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김고은의 GSRC 프리뷰 -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고은
2020-05-15 23:06
1003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김고은의 GSRC 프리뷰'에서는 '길드다소셜리딩클럽'에서 함께 읽게 될 책을 세번에 걸쳐 책을 리뷰합니다.

 

 

 

 

1. 페미니즘은 일부의 문제일까?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던 20살 이후, 나는 페미니즘에 다양한 입장을 취해왔다. 처음 페미니즘을 배웠을 땐 큰 감명을 받아 삶에 적극적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다. 몇 년 전 페미니즘이 또래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기 시작했을 때엔,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사태를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그 뒤로 나는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페미니즘에 지지를 선언했든 외면하겠다고 다짐했든, 내 선택과는 별개로 페미니즘은 언제나 내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였고, 정답은 모르겠지만 푸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 숙제와 같았다. 아마 많은 또래 친구들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세미나인 길드다소셜리딩클럽(이하 GSRC)의 주제로 꼽힌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기도 하다.

   GSRC에서는 어떻게 페미니즘에 접근해야 좋을까? 페미니즘은 이제 누구나 들어본 것이 되었지만,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페미니즘은 종종 억압받는 일부 여성들의 문제, 여성과 남성 간의 성(性) 대결로 다뤄진다. 그러나 세계를 두 개의 성으로 양분하게 되면, 그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MTF(Male To Female), 어느 한쪽 성이 아닌 젠더 정체성을 가진 사람, 무성적으로 다뤄지곤 하는 장애인, 페미니즘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는 계급의 사람, 언급되지 않는 여성 이주노동자들 혹은 국제결혼을 한 여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그 사이에서 사라진 목소리가 궁금했다. 일라이 클레어는 여러 목소리를 찾아보던 중 만난 작가이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순한 구분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사람으로, 책 『망명과 자긍심』에서 통해 이분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2. 요약하기 어려운 책 『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는 선척적 뇌병변 장애인, 다이크(한국에서 부치), 젠더 퀴어, 페미니스트,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다. 그리고 장애·환경·퀴어·노동운동가이자 시인, 에세이 작가이다. 그의 저서 『망명과 자긍심』은 출간된 뒤로부터 꾸준히 미국에서 장애학·퀴어학·여성학 분야에서 주요 교재로 사용되어왔다. 간략한 설명만 보아도 이 저자가, 그리고 그가 쓴 책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다루고 있을지 느껴지는 듯하다. 실제로 저자는 책이 너무 많은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것 같다.

“『망명과 자긍심』 초판 출간 후 10년 동안, 나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았다. “독자들이 당신의 책에서 무엇을 얻길 바랍니까?” … 질문을 들으면 나는 항상 잠시 주저한다. 질문은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오리건주의 개벌에서부터 프릭 쇼의 역사까지, 퀴어 시골 노동계급 조직화의 복잡함에서부터 성적 대상화에 대한 장애 정치학까지 망라하는 책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겠는가?“ (2판 서문 中)

 

 

일라이 클레어

 

   아쉽게도 저자는 독자가 기대하는 깔끔하고 쌈박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거꾸로 독자들에게 이 문제들을 어떻게 축약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클레어는 책을 단 하나의 쟁점으로 요약할 수 없도록 불친절하게 집필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 이야기가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풀어냈다. 그렇다. 클레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세상에 널려있는 문제들의 복잡함이고, 이 책을 통해 요구하는 것은 모든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 그 자체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문제를 다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과연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자면, 이 책이 페미니스트 저자에 의해 쓰였고 여성학 교재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한국에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번역했다는 사실 자체가 페미니즘이 다양한 쟁점 위에 놓여야만 한다는 요구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한정하여 보는 관점은 이미 1980년대 3차(*) 페미니즘 물결이 시작되면서 반박되었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의 3차 물결과 교차성에 대한 책들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고, 지난 몇 년간의 성의 이분법적인 논의방식에 대해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근래에 번역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퀴어 공동체에서의 망명

 

   클레어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인 클레어는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벗어나 도시에 삶을 꾸려 살아가고 있다. 클레어가 태어난 곳은 원시림 벌목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의 소녀들은 대개 끝없이 아이를 낳으며, 소년들은 술과 총에 휘둘리며 살 운명이었다. 반면 클레어는 중산층이 되기를 꿈꾸던 교사 부모님들에 의해 마을을 떠나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설령 클레어에게 이동이 일찌감치 주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는 거의 탈출에 가까웠다. 클레어는 대학교 진학을 통해 악독한 인종차별주의, 무분별한 산림 파괴, 경제적 선택지가 없다는 절망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장애인은 일자리도 구할 수 없는 협소한 시골의 생활로부터,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마을에서 이웃에게 다이크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처하게 될 위험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가하던 아버지와 다른 가해자들 그리고 그것을 방관했던 어머니로부터 탈출했다. 그리하여 도시에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몇몇 공동체를 만났고, 그중 다이크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직시하는 시간까지도 가질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도시로의 탈출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클레어는 퀴어 공동체에서 퀴어함(이상함)을 느낀다. 퀴어작가들의 전국회의는 빛나는 황금빛 난간과 눈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 샹들리에가 있는 호텔에서 열리고, 참가자들은 공손하게 시중을 들던 유색인 남성과 대비되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금으로 만든 커프스단추를 착용하고 있다. 그 옆에서 클레어는 한때 고향의 노동자들의 복장이었고 현재는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청바지와 빛바랜 셔츠를 입고 있다. 

 

 

 

   페미니스트인 클레어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때때로 그의 동료 환경운동가들은 나무와 물고기를 경이롭게 숭배하며 벌목꾼을 멍청한 짐승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클레어가 벌목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훨씬 따뜻하고 약간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클레어는 자신이 봐왔던 벌목 노동자와 그들이 엄마의 수업에서 쓴 수필을 떠올린다. 물론 그들은 수필을 통해 벌채와 강간을 둘 다 경험해봤다며 허세를 부리기도 하지만, 때로 어머니의 가슴을 미어지게도 만든다. 벌목 노동자들은 원시림을 사랑하고, 이른 아침 안개와 딱따구리의 소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그들의 사랑과 기쁨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는 전기톱을 어깨에 메고, 말도 안 되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보낸 지난한 나날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나는 그 남자들을 생각한다. 여름날 바깥에서 나무를 베고, 어망을 잡아끌고, 건초를 묶으며 긴 시간 일을 하느라 벌게진 그들의 목덜미를.…”(57)

   클레어가 고향으로부터 탈출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고향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러한 감각은, 낯선 여행길에서 분명한 사실로 다가온다. 클레어와 친구가 작은 벌목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각각 다른 것을 목격한다. 유대인이었던 친구는 그곳에서 미국 반공·극우 단체인 ‘존 버치 협회’의 간판을 발견하고는 극도의 경계 속에서 여행을 이어나간다. 반면 클레어는 쓰러질 듯한 중심가의 모습, 개벌지 숲으로 얼룩덜룩한 야산, 뒤 창문으로 총이 보이는 1톤 픽업트럭을 발견한다. “존 버치 협회를 자랑스레 광고하는 마을로 이동하면서 … 나는 경계심을 갖긴 했지만, 집처럼 보이고 집과 같은 냄새가 나는 이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꼈다.”(111)

 

 

 

   다이크이자 친족 성폭력 생존자인 클레어는 시골의 폐쇄성보다 도시의 익명성에 안전함을 느끼지만, 노동계급 마을 출신 클레어는 도시의 화려함보다 시골의 소박함에서 기쁨을 찾는다. 한 사람의 몸엔 다양한 문화 위에 형성된 많은 몸이 따라다닌다. 클레어는 수많은 집으로서의 몸을 갖고 있지만, 그렇기에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계속해서 집을 잃고 있다고 느낀다. 클레어는 자신이 “망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떠나기 전, 나는 이성애 중심적인 시골 노동계급 마을에 사는 시골 혼합계급 퀴어 아이였다. 떠난 후, 나는 대다수가 중산층인 도시 퀴어 공동체에 사는 도시로 이주해 온 혼합계급 다이크 활동가였다. 이따금 나는 내가 그저 하나의 배제를 또 다른 배제로 교환했을 뿐이고, 거기다 집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110)²

 

 

 

4. 관음의 대상에서 관능의 경험으로

 

   페미니스트이자 환경운동자인 클레어는 동시에 장애운동가이기도 하다. 장애인 당사자인 클레어는 종종 ‘프릭(freak)’이라 불린다. 기형, 변종, 진기한 구경거리, 괴물이라는 뜻인 이 단어를 떠올리면 클레어는 약간 복잡해진다. 영화 「위대한 쇼맨」(2017)을 본 적이 있는가? 「레미제라블」(2012)에서 불의한 세상에 맞서 싸우던 장발장(휴 잭맨)이 장애에 대한 편견과 맞서 싸우는 서커스의 단장 P.T 바넘으로 나오는 영화 말이다. 그러나 실제 P.T 바넘은 프릭을 보고 싶어 하는 시골뜨기들의 열망과 대중들의 장애·인종에 시선을 이용한 영리한 사업가일 뿐이었다. 유럽귀족役을 맡았던 왜소증 ‘엄지장군 톰’은 어렸을 때부터 P.T 바넘과 일해왔다. 톰이 다른 키 작은 여성과의 결혼을 결심하자, P.T 바넘은 결혼식을 볼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2천 명이 참석하며 큰 성공을 거둔 결혼식-쇼는 “사랑에 빠진 소인국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뉴욕 타임스』의 전면을 장식했다. 이런 식으로 프릭을 전시하던 프릭쇼는 20세기에 이르러 장애가 치료의 대상이 된 뒤, 장애·인종 착취라는 오명을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P.T 바넘과 '엄지장군 톰'

 

'엄지장군 톰'의 결혼식-쇼 포스터

 

 

   그러나 클레어는 프릭쇼에서 다른 면모도 발견한다. 프릭쇼가 번성하던 시절 사람들은 ‘쇼’ 위에서 연기하는 프릭을 관음했다. 또 일부 프릭은 ‘쇼’를 통해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둬들였다. 심지어 어떤 프릭은 후에 빈털터리가 된 P.T 바넘을 위해 공연함으로써 그를 구원하기도 했다. 반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장애를 가진 몸은 일상에서 발화나 눈빛을 통해서, 혹은 시스템의 분류를 통해서 관음의 대상이 된다. 클레어는 합당한 이유로 발가벗겨진 채 의대생의 훈련을 위한 도구가 된 몸들에 대해 떠올린다. 길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놀이터에서 비장애인들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빤히 쳐다보는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떼로 몰려온 비장애인들이 염치없이 돈도 안 내고 구경하게 놔두는 건 어느 쪽일까?”(187)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프릭이 자신의 장애를 ‘과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 만연했던 착취와 문제가 되었던 사회적 구조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프릭쇼의 프릭은 자신을 재료로 삼은 연기자였고 기획자였다. ‘엄지장군 톰’과 그 부인은 결혼식-쇼의 연기로 명성을 얻었고, 자신들의 유럽 투어콘서트를 위한 도약판으로 삼았다. 우리는 프릭을 두고 ‘인권’도 없는 시대에 태어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고, 프릭쇼를 그저 ‘미개한’ 사람들이 행한 경솔한 짓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애가 의학과 연결되어 동정과 비극으로 점칠 되는 오늘날 장애인들의 삶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클레어는 벌목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시간들로부터 그들을 그저 멍청한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낸 것처럼, 프릭쇼를 통해 장애를 단순한 동정과 억압의 대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발견해냈다. 클레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에서 발견한 또 다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풀어놓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쉽게 특정한 시선들에 의해 대상화되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그들을 성애화하지는 않는다. 클레어는 차고 넘치는 ‘섹슈얼한 여자’처럼 생기거나 움직이지 않기에 자신이 어떻게 성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어는 낯선 경험을 하나 하게 된다.

늦은 밤
당신의 몸, 긴 곡선을 따라 어루만들 때,
떨림이 살갗에 닿고, 그 안에 도달해,
그리고 난 조롱당하리라 예상했어, 그런데 당신은
내 손길 아래 고조되었지, 더 만져달라 간청하면서.
-「떨림」中, 일라이 클레어 作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인 그의 오른손은 항상 떨렸다. 오른 손의 떨림은 어린 시절부터 조롱과 동정의 대상이었는데, 클레어의 애인은 이에 대해 조금 다르게 반응한 것이다. 차라리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오른손이, 그 손의 손상에 대한 패티시즘이 아니라 손상과의 관계 속에서 섹슈얼리티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클레어는 평생 관음의 대상이었고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욕망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클레어는 몸은 그렇게 텅 비어있지 않다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몸에 귀 기울이는 것의 어려움과 별개로, 누구도 몸이 가진 힘을(앎)을 그런 방식으로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몸을 두고 관음과 명명의 대상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몸에 대한 기만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심장과 폐, 근육과 힘줄의 감각적인 경험은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와 세상에 이야기해준다. … 확실히 내 뼛속에, 쭉 뻗은 다리와 구부린 등 안에, 살갗이 기대어 놓인 돌 속에 어떤 앎이 존재하고 있었다.”(261)

 

 

 

5. 놓치기 쉬운 몸-장소

 

   다중 쟁점으로 삶과 세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이론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지식은 쌓아도 쌓아도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클레어의 말마따나, 관건은 몸이다. 조건이 너무 다름에도 불구하고, 클레어의 이야기를 읽으며 곧바로 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나 또한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몸을 비장애인으로서 바라보고 성(性)과는 무관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는 것은 클레어의 문제이자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몸을 일부 이미지들에 가둬놓았던 것은, 몸에 귀기울이지 못한 채 사회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급급했던 것은 클레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몸은 바로 그런 장소이다. 하나로 단일화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때로 상반되어 보이는 문화를 동시에 품고 있기도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높은 점수를 받든 나쁜 점수를 받든― 특정한 방식으로 분류되고, 그로써 관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장소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부분 몸이 그 자체로 어떤 앎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러므로 클레어에 따르면 몸에서 시작할 때에서야 페미니즘은, 다중 정치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놓치기 쉬운, 잊기 쉬운 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클레어의 주장은 나를 스스로 망각하고 있었던 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그는 독자를 몸의 당사자의 자리에 앉혀놓고는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우리는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을 변환시키고 그것들이 있던 장소에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의 뼈 가까이 다가와 마침내 뼈에 충실해질 무언가를, 해방과 기쁨과 분노와 희망과 이 세상을 재편할 의지로서 우리 몸에 들어올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61)

   큰일이다. 책을 읽은 이상 이제 외면할 수도 없게 되었다. 클레어는 나에게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아니, 어쩌면 짐처럼 느껴지던 페미니즘을 이제야 비로소 숙제로 만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댓글 5
  • 2020-05-18 11:01

    잘읽었습니다. 엄청 복잡할것 같지만 왠지 읽고 싶어졌습니다. 일단 저는 책읽기를 숙제로

  • 2020-05-18 20:40

    다중 쟁점으로 삶과 세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이론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쟁점이 '일이관지'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디양한 경험을 한 저자가 글로써 독자들과 소통하려고 했을 때 끝까지 견지하고 싶었던 어떤 지점..이라고 할까요?
    책 제목으로 무리하게 유추해 본다면 '자긍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까요?
    어떤 순간에도 자긍심으로 응하라?
    처음 들은 책 제목에.... 잘 모르는 분야다 보니 서평에서 느낀 '다중쟁점'을 녹이느라 애쓴 글로 읽혀서
    거칠게 이런 이야긴가 유추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간 보릿고개 글 쓰면서 애쓴 고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 2020-05-19 06:22

    “하나의 배제를 또 하나의 배제로 교환했을 뿐”이라는 문장이 쏙 들어오네요
    뭔가를 알게 되고 만난다는 것이 그저 다른 배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 2020-05-21 15:07

    너무 잘읽었습니다 왠지 울컥하는 이 느낌은 뭔지 ㅎㅎ
    책 읽고 싶어지네요~

  • 2020-05-21 18:40

    푸코보다 더 어려운 패미니즘 ㅠ
    마지막 사진이 젤 감동적이 었다는...
    고은. 그동안 보리고개 글쓰느라 수고 했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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