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마을경제학 개론 #3] 마을에는 마을의 가치이론이 있다

뚜버기
2019-09-2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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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3]

마을에는 마을의 가치이론이 있다

 

  얼마 전 이가 아파 치과엘 갔는데 생각보다 견적이 비싸게 나왔다. “더 싸게 안 될까요”라는 부탁에 돌아온 답은 “저희 선생님은 그 아래엔 절대 안 하십니다”였다. 단호한 그 말투는 치아 하나의 치료비가 치과의사의 가치에 비례한다는 듯 들렸다. 영업 전략일 수도 있지만 그 작전이 통하는 이유는 그 말 속에 사람들이 수긍하는 논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임금의 집안일보다 돈벌어오는 직장일이 우선시된다. 학교 때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친구가 대기업에서 수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하면 갑자기 가치가 올라가 보이고 친구들 사이에서 대접도 달라진다.

  나는 여느 직장인 못지않게 빡빡한 하루를 보낸다. 거기엔 문탁에서의 공부와 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뭐하느라 바쁘냐는 눈총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 내가 바쁜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내가 돈 벌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었을 뿐더러 오히려 고생한다며 격려까지 받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가치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킬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 내가 벌어들이는 돈이 나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무심결에 믿고 있는 것 아닐까.

 

나의 가치는 내 연봉이 결정한다

  2020년 최저임금협상이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내건 최저시급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한 점을 머리숙여 사과했다. 최소한의 삶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최저시급의 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임금인상 이외에는 다른 해법은 없는 것일까.

  임금은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판매하여 노동력과 똑같은 가치만큼 받는 화폐라는 것이 통념이다. 이 생각의 배경에는 노동가치설이 있다. 얼핏 들으면 노동이 가치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가치에 대해 처음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이다. 당시 유럽은 금화를 많이 보유하는 것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길이라 여겨 무역을 중요시하던 분위기였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반박하며 화폐는 그저 교환수단일 뿐이고 생활에 필요한 재화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 진정 국가의 부를 늘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재화의 생산이 가치를 증진시키고 부를 늘리는 길이며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애덤스미스의 논의는 데이비드 리카도에 이르러 더욱 정교해 진다. 사고파는 재화들 즉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노동했는가를 소급하여 계산할 수 있다는 리카도의 주장은 고전경제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물건의 가치가 정량적으로 계산 가능하다면 서로 다른 질의 물건들도 가치의 비교를 통해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등가교환이 가능해진다. 거래는 활발해지고 모든 가치를 대표하는 형태 즉 ‘돈’이 전면에 부각된다. 상품의 가치는 가격으로, 노동력의 가치는 임금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대량생산 설비를 갖춘 면방직공장이 생기면 시장에서 면의 가격은 급락한다.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한 면도 덩달아 가격이 하락한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노동력을 투입했지만 수공업자의 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칼 맑스(1818~1883)는 노동력의 가치란 사회 전체의 총노동에 대한 평균적인 ‘필요노동시간’에 해당한다고 정리해 냈다. 그렇게 보면 노동생산물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객관화 가능한 것이며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는 내용인 셈이다.

 

 

  그럼에도 노동가치설이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인간의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되어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노동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노동자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사고의 역전이 일어난다.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은 무가치하다는 식의 극단으로까지 몰아 붙여진다.

 

  리미티드 에디션을 욕망한다

  산업자본주의를 넘어 정보자본과 금융자본이 전면적인 시대이다. 웹과 앱을 오가는 우리의 손가락질은 소비인지 노동인지 구분이 안 된다. 또 놀면서도 막대한 부를 벌어 들이는 금융소득자의 치부 역시 노동가치설로는 설명이 안 된다. 사실 노동가치설은 자본주의가 발흥하고 확산되던 19세기 다양한 가치이론의 각축 속에서 맑스에 의해 재정립된 이론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의 칼 멩거(1840~1921)를 시초로 하는 한계효용학파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가치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다. 멩거는 가치란 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복지를 유지하는 데 그 재화가 얼마만큼의 의미를 지니는가에 관계한다고 보았다. 이때 재화의 효용만이 아니라 희소성이 가치결정에 작용하게 된다. 없어서는 안 되는 물보다 유용성이 훨씬 떨어지는 다이아몬드가 더 큰 가치를 가지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준다.

  스미스와 리카도만 해도 부는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부’란 무엇인지 질문했던 것이고 사회적인 부를 어떻게 지주와 노동자와 자본가가 합리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가치라는 개념을 정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치가 주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효용성과 희소성에 따르는 것이 되자, 부는 사회적 맥락과 무관한 개인들의 경제활동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한정된다. 재화의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이 아니라 개인들의 욕망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의미부여가 그 재화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설명은 희소한 재화들을 앞에 두고 개인들이 경쟁하는 자본주의 시장을 연상시킨다. 한계효용 이론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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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소성과 효용성을 기초로 가치를 평가하게 되자 또 다른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턱없이 높은 가격표를 붙이더라도 한정판이라고 하면 없어서 못 파는 현상이 말해 주듯이, 실제로는 주관적인 의미부여 때문에 욕망한다기보다 희소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역전이 발생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어야 하고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해야 한다. 남들보다 더 배우고 남이 가지지 못한 스펙을 쌓아 더 높은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희소한 것에 대한 욕망은 더 많은 것들에 가격을 매기고 휘황찬란한 쇼윈도우 앞에 진열시켰다. 개인적인 의미로 가치가 다양화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인주의적인 세계는 화폐라는 단일한 가치평가 시스템을 가진 거대한 전체성 속에서 놓이게 된 것이다.

 

  비시장경제의 가치론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가치를 다르게 이해한다면 어떠했을까? 마셜 살린스는 『석기시대 경제학』(한울아카데미, 2014년)에서 이와는 다른 가치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들을 탐구한다. 뉴기니의 휴언만 인근의 부족들의 예를 살펴보자. 휴언만을 둘러싼 부족들의 교역은 중심촌락인 부사마에서 공급하는 타로에 크게 의존한다. 타로는 그들의 주식이기 때문이다. 입지적으로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쪽과 남쪽의 산물의 중계 교역에도 큰 역할을 한다.

  부사마는 식량을 독점 공급해서 큰 이익을 누릴 수도 있지만 주변 촌락의 토기나 돗자리 등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로 교환된다. 소형토기 1개에 타로 50파운드의 교환율은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측면에서 토기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부사마인들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고 관찰자들은 보고하고 있다. 게다가 재화의 교환율은 휴언만 전체에 걸쳐 똑같이 적용된다. 돗자리 1장은 주머니 4개나 소형토기 1개와 교환된다는 비율이 생산지와 멀리 떨어진 촌락이든 가까운 곳이든 변함없이 지켜진다.

  시장경제의 입장에서 보면 부사마인들은 경제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미개인 취급받기 십상이다. 식량을 독점공급하는 유리한 상황을 잘 활용해서 타로의 교환율을 올린다든가 남쪽 토기를 사다가 북쪽에 더 비싸게 팔고 북쪽 돗자리를 남쪽 마을에 가져다 줄 때 유통 차액을 챙긴다는가 하면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을텐데 답답한 노릇 아닌가. 가진 자의 갑질을 하기는 커녕,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자신들의 풍요를 일도 별로 안 하는 이웃마을에 빼앗기는 꼴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부사마 사람들은 혼례용 선물 등으로 북쪽 촌락의 돗자리가 꼭 필요하지만 북쪽 마을은 타로 수요가 크지 않다. 반면에 북쪽 마을 사람들은 남쪽 촌락에서만 생산하는 토기를 가지고 싶어 한다. 부사마인들은 식량이 부족한 남쪽 마을에 타로를 가져다 주고 토기를 받아다가 북쪽에 가져다 주어 우호적 관계를 지속시키면서 돗자리를 얻는 방식으로 거래한다. 부사마인들에게 토기의 가치는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중요성이 있기에 남쪽 촌락과 거래관계를 잘 맺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은 공동체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런 교역체계는 시간이 지나면 점점 다양한 산물들이 교역망 속으로 추가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주변부의 촌락들은 다른 곳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이국적 품목들을 거래망에 추가시켜 보다 활발한 거래를 꾀할 것이고 점점 교역망의 공간적 범위는 확장된다. 새로운 공동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가운데 물질적 흐름도 활발해지면서 다함께 풍요를 누리게 된다. 휴언만의 공동체들이 자신들 나름의 교환율을 고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웃과 잘 지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호혜성과 관대성이 교환율의 근저에 깔려있다.

  휴언만의 교환율이 노동가치나 한계효용과 같은 획일적인 틀로 정량화하지 않는다고 가치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어떻게 복잡한 교역관계망이 깨지지 않고 역동적으로 통합되는가가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 획일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차별적인 방식이, 결정론적인 기준을 가지기보다는 함께 수긍할 수 있는 교환율을 도출하는 감각이 필요했다. 실생활에서 끊인없이 그 감각들을 키우면서 적절한 교환율을 찾는 노하우가 그들의 가치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같이 획일적 틀에 맞추기 위해 팔다리를 모두 쳐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섬세한 고려가 민감하게 작동하는 가치법칙, 용어와 숫자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탁네트워크의 교환율

 

  문탁네트워크에는 여러 매니저들이 있다. 자율카페에, 공동체 주방에 매니저들이 있고 또 작업공방마다 일꾼들도 있다. 그 외에도 회계며 홈페이지 제작과 관리, 강좌의 기획과 홍보 등등, 하나의 공동체가 원활히 유지되려면 해야 할 일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애쓰며 활동하는 이들 덕분에 문탁의 일상은 굴러간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이 일들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보수를 지급하고 맡겨진다. 내부활동가이든 외주이든 일에 상응하는 보수를 임금의 형태로 준다는 점, 그리고 그 기준이 시간비율 혹은 일의 난이도에 따른다는 점에선 세간의 가치척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탁의 경우는 외부에 맡기는 일은 복사기 대여와 홈페이지 서버 호스팅 정도만 해당 될 뿐, 웬만한 일은 어떻게든 회원들의 손으로 해결하는 편이다.

  사람이 몇 안 되었던 초기에는, 온종일 터전에 상주하며 잡무를 처리하는 일도 점심저녁 밥을 짓는 일도 선물로 주어졌다. 심지어 밥당번이 본인이 한 밥을 밥값을 내고 먹는 게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규모가 커지고 일도 점점 늘어나면서 활동비를 지급하는 일들이 하나둘 생겼다. 처음 고정적인 활동비가 지급되었던 것은 아마 작업장 일꾼 품삯이었던 것 같다. 작업장은 일당받고 고용된 노동력이 아닌 방식으로 일하고 돈도 벌고 싶어서 만든 일터였다. 그래서 직원이니 일당이니 하는 말 대신 일꾼과 품삯이라는 말을 썼다. 나는 작업장 회계를 맡았었는데 처음 품삯을 정할 때 은연중에 일한 시간을 품삯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르게 해보자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노동가치설이나 희소성의 원리가 아닌 기준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하면서 활동비 혹은 품삯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계속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러는 가운데 어느새 하나의 기준이 정해져 있었다. 어떤 일에 얼마라는 식의 획일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 활동비 책정의 대원칙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다양한 일에 차별적인 기준들이 정해지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돈이 필요한 사람이 더 가져간다. 밖에서 덜 벌고 문탁에서 더 많이 일하고 자립하겠다는 자누리사업단에는 제법 돈이 되는 활동비가 책정됐고 그 시도를 지원하는 많은 친구들이 자누리 단골고객이 되었다. 리사이클링과 손작업의 의미를 되살리고 싶은 월든 공방은 작은 품삯만 받고 일하지만 누구도 그 일이 가치가 낮아서 품삯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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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쉽게 이런 결정들이 쉽게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배워왔기에 더 받고 덜 받는 것에 대한 부담과 불편함이 앙금처럼 마음에 남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수년 동안 비결정적 활동비 정책이 지속되자 문탁에서 이런 방식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청년들에게는 이런 저런 일자리를 만들어 활동비를 주려고 애쓰지만 밤낮을 새면서 홈페이지를 만드느라 수고해준 직장인 회원에게는 감사하는 마음만 주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다른 식의 보답을 고민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가치의 기준이 꼭 하나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 자본주의 시장논리와는 다른 가치기준들을 세워보는 것. 우리는 지금 마을 경제의 새로운 가치법칙을 만들고 공유하는 과정 중에 있다.

  가치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면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마셜 살린스는 “시장-산업체계는 완전히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희소성을 제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제도화된 희소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늘 결핍을 느낀다. 그리고 결핍된 것을 수중에 넣기 위해서 대신 가질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앞서 포기해야 한다. “결핍에서 출발해서 상실로 끝나는 이중적인 비극” 속에 살아가기를 그만두는 것. 그것은 우리만의 가치기준을 새로 만들어보는 일, 마을의 가치법칙을 만들어보는 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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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뚜버기

나는 글 쓰는 게 하나도 재미없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려고, 그것도 재미없는 경제로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건 ‘마을경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다.

 

댓글 3
  • 2019-09-25 12:07

    글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당.
    병치례 끝에 완성된 글이라서 그런지 남다른 가치가 느껴지네요. ㅋㅋ

  • 2019-09-28 16:01

    돈을 받지 않고 어디선가 이렇게 일했다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것 같아요.
    문탁에는 돈을 뛰어넘는 가치가 이미 존재하는 거겠죠.

    증말 이상한 데라니까요 ~~ ㅋㅋ

    • 2019-09-28 22:55

      그니깐요.
      저는 몇년째 마을버스에서 만나면 어디가냐고 묻는 어르신들께 여기가 어디라고 확실한 대답을 못해드린다니깐요. ^^
      왜 그런데를 계속 다니고 있는 걸까요? 호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