 수 십명이 참변을 당하는 일을 그저 경제가 저절로 조정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과잉의 에너지를 움켜쥐려는 탐욕이 만들어낸 저주의 희생물이다. 사탄의 맷돌이 갈아버린 공동체의 폐허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둘 중 하나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가 되거나 아예 게임을 중단시키거나. 계속해서 승자가 된다는 것은 마을경제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러니 게임을 멈추는 게 맞다. 힘없는 사람들이 게임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게임에 참가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 것이다. 혼자서 딴 짓하기는 어려우니 친구를 만들고 마을에서 함께 하는 재미를 늘려보자. 함께 살아가는 재미가 늘어날 때 마을은 유쾌한 파멸의 현장, 희소성의 환상이 깨지는 공통의 살림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희소성 따위 무시해보자!

 

“넘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과 소모하는 것은 다르다. 완벽하고 순수한 상실, 사혈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애초부터 성장에 사용될 수 없는 초과에너지는 파멸될 수 밖에 없다. 이 어쩔 수 없는 파멸은 어떤 명목으로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바람직한 파멸, 유쾌한 파멸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앞의 책 71쪽.)

 

 

* 참고한 책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년.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길, 2009년.

『저주의 몫』, 조르주 바타이유 지음,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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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뚜버기

나는 글 쓰는 게 하나도 재미없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려고, 그것도 재미없는 경제로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건 ‘마을경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다.

 

댓글 2
  • 2019-11-27 12:57

    '유쾌한 파멸' 을 하는 여러 방법 중에는 '증여'도 있을 것 같아요.
    우치다 타츠루의 책 속에서 "증여를 상상하자"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말이 참 좋아서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놨었는데... .
    부지불식간에 포스트잇은 사라지고 수중에 더 있어야 안심할 것 같은 생각으로 훅 건너가고 맙니다.
    근데 '파멸', '딴 짓'이란 말이 훨씬 끌리네요. ^^

  • 2019-12-01 09:36

    잉여를 만들지 않으려면 놀아야쥐~~~
    파지 까페도 적자났다고 걱정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