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3회 후기 : 소칼, 닭칼 牛刀割鷄

영감
2021-08-15 17:17
231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遊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해서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을 데리고 무성 땅을 찾았는데 마을에서 비파를 타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유가 공자에게서 배운 대로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흐뭇해서 빙그레 웃으면서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 하고 물었다. '이 같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무슨 예악이 필요하냐'라는 뜻이었다.

자유(무성 땅의 읍재)가 말했다. "예전에 선생님께 들으니 '군자가 도를 배우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쉬워진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도道로써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이보게들, 자유의 말이 옳다.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논어 양화 편/낭송 논어

 

논어의 양화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자인 자유가 나라를 호령할 만한 인재인데도 불구하고 무성같이 작은 읍에서 성실하게 복무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공자가 건넨 농담이다. 자유는 고지식하게, 백성을 예와 악으로 교화시키는 도道를 행하는데 고을의 크고 작음이 무슨 상관이냐고 야무지게 되묻고 있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사자박토狮子搏兔 와도 통한다.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지나치게 큰 수단을 쓸 필요가 없음을 지적할 때 우도할계牛刀割鷄를 인용한다. 소 잡는 칼로 고작 닭이나 잡는 비효율을 풍자하는 구절인데, 소 잡는 칼이라고 해서 닭을 척척 잡는 건 아니다.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사용하는 건 낭비적일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 닭은 닭 잡는 칼로 잡아야 한다.

 

요새는 우도할계를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큰 인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많이 쓴다. 마찬가지로 큰 인물한테 작은 일을 맡기는 게 과분하고 아깝다는 뜻이다. '큰일'을 하는 '큰 인물'은 작은 일 정도는 눈 감고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깔려있다.

 

다양한 종류의 일들을 원색적인 기준으로 헤아리고 줄을 세운다. 직책이 높은 일, 끗발 좋은 일, 큰 조직의 일, 돈을 많이 버는 일 따위가 '큰일'이 된다. 획일적으로 매긴 일의 서열에 따라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우열優劣이 덩달아 결정된다. 사람을 소개할 때도 그 사람이 이제까지 했던 가장 '큰일'을 소환함으로써 혹자가 사람의 크기를 잘 못 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준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적성이나 사명감보다 일의 크기가 성취동기가 된다. 어서 빨리 직급이 올라가서,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권한이 큰 일을 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자기 능력에 비해 저급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통계가 있다. 자기는 '소칼'인데 조직이 몰라보고 '닭칼'로 쓰고 있어 불만이란 얘기다. 모두가 소칼이 되기를 원한다. 소칼이 되는 데 실패한 닭칼은 좌절한다.

 

일의 크기는 남이 정하는 게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정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하면 작은 일도 큰일이 되고, 하찮다고 무시하면 작은 일이 큰일을 저지를 수 있다. 2003년 7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의 공중 폭발은 기체 외부에서 작은 단열재가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참사다. 그전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일, 경력, 소명召命이라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을 일(Job)로 만 인식하는 사람은 직업을 단순히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긴다. 직업을 경력(Career)으로 여기는 사람은 직업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현재의 직업을 통해 수입, 지위, 명예 등에서 더 나은 성취를 얻는 것에 목적을 둔다. 직업을 소명(Calling)으로 여기는 사람은 직업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며 자신의 일을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물질적 보상이나 경력 발달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는 깊은 충만감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믿음으로 일한다. 
소명의식召命意識 (두산백과)

아무리 미천한 일이어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면 소명으로 알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명의식인데 직업을 아예 소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설득하기 어려운 격언, '직업에 귀천이 없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이다.

 

초대형 천체 망원경으로 세균은 보이지 않는다. 닭칼이 소칼 노릇을 못하듯이 소칼도 닭칼을 대신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소칼, 닭칼 모두 필요하고 소중하다. 소도 닭도 못 잡는 엉터리 칼이 많은 세상이다.

 


 

얼마 전 대선 후보 간에 소칼 닭칼 논쟁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돌고래니 멸치니 하면서 덩치 싸움을 하고 있다.

소를 잡던 닭을 잡던 국민이나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 3
  • 2021-08-16 00:38

    현자라면 닭 잡는 칼로 소도 잡을 수 있고, 소 잡는 칼로 닭도 잡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1-08-23 20:21

    그러게요

    '군자불기' 라면 토용샘처럼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적재적소에 인재를 써야하는 거라면 또 다른 문제일수도 있겠구요...^^

    영감님 후기 재미있습니다 ㅎㅎ

  • 2021-08-30 23:16

    오랫만에 현란한 영감님의 칼질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칼, 닭칼 ~ 읽는 내내 먹성좋은 저에겐 어찌 저는 소고기 칼국수와 닭고기 칼국수가 연상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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