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이동은의 한문은 예술 :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며

동은
2020-03-26 17:34
673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동은의 한문은 예술'에서는 초등이문서당 <한문이 예술>의 과정을 세 번에 걸쳐 보여드립니다.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며

 

 

 

  1.  

  나는 최근 <한문이 예술> 수업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문이 예술>의 ‘예술’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문으로 예술(禮術)과 예술(藝術)을 해보자!’ 그러니까 고은이에게 <사자소학>을 통해서 예절의 기술을, 나에게서는 <천자문>을 통해 표현의 기술을 배워보자는 취지다. 이 수업은 고전공방팀이 진행했던 ‘초등이문서당’의 길드다판인 셈이다.

  3개월 전 처음 수업준비를 시작했을 때, 막연하게 한자의 형태를 통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는 과정을 수업에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한자는 낯설고 어려운 문자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감정을 투영시킬 가능성을 가진 문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느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나만의 새로운 한자 만들기’를 기본 컨셉으로 획 바꿔보기, 한자 구성하기, 의미 확장하기라는 세 가지 수업 방식을 만들어냈다.

  한자로 이렇게 "활동해보자"라고 제안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 나는 <천자문>의 한자를 재해석하는 <천자 중에 한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때 나는 <천자문>을 읽으면서 한자가 단순히 ‘오래 전부터 쓰여 이해하기 힘든’ 문자가 아니라 풍부한 이야기와 풍경으로 현재를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흑묵과 청묵, 물감, 못, 실같은 재료와 여러 기법을 통해서 한자의 분위기와 질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한자들을 볼 때면, 특정한 장면이나 풍경, 때로는 한자의 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 내가 보는 방식으로 다시 한자를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한자에 대해 다른 지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아니, 그 이전에 한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있을까?(다이탄)” 나는 인연緣의 부수한자인 실糸에서 착안해 실로 한자의 형태를 만들어보고 락樂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춤추듯이 써보고, 한자의 형태 無속에서 ‘없다’의 의미를 끌어내고 청聽의 구성 한자들을 아예 음표 기호로 바꾸기도 했다.

  이 작업이 내게 준 즐거움이 컸기에 이 경험을 활용해 수업의 큰 틀을 만드는 데 많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수업을 기획하는 것이 신났다. 이번엔 잘 해내고 싶다는 근자감도 솟았다! 수업을 잘 해내고 싶었다. 이렇게 한자와 표현활동을 연계한 수업이라면 내가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들 익숙할만한 작품들. 왼쪽부터 <무聽>, <연緣>

 

 

2.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길드다에서 첫 수업 리허설을 했다. 그러나 준비과정이 재미있었던 것과 달리 수업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수업 내용과 활동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리허설에서 보여준 한자는 口(입 구)자였다. 口는 상형자로 그대로 입의 모양을 보여주는 문자다. 그런데 이 口는 처음 갑골문에 쓰일 때 한글 자음 ‘ㅂ’모양으로 양 쪽에 위로 올라온 부분이 있었다. 갑골문의 모양이 지금과 다른 건 딱딱한 거북이의 배딱지에 새기는 갑골문의 특성과 위-아래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내게는 이 갑골문의 모양이 마치 입 꼬리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변화된 한자의 형태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口의 형태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준비했다. “지금 口의 모양은 우리에게 한글 자음의 ‘ㅁ’처럼 보이지만 갑골문에 입꼬리 같은 게 달린 것을 보면 정말 입을 표현한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입으로 하는 일과 활동을 표현하는 작업을 구성했다. 마스킹테이프를 口 모양대로 붙인 뒤, 그 위에 자신이 생각하는 입과 관련된 일들을 스텐실 기법(도안에 물감을 찍어내는 기법)을 활용해 최종적으로 口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진행했다. 이렇게 수업을 만들었지만, 한자와 활동연계가 일차원적이기 때문에 활동의 깊이가 얕고 유치하게 느껴진다는 평가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한자 스토리텔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한자를 보며 내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보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활동을 구성해보기 위해서였다. 한자에 대한 내 생각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보면 수업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도 구체화할 수 있을 거라로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노골적으로 수업에 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내가 한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치 구멍 뚫린 문풍지같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단발적인 인상과 아이디어들의 나열이었다. 고전공방 선생님들과의 회의에서는 맥락이 없으니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3.

  리허설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해보자'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나자 완전히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준비를 하면 좋지? 얼마나 변경하면 되는 거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사실 수업을 준비할 때까지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내 수업은 활동이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공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이상하게도 매번 이렇다. 결국, 무언가를 할 때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공부뿐이다. 처음의 자신감은 어디 가고 '이게 될까'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왜냐하면 피드백이 계속 될수록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모르겠다"고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렇게 모른다는 이유로 다가온 상황들을 회피하고 싶은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이렇게 회피하고 싶은 순간들과 관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쓸 때 보는 사람이 ‘탄탄하다’라고 느껴질 수 있는 글을 쓰려면 처음부터 한 문장 한 문장씩 직조하듯 써야 한다. (이런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나는 어렵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나의 과제는 <한문이 예술>로 ‘기획한 일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가’이다. 글 쓰는 일이 직조하듯 이루어지는 것처럼, 수업도 그렇게 촘촘히 짜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업을 준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심취해 빠르게 틀을 만들 수 있었지만 정작 한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으니 수업을 위한 언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 과정에서 그저 내가 얼마나 (설득력이든, 혹은 무언가를 준비하는 자세이든, 지식이든) 부족한지 뿐이었다.

  나는 그동안 많은 일들을 ‘모르는’ 상태로 맞이하고 또 그렇게 흘려보냈다. 사실 "모른다"라는 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모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모른다"라는 함정에 빠져버린 내가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말에는 “모른다”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I don’t know 중어는 不知道 일본어에서는 分からない(分から-알다, ない-부정형)와 같이 ‘알다’의 부정형을 쓴다. 우리는 어떨 때 “모른다”고 말할까? 나는 지금까지 “모른다”는 말이 나의 상태를 드러 내주는 말, 내 심정을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말이 나를 드러내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이 말은 나를 그 상태로 머물게 만들었다. 나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한 가지 생각만 하기로 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건 할 수 있는 만큼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 과정을 세밀하게 구성하는 거야.'

 

 

 

 

 

4.

 

 

“모든 글자는 고유의 조자 형상과 기원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간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면서 고유의 쓰임새와 경력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탕누어, 한자의 탄생)”

 

 

  이후에 나는 <한자의 탄생>을 읽었다. 저자 탕누어는 책에서 내가 시도하려고 했던 ‘한자 스토리텔링’을 풀어내고 있다. <한자의 탄생>라는 제목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한자의 기원과 변화과정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서는 어떻게 한자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정답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대부분 ‘알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고대 사회에 쓰이던 갑골문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들에 초점을 맞춘다. ‘한자 스토리텔링’은 그 사실들에서 출발한다. 사실에 근거한 자유로운 상상!

  갑골문은 가장 오래된 한자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쓰고 있는 한자들의 가장 오래된 흔적을 통해서 고대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 나는 저자가 하나의 갑골문 한자로 역사를 추적하고, 이 역사의 조각으로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알 수 있는 영역’으로 창조하는걸 볼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책을 소개할 예정이다. 중요한 건 내가 자유로운 상상이라고 여겼던 것이 대부분 망상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 공부 덕분에 나는 조금씩 한자와 연계 활동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 리허설에서 다룬 口는 형태의 변화보다 口에 담겨있는 다양한 의미들, 예를 들면 ‘입’뿐만이 아니라 ‘골목 어귀’, ‘구멍’, ‘입에서 나는 소리’ 등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포인트를 맞춰야 하는 것은 형태보다 확장된 의미였다. 커리큘럼에 있는 각각의 한자마다 한 자 한 자 맞추어 주제를 정하고, 활동이 주제와 얼마나 잘 연결되는지를 살폈다. 道(길 도)자에서는 두 한자가 합쳐진 회의자와 관련된 설명을 추가하기도 하고, 이에 따른 활동으로 道의 구성을 분석해 한자를 의미에 맞게 변형해보는 활동을 구상했다. 本(근본 본)자는 나무의 뿌리 표식이 바로 ‘근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한자다. 그렇다면 지사자가 ‘지칭하는 것’이 어떻게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나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다. 공부는 이런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슨한 아이디어라고밖에 설명할 수없던 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공부로 알게 된 것들이 한자와 활동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5.

  코로나 때문에 수업 회차가 줄기도 하고 함께 공부할 친구들을 모으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내게는 수업을 다시 점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또다시 ‘모른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무책임하게 굴지 않았을까. 이번 <한문이 예술>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책임이 “모른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무릅쓰는 일이라는 걸 경험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수업을 준비하는 일은 그동안에도 해온 일이긴 했지만 대부분 보조적인 역할과 진행을 도와주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온통 '내가' 수업을 이끌어가는 일에 몰두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걸 기대하고 그걸 위해 노력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을 '이끌어가는 일'은 나 혼자서 가능한 게 아니다. 나는 이 수업을 통해서 누군가와 만난다거나, 함께하는 일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만나게 될 사람들과 함께할 나를 기대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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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수업이 재미있을 것 같다면!

<한문이 예술> 신청링크!(<- 클릭!)

 

 

 

 

 

댓글 4
  • 2020-03-28 08:10

    글을 읽으며 든 느낌, 동은이가 찾아낸 길이 탕누어가 했던 것과 같아 보이네요!
    알 수 있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새롭게 알 수 있는 사실로 확장해나가는 것. 그것이 상상이자 창작이겠지요?
    ''디자인-씽킹"이 대충 그런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글로 이해가 확 되네요.
    잘 읽었어요.
    나중에 어린 친구들의 창작은 어땠는지도 글로 써주면 좋겠네요^^

  • 2020-03-28 11:41

    동은이의 다음 글도, 그리고 활동도 기대되네요.^^

  • 2020-03-28 15:49

    동은이의 노력이 어떤 수업으로 나타날지 기대됩니다.
    화이팅!

  • 2020-04-03 16:05

    어떤 상황이든 백퍼 '모른다'로 말해질 수 없지 않을까 싶네요.
    동은이가 발견한 대로 모르는 영역보다는 아는 영역에 집중해 본다면 좋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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