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경 > 후기에 대하여

영감
2019-10-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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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3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단체로 낙원 극장( 종로 3가, 나중에 허리우드로 바뀜)에서 하는 ‘칠공주’라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우리 엄마도 같이 갔다. 집에 와서 엄마는 영화 줄거리를 아버지한테 영화 상영 시간만큼이나 길게 설명했는데 영화보다 이해가 잘 되고 재미도 있었다. ( 나는 지금도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영화의 칠 팔십 프로 밖에 이해를 못 한다. 그래서 명보 극장에 가면 영화 끝나고 바로 옆에 만두 파는 짱깨 집에 들르곤 했다. 좌우에서 들리는 얘기들이 바로 내가 놓친 그 장면들이어서 외롭지 않았다 )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내가 접한 최초의 후기가 아녔나 싶다.

 

작년 초에 주역 후기는 무얼 쓰는 거냐고 물었더니 '맘대로'였다. 점점 정서가 빈곤해지는 내게 광범위한 출제는 특전이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후기라는 '문건'을 쓰거나 읽은 건 십여 년 전 애들 학교의 백두대간 동아리를 따라다니기 시작할 때였다. 당시 팀의 최연장자인 나와 함께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쥔 초등 3년의 민ㅅ는 그의 산행 후기에서, 산을 오르다가 왠지 고슴도치가 키우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후기는 고슴도치를 장만하기 위한 자금 조달의 전략으로 이어졌다. 그 정도로 영혼의 파편이 자유롭게 비산하는 작가에게나 '맘대로' 가 구실을 한다. 그 아이는 이번에 돌아오신 바람님의 둘째 딸이기도 하다.

 

요즘 간식 당번에 대한 당국의 후기 단속이 부쩍 강화되었다. 나도 심야에 불시 점검을 받고 나서 후기를 쓰고 있다. 후기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보니 '본문 끝에 덧붙여 기록하는 글'이라고 돼있다.( 쓸 것이 궁할 때 정의定義를 들고 나오면 두세 줄은 그냥 간다. 그리고 있어 보인다.) 간식과 후기 당번을 같이 묶은 건 그럴듯하다. 둘 다 으뜸에 딸려가는 보조적 기능으로서 무성유종无成有終의 절제된 처신이 요구된다. 쯔께다시 밝히다가 배가 불러 사시미를 남기고 일어서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학당에는 가끔 논문 수준의 걸출한 후기가 올라와 본말을 유쾌하게 교란하기도 한다.

 

당번은 의무로 인식되지만 뒤집으면 권리도 된다. 문탁 같이 구성원이 열정적인 공동체에는 후자가 어울린다. 여러 사람이 간식을 가져와 배가 불러 수업을 산만하게 하는 등의 사태에 대비하여, 간식 제공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허여하는 '당번' 의 기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후기는 간식과 결이 다르다. 이사람 저사람이 마구 후기를 올려서 안구가 건조해지거나 정신이 혼미해져 수질首疾에 걸리는 등의 역작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후기는 당번이라는 이름의 통제를 풀었을 때, 그간 순서가 안 돌아와서 참아야 했던 지성들이 자유롭게 소통의 광장을 산보할 것이다. 그러면 후기를 단속하는 비용도 줄고, 후기대신 암송을 선택하더라도 징벌적 역役으로 오해받지 않을 것 같다. 안전한 통제보다 불안한 자유를 선택한 보상은 크다.

 

시경을 공부하며 두 계절이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천박한 의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저급한 예술적 감수성의 문제임을 자인한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호 박물관을 몇 달에 걸쳐 주말마다 갔던 적이 있다. 좋은 그림을 보면 눈을 씻은 것 같다는 집사람의 말 (그때는 뻥인 걸 몰랐음 )에 충격을 받고 그랬다. 하면 된다가 아닌 '보면 된다'라는 일념으로 밀어 부쳤지만, 남은 건 층 별 그림의 순서를 외우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박물관끼리 대여한 그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배치가 바뀌곤 했다. 난 아직도 반 고호의 그림보다는 돈 맥클린의 빈센트가 더 좋다.

 

한시는 우선 시각적으로 글자, 글자 수, 글귀가 반복되는 운율이 지배한다. '소리의 반복은 인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심리적 효과를 준다'라고 한다. 멀리 안 가도 요즘 광화문이나 서초동에서 동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그러면 그런 기계적인 운율의 갑각을 벗겨 버렸을 때, 속살인 내용은 한시의 시적 인상에 독자적으로 얼마나/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하우스 뮤직의 도리도리 동작과 멜로디 사이에 미적 쾌감의 지분은 몇 대 몇일까?

 

한자어 단어는 대개 두 음절 단위로 짝을 지어야 안정되고 함축적으로 보인다. 뜻 글자로서 이미 글자 마다 엄청난 가짓수의 뜻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시 다른 글자와 짝을 맞추어야 모양이 나는 한문도 운율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운율의 율律은 법이고 규칙이다. 시어가 규칙의 틀에서 생명을 얻는 건 역설적이고 비민주적이다. 이에 비해 전달되다가 부서져 흘릴 듯 흐물흐물하고 실 없는 우리 고유어가 오히려 시의 언어로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억지가 고개를 든다.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의 짧은 한 줄이 주는 긴 여운을 한시에서도 느끼려면 나는 얼마나 걸릴까. 차라리 나를 연구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외3

 

댓글 4
  • 2019-10-28 19:50

    헉! 전 앞으로 후기를 우찌 쓰라고 ㅠㅠ
    근데 무지 재미있습니다.
    그냥 한밤중에 시달려 얼떨결에 쓰신글이라니 좀샘이 나는걸요

  • 2019-10-28 20:13

    이렇게 재밌는 후기는 처음 봅니다ㅎㅎ
    이런 글솜씨.. 무척 부럽습니다

  • 2019-10-28 20:16

    하하...추억이 떠오르네요.
    그 최연소자 민서는 얼마가지않아 고슴도치를 포기했어요ㅠㅠ 후기쓸일이 없어져서요. 백두를 다섯번가고 말았거든요.
    중2때 다시 시작해 종주를 했습니다만...그때받은 후기의 상품은 다른곳에 쓰더군요^^

    한시에서 여운을 느끼려면....줄줄줄 인용할만큼 많이 달달달 읽어야하는건 아닐지...감히 말씀드려보아요.
    저도 못해서요^^

    영감님을 이문서당에서 뵈니
    참 방가워요~♡♡♡
    후기에서 뵈니
    또 방가워요~♡♡♡

  • 2019-10-29 08:52

    넘 재밌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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