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윤리, 김애령을 만나다

요요
2020-08-0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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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윤리> 세번의 세미나를 하고 마지막 시간에 김애령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모든 철학책은 자전적이다"라는 여성철학자 도나텔라 에스테르 디 체사레의 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저자 김애령은 자신의 책 <듣기의 윤리>도 역시 자전적인 책이었다며 이 책을 쓰게 된 과정을 들려주었습니다.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막달레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동체의 친구들,언니들과 함께 겪어온 이야기,

학교에서 강의하며 학생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 연구자로서 글을 쓰고 발표하며 나누어 온 이야기,

그 속에서 생겨난 문제의식과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분투가

김애령의 <듣기의 윤리>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서사가 <듣기의 윤리>의 내용과 겹쳐지자 지난 세 번의 세미나가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제가 가진 질문은 3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3부 1장에서 저자는 버틀러가 말하는 주체의 취약성을 연대와 집단적 책임의 근거로 끌고 옵니다. 

3부 2장에서는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구조적 부정의' 개념을 가져와 우리는 부정의에 공동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3부1장의 논의에 깊게 공감한 것과 달리 저자가  2장에서 구조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왜 가지고 왔을까, 궁금했습니다.

솔직히 '구조적 부정의'는 지난 수십년간 계속해서 말해져 왔던 '구조적 모순' 뭐 이런 것들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대의를 내건 운동과 정치적 실천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좀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김애령님은 책임을 뜻하는 두 개의 영어단어 accountability와 responsibility의 차이를 중심으로 

버틀러와 매리언 영 두 사람 모두 계산불가능한(accountable하지 않은) 책임으로서의

responsibility를 말하는 것에 자신은 주목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특히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이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정의를 '몫을 나누는 문제'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정의 혹은 공정성에 대해 새롭게 관점을 옮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날 김애령님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이날 오신 분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김애령님의 답변을 통해

<듣기의 윤리> 3부가 왜 그렇게 구성되게 되었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을 조금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날 질의 응답을 통해 참여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좋았고, 

쏟아지는 질문에 대한 김애령님의 주의깊은 듣기와 사려깊은 응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듣기의 윤리>를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저 역시 어느때보다 더 귀를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ㅎㅎ

 

 

그렇게 그 날 작가와의 만남을 끝으로 <듣기의 윤리> 세미나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들이 가볍게 휘발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삶에서 계속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말하기, 듣기, 응답하기, 그리고 환대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듣기의 윤리>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된 김애령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이어가서

또 새로운 공부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날 찍은 단체사진 올립니다.^^ 와주신 분 모두 감사했고 수고하셨습니다!!

 

댓글 4
  • 2020-08-02 13:51

    김애령 작가님을 만난 후,
    비로소 <듣기의 윤리>를 완독한
    느낌입니다.

    김애령쌤이 1부, 2부, 3부 어떻게 꿰어져
    한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지요.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불친절함'이란
    단어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고급진 음식을 쉐프의 설명과 함께
    맛있게 제대로 먹은 것 같습니다.

    작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책읽기,
    다음이 기대되네요.

  • 2020-08-02 15:08

    참 멋있었어요~
    자신의 의문을 놓지 않고 일상 속에서 탐구하며 계속 깊이를 더해가셨다니 쉽지 않은 일일텐데 싶더라고요.
    함부로 안다고 하지 않고 누군가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말하면 귀 기울이는 것,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의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 모두 쉽진 않지만 꼭 붙잡고 가야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와의 대화 신선하고 즐거웠어요~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서생원팀께 감사드려요~

  • 2020-08-02 21:47

    요요님 작가와의 만남 현장을 고스란히 재현해놓은 듯한 생생한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기억에 이 책에 대한 불편함을 '답정너'라는 말로 두 번이나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왜 제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지 깨닫지 못 했는데 작가와의 만남에서 문탁님이 하신 질문과 요요님의 후기를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치적 실천으로 맺다 보니, 앎과 실천의 일치를 중시 여기는 제 입장에서도, 이 책은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직관이 들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렇게 결론을 맺은 글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어림짐작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다 이해는 못 했지만 4차시까지 참여하고 나니 짙은 안개가 많이 걷힌 느낌입니다.

    음 그리고 철학은 참 답답하고 어렵지만 그게 매력이고 작가님 넘 멋진 아우라가 있으셔서 부러웠습니다^^

  • 2020-08-03 09:39

    저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을 가져온 맥락을 좀 더 알게 되었어요.
    아, 샘이 대학교수여서 그렇구나. 매일매일 "땅굴을 파거나", "몫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청년들을 만나고 있어서 그렇구나....ㅋㅋㅋ
    사실 저는 서발턴, 이방인, 소수성.... 왜 이렇게 굳이 구분하는지, 이론적으로 그 효과가 뭔지, 좀 이상했었는데 그것도 이해가 되었어요. 지금 청년들, 자신을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을 향한 발화... 인거죠^^

    얼마전에 박권일 샘은 "몫의 정의"를 이야기는 하는 요즘의 세태를 '회원제 민주주의'라는 말로 일갈했던 적이 있었지요.
    아마 우리세대는,
    청년들의 "땅굴을 파거나", "몫의 정의"를 이야기는 맥락을 모르는 게 아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과 문제의식이 있는 거겠죠?

    텍스트의 구성과 상관없이 '자전적 맥락'^^에서 애령샘이 왜 아이리스 매리언 영을 가져왔는지는, 알게 되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