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쏘릴17] 양손에 돈을 들고 저울질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자누리
2020-05-04 16:26
793

 

 

1. 재난기본소득은 공돈인가?

 

재난기본소득을 쓰려고 하니 걸리는 게 좀 있었다. 월급이 변함없이 나오는 우리집 경제는 재난수준이 아니라서 이 돈이 절실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내 손에 쥐어준다니, 소상공인을 돕는데 쓰라니 이게 뭐지 싶었다. 마치 장난감지폐를 나눠주고 시장놀이하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돈을 순환시키라는 거구나, 소상공인은 식당하는 언니네에서부터 문탁의 사업단들까지 널려있으니, 쓰는게 뭐 어렵겠나 싶었다. 그런데 걸리는 건 시장놀이하는 것 같은 그 가벼움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였다.

한번 주는건데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지차체에서는 공무원들에게 기부를 독려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것이지 뭐하러 똑같이 나누어주고 다시 기부하라고 하는가? 이 메커니즘이 이상했던 것은 마치 기본소득이 ‘누군가에게는 공돈’이라는 인식을 주게 된다는 점이었다. 문탁에서도 재난기본소득을 사용하고 공유지를 돌보는데 쓰자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 대해 문탁은 어려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지 않냐는 시선도 있다. 여기에도 재난기본소득이 공돈이라는 인식이 어느정도 깔려있다. 재난기본소득은 경상소득이 아니어서 공돈일수는 있지만, 기본소득이 공돈이라는 인식은 조금 곤란해보였다. 이 꺼림칙함에 재난소득을 받고도 쓸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2. 화폐순환의 시작이 수입이 아니라 지출이라면?

 

다시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논리를 발견했다. ‘생활방역’이란다. 코로나가 불러온 재난은 경제적 재난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돈을 벌려고 하면 사회적 접촉으로 다시 코로나가 심해질 수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돈을 풀어서 순환시키자는 것이 생활방역의 논리이다. 경제활동이 멈추었을 때, ‘누가 돈이 부족한가’ 보다는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논점이 있겠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호흡순환이 멈추었을 때 심장마사지로 혈관에 혈액을 내보내 순환을 재개시키는 것과 같다는 점이었다. 혈액을 내보내고, 돈을 시중에 내보내는, 그 ‘내보낸다’는 점에 퍼뜩 떠오르는 이론이 있었다. ‘현대화폐이론’이라 불리는 MMT이론이다. 우리가 아는 칼 폴라니와 케인즈의 계보를 잇는 이론이다.

간략히 소개하면(사실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이렇다. 우선 칼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했듯이 화폐는 상품이 아니고 가치물이 아니다. 개인간 교환에서 욕망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등장하는 매개물 상품이라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논리는 허구이다. 화폐는 내재적 가치가 없으므로 수지균형으로 가치가 조절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거시경제의 정책은 여전히 이 통화주의에 맞추어져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면 화폐란 무엇이란 말인가? 계산 단위이다. 시간, 공간의 단위와 다를 바 없다. 화폐는 다양할 수 있음에도 근대에 시공간의 단위가 단일화되듯이 화폐단위도 국가별로 단일화되었다. 단일화의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영국화폐이다.

영국왕실이 경제를 운영해야하지만 다른 공동체와 달리 그곳은 생산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선 소비를 외상으로 하면서 왕실인장이 찍힌 차용증서를 발행했는데 그것이 근대화폐의 전형이다. 나중에 그 화폐를 가져오면 그 사이에 세금을 걷어서 갚아주는 것이다. 만일 세금을 걷기도 전에 상환해달라고 하면 안되니 이 화폐가 더 여러번의 경로를 걸쳐 돌수록 편리하다. 비법은 세금의 의무였고, 그 세금을 자신들의 화폐로만 받는 것이었다. 원래 계산화폐는 공동체마다 달랐는데 세금의 의무가 왕실 화폐를 통용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리해보면, 정부 또는 국가경제는 소득 -> 지출의 순서와 반대라는 것이다. 소득을 분배하는 것이라면 화폐가 지금처럼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즉 세금을 걷어서 그에 맞게 지출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출을 먼저하는 것’, 빚짐으로 시작할 수 있게 했던 것이 화폐의 기능이었고, 세금은 그것을 유일한 화폐로 유통시키는 동력이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멈추자 하늘이 맑아져 대기오염의 출발이 인간활동임을 증명한 것처럼, 경제가 멈추자 정부가 돈을 내놓아 화폐순환의 출발이 지출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몇 번을 읽어도 모르겠던 것이 갑자기 쏙쏙 이해되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더불어 기본소득을 달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 재분배가 아니라 사전분배라면?

 

기본소득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는데에는 복을 순환시킨 경험도 한몫한다. 우리의 복은 이런 계산단위로서의 화폐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더구나 복은 발행할 때 마이너스로 시작하므로 실물화폐의 순환은 빚으로 시작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실물화폐란 계산단위를 장착하고서 실제 순환에 쓰이는 모든 화폐형태를 말한다.) 복이 국가화폐인 원보다 하나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화폐 가치의 결정이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복은 원과 달리 각자 발행할 수 있으므로 복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전체 순환량은 임의적일 수 있다. 구성원들의 눈치와 명예, 우정 등 사회적 신용을 표현하는 가치들이 복의 순환량을 조절한다. 그런데 거시경제에서는 이것이 잘 안보인다. 아니 잘 안보이게끔 하는 이론과 정책이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가치의 분배문제가 있다.

‘세금을 걷어서 그것을 예산편성하여 지출하는 것’, 이 전제에서 모든 분배는 재분배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의 지출도 주로 재분배라는 관점에서 보게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대로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될까?(물론 걷은 것이 쌀같은 실물이거나, 경제단위가 가정경제라면 재분배가 더 큰 지분을 차지한다). 지출할 용도에 따라 빚을 내는 것이므로 정부지출은 처음부터 사전분배가 된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사전분배에 하나의 의미가 더해지는데, 지출의 용처를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 정한다는 점이다. 즉 시민들이 그 분배를 책임지는 룰을 만들어 냄으로써 화폐의 가치를 사회가 결정하는 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길에 비로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전분배의 관점을 앞으로 더 갈고 닦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복은 기본소득 정책을 펼 수 없다. 정부부문에 해당하는 경제단위가 없기 때문이다. 복잔치때 펼치는 포틀래치가 가장 비슷하지만 그 때도 많은 친구들의 복을 끌어모아야 한다. 하지만 복을 사용하던 경험으로 빚=신용임을, 화폐의 가치란 사회적 신용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본소득을 받자마자 자연스레 그 가치의 사회적 결정과 배분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문탁에서 펼치는 재난기본소득릴레이가 그것을 잘보여준다. 자신의 생활에 소중하게 쓰고, 기본소득지급에서 빠지는 이주노동자에게도 관심을 갖고, 공유지 운영에도 힘을 보태고 등등. 이는 기본소득이 단지 공돈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치배분의 담당자임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제 기본소득을 어떻게 쓸지 정했다. 모아서 쓰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어서 각자 알아서 쓰라고 할 작정이다. 남편은 경기도와 수원에서 받은 20만원 중 10만원은 안경바꾸고 10만원은 길위기금에 선뜻 내놓겠다고 한다. 나는 골고루 다 내고 싶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돈이 없지, 돈 쓸데가 없을까!!

댓글 3
  • 2020-05-04 20:49

    사전 분배 개념, 정확히 이해한건진 모르겠지만 더 적절한 느낌이에요.
    전 이미 아이들 돈을 다 써버려서 나눠줄순 없지만 담에 또 기회가 있다니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 2020-05-05 07:53

    그쵸~
    우리 돈 쓸 데 많~~~~ 죠
    이런 재밌는 돈 쓸 궁리 좋은데요
    사전분배 계속 하면 좋겠네요 ㅋㅋ

  • 2020-05-05 08:12

    돈을 잘 쓰자면 머리가 쫌 아프긴하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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