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김고은의 GSRC 프리뷰 - 개연성 없는 연애, 소설

고은
2020-04-1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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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길드다> 청년들이 <길위기금>으로부터 고료를 받으며 글을 연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김고은의 GSRC 프리뷰'에서는 '길드다소셜리딩클럽'에서 함께 읽게 될 책을 세번에 걸쳐 책을 리뷰합니다.

 

개연성 없는 연애, 소설

 

 

 

 

 

 

 

어딜 가도 연애 얘기다. 기사에서는 연예인들의 연애담이, 노래에선 가수들이 겪은 연애의 기쁨과 슬픔이, 영화에는 누군가의 드라마틱한 연애 서사가 쏟아져나온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길드다소셜리딩클럽>의 주제로 선택했을 때 책 선정에 난항을 겪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 근간 중 연애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목록 중에 두 사람의 연애가 중심소재인 소설이 손에 꼽았다. 대부분 ‘연애’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최은영의 단편 소설집『쇼코의 미소』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와 관련 없어 보이는 소설들이 잔뜩 들어있는 연애소설추천목록을 보면서 연애가 정말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이상 연애는 고전적인 정의인 남자와 여자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섹슈얼한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일상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아무런 맥락 없이도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같이 강렬한 연애의 흔적을 삶의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연인’이라고 부르는 관계에서도, 때로는 ‘친구’·‘선후배’·‘직장 선후임’이라고 부르는 관계에도 말이다.

"어떤 연애는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같다." (「쇼코의 미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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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써는 알 수 없는 것들

「한지와 영주」의 주인공들은 『쇼코의 미소』에서 그나마 고전적인 연애의 정의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두 주인공은 프랑스 리옹에 있는 수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만났다. 영주는 처음부터 키가 190cm가 훌쩍 넘는 케냐인 한지를 눈여겨 보았다. 영주가 수도원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에는 그가 공부하던 대학원도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영주는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도원 장기체류를 선택하며 결국 그 자리에서 떠나왔지만, 여전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경직되어 있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때조차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주변을 많이 의식하는 영주에 반해 한지는 편안해 보였다. 둘이 함께 야간 보초를 서지 않았다면, 영주는 모두와 함께 웃고 떠드는 한지를 멀찍이서 쳐다만 보다가 결국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영주가 한지를 만나며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한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들었는지 알게 된다.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질학시대를 외우던 영주, 한지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상상하던 영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다른 친구에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영주는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한지로부터 차단당한다. 영주에게 곁을 내어주고 남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던 한지는 갑자기 영주를 못 본 척하고, 눈길을 피하고, 마지막에 영주가 주는 편지-노트까지 거절한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소설이 끝나도록 독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점의 영주는 끝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가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일들은, 특히 그것이 예외적인 상황일수록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

그날도 한지는 “내일 보자”라고 말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다정한 눈으로 나에게 너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혹은 그것을 단서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씩 한지는 내가 ‘단순하다’고 말했었다. 항상 웃으면서 말했지만,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고 느껴졌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번은 한지가 “넌 참 단순하구나”라고 말하고는 “단순함은 좋은 거니까”라고 변명하듯 덧붙였었다. 나는 한지가 말한 나의 그 단순함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소설은 개연성을 갖는다. 전개되는 서사를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소설의 주된 사건을 과거의 사건, 등장인물의 성격, 사회적 상황 등과 맞물리게 만든다. 그래야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쩌다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인지 이해하며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는 「한지와 영주」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납득하도록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의 서사가 아니라, 연애란 것에 얼마나 개연성 부족한가 하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연애라는 사건에는 큰 개연성이 없다. 어쩌다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왜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런 개연성 없이 하늘로 붕 솟거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아무런 개연성 없이 꽁꽁 숨게 되거나 적나라하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연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삶 도처에 등장하는 연애가 얼마나 개연성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연애’에서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단정 짓고 마는 일에 제동을 건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떠난 사람이고 누가 남겨진 사람인가? 우리는 과연 「한지와 영주」에서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한지가 먼저 차단했기 때문에 떠난 사람이고, 느닷없이 차단당한 영주를 남겨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더 이전에 한지가 영주로부터 차단당한 것처럼 느꼈다면, 혹시 한지가 남겨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떠남과 남겨짐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 중 어디에 점을 찍고 이어서 개연성을 만들면 좋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떠난 것 같던 그 사람도, 홀로 남겨진 것 같던 그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로 마음에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어짐이 곧 모든 것이 끝남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누가 먼저 손을 놓았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헤어짐을 통감하는 사람은 헤어진 뒤부터 또다른 국면을 감당해야만 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짐으로 남아있다. 언뜻 보기에 이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상대와 거리가 생긴 순간부터 우리는 함께 겪었던 어떤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짐은 혼자만의 짐이 아닌데, 내가 내려놓아도 되는 것일까? 그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인 게 아닐까? 헤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즉 상대와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와 같은 문제는 난관에 봉착한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의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애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이 함께 해온 시간과 맺어온 관계로부터 연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옥이 자신의 사촌뻘인 순애언니의 손을 놓은 것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해옥의 그 커다란 짐은 자신이 떠나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오랜 세월 서로에게 삶을 의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해옥은 평범하게 살아왔다. 순애를 식솔로 부릴 수 있을 만큼은 넉넉한 집안에서 큰 아픔 없이 자랐다.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고 회사를 다니던 해옥은 나이가 든 뒤에도 병원에서 입원치료도 부담 없이 받을 정도는 되었다. 반면 순애는 일생을 불운하게 살아왔다. 변변찮은 피붙이도, 의지가 되어줄 사람도 없이 자란 순애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던 건 어렸을 적 자신을 따랐던 강아지 한 마리와 해옥뿐이었다. 순애가 성인이 된 뒤에도 세상은 순애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순애가 결혼하고 임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애의 남편이 빨치산으로 잡혀가고,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다.

엄마[해옥]가 이모[순애]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조금 멀리에서, 함께 살기

순애는 남루한 차림새로 아기를 포대기에 들쳐 엎고 해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옥이 매번 순애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옛날 그 시절의 강아지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게 연이 끊기기 전까지 순애는 그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해옥은 그 이상 어떤 이야기도 묻지 않았다. 해옥은 먼저 순애의 연락을 피해 떠났지만, 어쩌면 해옥이 먼저 옛날 그 시절로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순애는 해옥의 전화기 너머로 남겨졌지만, 어쩌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해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해옥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바램대로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가끔 엄마는 이모를 떠올렸다. 저녁을 준비하다 부엌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때나 한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작은 아기를 등에 업고 걸어가는 아기 엄마들을 볼 때 그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때로 인연이 정리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해옥은 결국에 순애를 떠났지만, 그러나 끝끝내 떠나지 못했다. 해옥은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다. 상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해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속 질문했을 것이다. 자신은 번듯한 생활을 하며 순애가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외면한 것, 자신이 유일한 친구였을 순애를 살피지 못한 것을 말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 하나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곱씹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해옥은 순애를 떠나온 일을 더욱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옥이 과거의 일에 머무르며 그곳에 숨었던 건 아니었다. 해옥은 여전히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살면서도 순애와의 일을 잊지 않았다. 짐을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당장이라도 해결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내려놓기 위해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지 않고 상황을 곱씹고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순애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순애는 죽던 날 영혼이 되어 해옥을 만나러 왔다.

죽음 직후에 사람의 영혼이 멀리 떨어져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엄마는 들어 알고 있었다. 이모가 열여섯 살짜리 아이의 얼굴로 엄마의 병실을 찾아왔을 때, 엄마는 엄마가 이미 오래전에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를 바라보는 이모의 얼굴은, 언젠가 형부의 연애편지를 읽을 때처럼 쓸쓸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이모는 물에 닿은 비누처럼 점점 작아졌다. “언니는 가벼워지고 있구나.”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짐을 덜어내는 것 혹은 용서받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종종 그런 경험을 한다.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도, 오래도록 만나지 않고도 누군가를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물론 상황의 개연성을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론 상황의 개연성을 만들어줄 말·행동·만남과 같은 합리적인 고리가 하나도 없는데도, 오히려 애써 개연성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상대를, 상황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멀리서 각자 같은 짐을 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저만치 떨어져서 잊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짐과 함께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분명 그들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함께 살아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혼자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냐 혹은 용서를 구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해야겠지만, 짐을 내려놓거나 용서를 구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상대에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혼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고, 대담하게 대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2
  • 2020-04-21 18:12

    개연성 있든 없든 나도 연애하고 싶다... 초연한 듯 설레는 느낌 같은 거 말예요^^

  • 2020-04-22 16:26

    한지와 영주에서 연애가 얼마나 개연성 없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만, 순애와 해옥의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되네요. 서로가 사건(헤어짐)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둘이 같이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오히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 2020-04-22 22:56

    오랜만에 연락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글 한 편을 읽었네요! 제가 마지막으로 문탁에 갔을 때에 친구관계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 친구와 단절되었다고 느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 친구와 다시 가까워졌답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연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부분에 격하게 공감하는데, 이 친구가 그런 친구거든요. 저는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어서 '연애 같다'는 게 뭔지 안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 친구와의 관계만으로도 어렴풋이 느껴지기는 해요.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침묵과 시간의 간격 속에서 더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라는 점에서요.
    '느닷없이 차단당했던' 영주의 입장도 저는 (좀 더 현대적인 상황에서) 깊이 와닿네요. 그렇게 개연성 없이 카톡을 무시당하거나 제가 모르는 sns 계정을 발견한 적이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전 제가 관계의 피해자이자 약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시 그 친구와 가까워진 지금 생각해보니 꼭 그런 위치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도 분명히 그 친구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적이 있었겠죠. 한지와 영주 단락을 읽으니 문득 그 생각이 나네요. 경험과 연결시킬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리고 순애와 해옥처럼 그 사이 어느 정도의 거리가 더 '연애스러운' 관계를 만든 이야기도 겪어본 것 같아요. 이 경우는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과 다를 수 있고, 제 경험의 맥락에서 이해한 것이지만, 여전히 이 친구는 제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을 많이 품고 있거든요. 저는 이 친구의 더 밑에 있는 것들까지 봐도 괜찮은데 얘는 자꾸 안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글을 읽고 보니 이 심리적인 거리와 연락이 끊겼던 시간적인 거리가 이 관계를 더욱 연애 같은 우정으로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에요. 공백 사이에서 무언가가 진행될 수 있나? 순애와 해옥의 이야기 자체는 저한테 되게 추상적이고 문학적으로 느껴져서 그 심리가 완전히 와닿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는 것 하나는 알 것 같아요.
    이렇게 긴 생각을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구구절절했죠!ㅋㅋㅋ

  • 2020-04-22 23:50

    왜 연애의 '무개연성'에 주목하였는지 궁금하네요.
    결국 그 '무개연성'이 관계의 종결을 단순하지 않게 만들고 헤어짐을 관계의 끝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의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애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이 함께 해온 시간과 맺어온 관계로부터 연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옥이 자신의 사촌뻘인 순애언니의 손을 놓은 것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해옥의 그 커다란 짐은 자신이 떠나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오랜 세월 서로에게 삶을 의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왜 연애관계로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었다면 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연애의 무개연성에서 헤어짐 이후 맞딱뜨리는 미해결의 문제, 짊어지는 짐->짐을 내려 놓거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로 흐르는 전개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고은이 하고자했던 질문이 확실히 와닿지 않은 상태로 대답을 들어버리는 느낌이었어요. 미해결의 문제? 짐? 그건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같은 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모든 헤어짐에는 용서를 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고 그것은 결국 혼자서 해낼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이런 말일까요??
    예로 든 소설은 수많은 헤어짐의 형태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거기서 '헤어짐'이라는 관계의 과정을 꿰뚫는 특질을 포착했던 걸 말하고 싶었던 건가요?
    고은은 끝으로 대담하게 대답을 했는데, 나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충분히 들었는가? 하면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일까요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답을 애써 적어내려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조금 들었습니다.

    사실 인연이라는 거 자체가 우연일 뿐인데 특정한 우연들에 의미 부여를 하면서 독창적 개연성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연애를 시작하게 만들지 않던가요? '캬 우리 인연은 운명이었어.'이 생각이 주는 안정감, 안도, 불안의 감소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수많은 삶의 순간들 중 한 곳에 개연성을 부여해 특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설과 닮아있구나 싶기도 하네요!

  • 2020-04-23 00:05

    저도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 <한지와 영주>를 가장 재밌게 읽었는데, 이 단편이 '연애란 것이 얼마나 개연성이 부족한가'를 납득시킨다는 말이 참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되는 것 같아요. 감정만큼 개연성 없는 게 또 없고, 그래서 또한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어렵고 부끄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단절된 관계에 대해서는 문득 문득 의문도 들고 울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덮어두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해옥과 순애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이게 언젠가는 실마리가 보이겠구나, 풀릴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네요!
    내가 연애를 할 때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연애를 시작할 때 보여지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확 변하지? 저런 모습을 처음 보네,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의문들과 고은의 글이 잘 연결되어서 재밌게 읽었어요!

  • 2020-04-23 02:37

    한 밤중에 잠이 안 와 글을 읽었어요. 요즘 게임과 쾌락에 빠져 텍스트와 단절 될 뻔한 두뇌를 깨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었답니다^^*

    만남과 이별에는 개연성이 없다는 것, 이별하며 혹은 단절되며 느끼는 무거운 짐.. 여기서 이러글을ㅎㅎ 새롭네요! 하지만 연애에서의 이별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ㅜㅜ 첫 연애가 지금까지 이어지고있거든요. (ing) 옆에서 자고있는 이 사람과 갑작스레 헤어진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알지도 못 하지만 감히 상상만 해봅니다.

    그런데 일상속에서의 단절은 꽤나 많이(?) 자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바로 어제도 길게는 10개월까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우고 카카오톡 친구목록에서 삭제 했거든요. 일하면서 거의 하루를 함께 보내고 서로의 남모를 고민과 일상을 털어놓고 어제 뭘 먹었는지 항상 공유했던 사람들. 시간으로 봤을때는 오히려 남편보다 많이 보던 사람들. 그 시간이 무색하게 일을 관두고 나니 딱히 만날 일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고 무관심해졌어요. 필요없는 연락처라 생각하고 지웠는데요, 뭘까요 이건. 마음속에 응어리지는 헤어짐과 그렇지 않은 헤어짐이 따로 있는걸까요.. ?

  • 2020-04-23 14:38

    연애가 무엇인지, 개연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원래는 쉽게 개연성이 있다, 없다, 연애를 한다, 안 한다 쉽게 사용하던 단어들인데 이 글을 읽고 나니 헷갈리네요.
    앞부분의 한지와 영주의 이야기는 쉽게 읽었지만 순애와 해옥의 이야기는 이해가 쉽지 않았어요.
    아마도 책을 안 읽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책을 읽고 다시 읽어볼게요.

  • 2020-04-24 11:07

    글을 읽으면서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물론 관계 안에서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애써서 만들 수도 있고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관계는 언제나 개연성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개연성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리 같은 느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하면서 상대와의 사이를 가까이 하는 거죠. 그리고 그건 연애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소설을 안보고 글만 봐서 잘 모르겠지만 영주의 만남과 이별에 개연성이 과연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헤어짐에서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영주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지도 모르는 이유를 여기에서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글을 끝까지 보니 제가 지금까지 관계에서 애써 개연성을 만들어 그 일을, 상대를, 상황을 이해해 합리화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저도 과거에 묶여 외면하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며 저의 관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 2020-04-24 13:33

    만일 '개연성'이라는 것이 혼자서는 발생시킬 수 없는 언어라면, 다시,
    고은이 생각하는 혼자와 함께의 차이는 무엇인지 인연이나 짐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어져요.

    또 '~하는 것(용서를 받거나, 짐을 덜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물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단답으로 대답될 수 있는 그런 의문문들 보다는 고은이 소제목으로 붙인 "당시로써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고은 자신에게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어느 때였는지 또 그래서 나중에라도 어떤 소회가 생기게 되었는지 듣고 싶어지는 듯 해요.

    그러니까 저는 고은의 연애에 말해보지 않겠냐고 옆구릴 찌르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ㅎㅎ
    내가 <쇼코의 미소>를 읽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고은이 잘 요약해준 책 속 등장인물들이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질문을 남겼다면 고은이 그 바톤을 이어받아
    고은은 고은이라는 개연성 없는 세계에서 어떤 짐이나 점(...)을 남겼는지 더 얘기해보면 어때요?!

    연애가 아니더라도 관계라는 삶의 이슈는 곧 익숙하고 능숙해질 법도 한데
    그렇다고 착각하는 순간 언제나 허를 찔러주는 것 같아요ㅋㅋㅠ

  • 2020-04-24 21:36

    연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사람들에게 느끼는 제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개연성 없는 연애'라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 공감도 많이 돼요.
    누군가를 예기치 않게 좋아하게 되거나 싫어하게 될 때가 있어요.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고요.
    명확한 계기로 누군가에게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감정을 '개연성 없이' 느끼는 것도 적지 않았어요.

    '개연성이 없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돼요.
    어떤 감정을 촉발하는 결정적, 배경적 이유가 정말 없는 건가, 혹은 그 이유를 단지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고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걸까.
    연애에, 우리의 감정에 개연성이 없다는 말은 이 두가지 중 어느 쪽일까 하고요.
    이 점에 대한 고은 누나의 생각도 궁금해요. '개연성 없음'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 지에 대한 글도 같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2020-04-27 10:33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저는 인간 관계 자체에 대한 글로 읽어보았어요. 쇼코의 미소를 읽고 싶어지네요!
    개연성이 없는 관계라는 말이 인상깊어요. 그러고 보니, 당시엔 개연성 없던 일들을 나중에 곱씹어보며 흐름을 만들어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어쩌면 저는 모르는 상황의 흐름을 상대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네요. 같이 이야기해봤다면, 그 상황이 개연성 있었을까요?
    관계에 능숙하다는 건 나름의 흐름을 만드는 데 익숙한 걸까요, 개연성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걸까요? 혹은 상대와 내 상황을 통해 개연성있는 사건을 만드는 것일까요? 이런 저런 질문이 마구 생겨납니다. 그래서 고은샘의 생각이 궁금해요! 고은샘께 관계의 개연성이 무엇이고, 떨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 2020-04-28 23:01

    글 잘읽었어요. 🙂

    한 가지 아리송했던 것은, 글에서 '연애'랑 '이별'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다뤄지는 점이었어요. 책을 안읽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같은데, <한지와 영주>, <순애와 해옥> 모두 이별 이후의 서사에 초점이 맞춰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게요. '연애'와 '이별'. 내용이 분명히 다른 두 단어일텐데. 그럼에도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단어처럼, 둘의 경계가 딱히 있는 게 아니라 '원래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달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하는게 큰 무리는 없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 차이에 집중해서 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조금 거칠게 정리하자면 ‘연애’는 상대 속을 훤히 알든, 한치도 모르겠든, 아무튼간에 내 앞에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사람 앞에서 함께 사유하는 과정이고
    반면 이별은 ‘어쩔수없이’ 상대의 부재속에서 혼자서 사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고은의 글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애매한 상태로 쓰여지는 것 같아요. 제 구분대로면 이 글은 연애감상보다는 이별감상에 더 가깝게 느껴져요.

    <한지와 영주>에서 처럼, 사건의 이유를 계속 검토하고 이야기를 천천히 지어보는 노력은 아무래도 이별 후에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거 같아요. 물어볼 상대가 부재한 상황속에서 혼자서 사유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상이 부재하기에 그 사유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깨달음. 그 마음아픈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주고, 상대를 용서하며 스스로의 용서도 구해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이처럼 저는 이별과 연애의 명확한 구분을 생각하지만,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고은의 말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다시 고민에 잠기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두 사람이 과연 과거의 사람들일지 지금의 사람들일지는 계속 고민해봐야할 것 같아요.(^^;) 떨어져서 상대방을 사유하게되면 그 에너지랄까, 역동성이 갈수록 떨어지잖아요. “분명 그들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함께 살아왔던 것이기도 하다.” 라는 말이 낭만적으로 들렸지만 그래서 저는 알쏭달쏭했어요.

    글에서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새로운 만남은 오래된 만남을 대체할 수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된 만남을 기억하고있기 때문에,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체불가능성 때문에 새로운 만남을 더 잘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글의 주장처럼 연애와 이별사이에서의 개연성은 찾기 힘들지라도, 이별과 새로운 연애, 그 틈새에 어쩌면 개연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이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연에게 더 잘해줄거란 다짐을 하게되니까요. 이전 연인을 반추하며 새로운 사람의 새로운 모습에 끌리기도하잖아요(나만그런가?). 개연성을 설명하긴 어려워도 이별과 연애의 갖은 수난을 다 겪어낸 내 몸안에 이미 개연의 감각이 담겨있진 않을까요 ㅎㅁㅎ.

    주저리부저리 써봤는데, 만나서 얘기하면 더 좋을거같아여 ^__^
    주저리부저리 하게되는건 역시나 연애가 도처에 깔려있어서인거같아요~넘흐넘흐 많은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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