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전 7회차 후기

산새
2021-12-05 04:07
661

춘추좌전 7: 공자는 돌아오고, 오나라는 벼랑 앞에 서고

 

 

이번 시간에는 부차 말년의 굵직한 사건 두 가지, 애릉전투와 황지회맹을 다뤘습니다.

애공11(BC484)~14(BC481)을 지나가며.. 

 

                           자료출처: 《춘추좌전》풀빛. 김월회

 

애공 11(기원전 484)

 

애릉전투

,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들어왔다. 우군대장 맹유자(맹무백)는 중간에 도망쳤으나, 좌군대장 염유는 번지를 거우로 삼고 직접 창을 들고 교외(郊外:성밖)에서 싸워 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노나라는 (염유가 활약한 교외전투에 대해) 보복하고 싶었다. 노애공이 오왕 부차와 회동한 뒤 합세해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의 국서(國書)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와 애릉에서 교전했다. 이때 제나라 대부 진희자가 동생인 진서에게 전사할 것을 당부한다. 진서는 국서와 함께 전사했다.

 

국씨와 고씨는 천자에게 조회 가는 上卿으로 웬만한 제후보다 높았다. 제나라 대부 진희자에게 그들은 내부의 강한 적이었으므로 자공이 알려준 팁(전쟁에 내보내서 전사시킴)은 솔깃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동생도 함께 죽어줘야 했다. 아우인 진서가 국서와 함께 전사해줬으므로 국씨, 고씨 두 집안이 몰락했고 제나라에서 진씨(전씨)가 권력을 잡게 된다. 노나라와 오나라의 연합군이 제나라의 기득권 세력을 친 셈.

여기서 자공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의 빠른 발과 기막힌 언변으로 새 판이 짜여졌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은 그 내용을 상세히 적었다. 요약하면..

먼저 제나라로 가서 진희자(전상)를 만났다. 약한 노나라를 정벌해봤자 공은 대신들에게 돌아가고 얻을 게 없으니 내부의 강한 적을 전쟁에 참여시켜 죽게 하는 게 이득이다. 핑계를 대어 진군하지 말고 오나라를 쳐라. 그러려면 동생(진서)도 죽어줘야 된다. (p1662 교재)

오나라로 가서 부차를 만났다. 약한 노나라를 구원하여 명분을 얻고 난폭한 제나라를 징벌하면 패업을 이룰 수 있다.

월나라로 가서 구천을 만났다. 오나라에 응원군을 보내고 보물을 안겨주면 안심하고 제나라를 공격한 뒤 나라까지 갈 것이니 제, 진과의 싸움으로 지친 틈을 타 공격하면 멸망시킬 수 있다

다시 부차에게 가서는 월나라가 응원군과 예물을 바쳐 협조할 것이나 그 임금(구천)까지 받지는 말라고 전한 후.

마지막, 정공에게 가서 오나라가 제나라와 싸울 것이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이기면 까지 공격해 올 것이니 군대를 잘 정비하라고 일러줬다.

제환공과 관중의 시대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민족(狄人)이 큰 문제라 초나라와는 평화협상을 했다. 그러나 문공 때는 적인과 협정을 맺어 의 군대를 이용해 같이 싸웠다. 그래서 북쪽은 문제되지 않았고 적인들도 內地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자꾸 올라오는 초나라가 문제였다. 초성왕과의 성복전투 이후 북쪽보다 초나라의 북상을 막는 게 최대 이슈가 됐다. 그런데 이번엔 오나라가 올라오니 晉定公은 이것을 막아야만 했다.

 

자공의 활약으로 노나라는 위기를 넘겼고, 염구가 세운 공으로 계손이 공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오왕 부차에게 이 전투는 독약! 오나라 멸망이 시작됐다.

 

오자서의 죽음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려했다. 출병 직전 월왕 구천이 (자공의 조언대로) 그의 군신들을 모두 이끌고 와 납작 엎드려 인사하고 예물을 바쳤다. 부차는 기뻐했고 오자서는 의심했다. 오자서는 월나라가 오나라의 心腹之疾(내부의 병)이라며 지금 없애지 않으면 오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오자서는 제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며 자신의 아들을 포씨에게 맡겼고 아들은 왕손씨로 개명. 그 일로 오자서는 부차의 칼을 받고 자결하게 되는데 죽기 전 오나라가 3년 후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적중했다. (애릉전투 3년 후, 오나라 멸망을 부추긴 사건이 발생했다. 황지에서의 회맹이다)

가을, 제나라를 이긴 계강자는 다시 제나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 여겨 수비를 보완했다.

겨울, 위나라 대부 태숙질이 송나라로 도망갔다.

 

태숙질, 공문자, 환퇴 & 공자의 귀국

태숙질은 위나라 대부. 도공의 아들이 위나라로 망명해서 낳은 딸이 위나라 남자와 만나 낳은 아들. 송나라 대부인 자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처제를 사랑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공문자는 자조가 위나라를 떠나자 본처(송나라 여자)를 쫓아내게 한 후 자신의 딸(공길)을 시집보냈다. 그러나 총애하던 처제를 몰래 가까이 두어 두 아내를 거느린 꼴이 되자 딸을 도로 데려왔다. 그 후에 태숙질은 또다시 여자문제로 수레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자 송나라로 도망 가 상퇴(사마환퇴: 송나라 환공의 후손)의 가신이 되었다. 상퇴에게 뇌물(美珠)을 주고 성서땅을 받았다. 송경공이 그 美珠를 갖고 싶어 했는데 상퇴가 거절했고 집안몰락의 계기가 됐다. 훗날 태숙질은 위장공(괴외)의 도움으로 위나라에 살다가 죽었다.

(*p1665. 교재)

공문자는 딸의 일로 화가 나서 태숙질을 공격하려 했다. 이 때 공자에게 군대의 진법을 물었는데 공자는 제사에 관한 것(胡簋之事)은 알지만 군대 다루는 일(甲兵之事)은 모른다고 답하고는. “새가 나무를 가려 앉는 법(鳥則擇木)이지 나무가 어찌 새를 가려 앉힐 수 있겠냐(木豈能擇鳥)“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논어』 「위령공15-1에는 같은 내용이 위령공이 전쟁(공격)에 대해 물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샘은 공문자의 질문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고 하셨다)

공자는 위나라에 머물 생각이었지만 마침 노나라 사람이 예물을 가져와 대우하니 노나라로 돌아갔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위나라 최고 권력자인 공문자 라인이었다. 공문자는 논어』 「공야장5-14에도 등장한다. 자공이 공문자의 시호가 왜 이냐고 묻자 공자는. 敏而好學 不恥下問! 아랫사람(공자)에게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공자가 말해주는 대로 빨리빨리 배웠다고. 그러나 태숙질이 송나라로 도망가서 그의 동생 유를 후계자로 삼자 자기 딸(공길)을 시동생이던 그에게 다시 시집보냈다니. 아무리 결혼동맹이라지만... 태숙질보다 나을 것도 없다.

 

애공 12(기원전 483)

 

, 전부세가 시행됐다. 가을에 위출공이 오왕 부차와 운땅에서 만났다. 노애공은 오나라가 무서워서 위출공과 송나라대부 황원과는 공조하자고 맹약했으나 오나라와의 결맹은 사절했다.

이때 오나라 사람들이 위출공을 가택연금 시켰다가 자공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출공이 본국으로 돌아와 오나라 말을 쓰자 대부 자지가 그를 비판했다. 겨울에 메뚜기 재해가 일어났다.

 

염유를 시켜 공자에게 묻다.

(*p1667 교재)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후, 계강자가 토지의 대소등급에 따른 새로운 징세·징병제인 田賦제를 실시하고자 염유를 시켜(계강자는 제후레벨이라 직접 말 안함) 공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공자를 귀국 시킨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공식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염유에게 사적으로 말했다. 군자가 나랏일을 할 때엔 예에 맞게(禮治) 해야 하는데 거기엔 세 가지가 있다.

施取其厚: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넉넉한 걸 취한다. (환과고독)

事擧其中: 실무를 할 때엔 (정책을 너무 지나치게 하지 않고) 중도에 맞게 한다.

斂從其薄: 세금은 박한 것을 따른다. (세금은 적게 걷고 백성들이 부유하게)

논어』 「안연12-9에서 애공은 세금(증액)에 대해 물었다. 이 때가 애공도 계강자도 세금을 증액하려던 상황이다. 다음 해(애공12)에 전부법은 시행됐고 계손씨를 도운 염유는 공자에게 성토 당하게 된 배경.

선공15(기원전 594) *p1667 교재 초세무: 선공이 처음으로 공전을 없애고 토지(私田)에 세금을 매김. 초장왕이 발탁한 손숙오(오거-오자서의 조부-와 더불어 개혁가)가 토지제도를 바꾸고 세금도 바꾸어 고도성장을 하자 노나라도 따라한 것이다.

 

 

애공 13(기원전 482)

 

황지회맹

여름, 노애공이 천자의 사신인 선평공과 정공·오왕 부차 등과 황지(黃池)에서 만났다.

612, 월왕 구천이 주무여, 구양을 선두로 한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했다. 도성 부근에서 지켜보던 오나라 왕손 미용이 자기 아버지(월나라 포로가 되었다가 죽음. 이때 깃발도 월나라 손에 들어감)의 깃발을 앞세운 월나라 군사를 보자 구원병을 기다리지 못하고 출격했다. 첫 교전에선 이겼지만 열흘 후(23) 다시 교전하자 대패했다. 왕손 미용과 태자 우, 수어요는 포로로 잡혔고 부차의 아들이 여기서 죽었다. 오나라 사람 7명이 황지에 있던 오왕 부차에게 패전을 알리러 갔는데 제후들 사이에 소문이 날까봐 부차는 막사 안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77, 황지맹약이 체결됐다. 이때 오나라와 진나라가 삽혈 순서(맹주자리)를 두고 다퉜다. 오나라는 오태백이 맏형이었다는 기준으로, 진나라는 희성의 제후국 중에 패자로 존재해 왔다는 기준으로 양보하지 않았다. 조간자(조앙)와 함께 온 진나라 대부 사마인이 오왕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살펴보고 적국에 패했거나 태자가 죽은 게 아닌지 의심하자 부차가 양보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차는 송경공이 회맹에 참석하지 않아 송나라를 치려했으나 태재비(백비)가 만류해 그만뒀다.

 

오왕 부차는 맹주가 되고 싶은 욕심에 무리해서 황지로 가고, 자신의 전령들을 죽이고, 진왕과 (삽혈 순서로) 다투었으며 대패해서 돌아오는 처지에 (자기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송나라까지 치려했다. 패자의 욕망은 가슴을 뜨겁게 했지만 귀를 닫고 머리는 굳게 했다.

 

 

애공 14(기원전 481)

 

획린(獲麟)

, 노나라의 서쪽지역 대야에서 수렵행사가 있었다. 숙손씨의 수레를 모는 자서상이 기린 한 마리를 잡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사냥터 지기에게 주었다. 공자가 자세히 보고 크게 놀라 기린이다!” 라고 하니 숙손씨가 거둬갔다.

                                           자료출처 :나무위키.네이버

 

두예와 춘추삼전(春秋三傳) (*p1680 교재)

좌전』 『공양전곡량전춘추의 해설서로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부르는데

공양전, 곡량전(공자집 담벼락에서 나옴)은 사건이 아닌 의 구절이 무슨 뜻인지 푼다. 춘추에는 주공의 14대 후손인 은공 원년(기원전 722)부터 애공 16(기원전 477)까지의 12246년간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좌전은 애공 27년까지 기록했지만 공양전곡량전은 여기(획린, 기원전481)서 끝난다. 공자가 이 사건이 있은 후 충격을 받아 절필했기 때문이란다. 공자의 죽음조차 없다.

공양전은 공자의 제자 중 자하의 제자 공양고(제나라 사람)가 구전으로 전수했다고 한다. 곡량전은 노나라 사람 곡량적이 처음으로 구전했는데 공양전만큼 번성하진 못했다. 한나라 시대로 넘어오기 직전에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자행했다고 믿었기에 고문자로 된 판본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감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서갱유 이전에 쓰인 춘추의 해설서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심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나라 시대엔 문자로 정리된 좌전보다 구술을 통해 전수 된 공양전곡량전이 최고 권위를 지닌 춘추해설서로 인정받았다. 좌전이 t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한왕조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전개 된 후인데 학술의 주류가 구두전승에서 문자전승으로 전환됐다. 이러한 풍조에 힘입어 두예(222~284)라는 학자가 나와 춘추경전집해를 집필함으로써 좌전이 주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두예는 삼국을 통일한 나라 사람인데 사마소(西晉 초대황제 사마염의 아버지)의 장인이며 손권의 오나라를 멸망시킨장군 중 한 사람이고 좌전의 대가로서 춘추좌전을 연결시켜 지금 전해지는 형태로 합쳐놓은 인물이다.) 이후 당나라시대에 이르러 공영달(574~648)이 칙명으로 편찬한 오경정의에 포함시킴으로써 좌전은 부동의 정통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고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하는 이 때, 패자가 바뀌는 시대에 공자의 제자들이 곳곳에서 활약한다. 특히 염유와 자공, 자로와 재아가 보여 반갑기도 하면서.. 한 편 씁쓸한 역사의 현장들이 마음을 차갑게 한다. 춘추필법이 여전히 낯설지만. 논어를 차근차근 읽어오던 때로 다시 돌아갔다가좌전의 이야기로 다시 빠져드는 재미가 있다. 다음 강의가 마지막이라니.. 참 많이 아쉽다!

 

댓글 2
  • 2021-12-06 20:23

    어마어마한 후기를 쓰셨네요

    강의를 다시 풀어놓으신 듯해요

    거기에 참고자료까지 붙여서^^

    후기 쓰시느라 애쓰셨고 덕분에 복습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 2021-12-07 10:33

    저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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