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이성 비판> 'B판 머리말' 전반부 강독

호수
2020-10-05 10:28
595

지난 시간에는 B판 머리말을 절반 읽었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두 시간 넘게 집중력을 유지하며 읽으시는 선생님들의 공력과 체력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도 다음번엔 과감하게, 잠깐 쉬었다 해요! 라고 외치려고 합니다....)

 

칸트에게 인식을 취급하는 일은 이성의 업무이고 이는 곧 학문입니다. 이 학문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을 하는 이성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따져서 스스로 월권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월권행위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인식에서 오로지 선험적인 것(순수 이성)과 경험적인 것(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A판 머리말에서는 교조주의자와 경험론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주로 이야기되었는데 B판 머리말 전반부에서는 앞서 두 가지가 논리학, 수학, 물리학,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구분되는지, 이 학문들이 과연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1. 논리학

논리학은 가장 안전한 길을 걸어온 학문인데, 그 이유는 학문의 경계가 정확히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학은 “오로지 사고의 형식적 규칙들”만을 다룹니다. 여기서 지성(오성)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형식 이외엔 어떤 것도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는 그래서, 논리학은 “학문의 현관”이자 “예비학”입니다. 지식을 얻으려면 형식만이 아닌 인식의 대상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논리학이 ‘제한성’을 갖는다고 표현하고, 백종현 역에서는 이 부분이 “제한성으로 인해 모든 인식 대상과 그것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는 권리, 아니 의무를 가진다”고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도외시하다’라는 표현을 문탁샘께서 다른 번역본의 사례를 들어 ‘추상화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펭귄판 영역본이 abstract인 걸로 보아 아마 독어 abstrakt(추상화하다, 개념화하다)에서 왔을 것 같아요. 백종현은 아마도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과 관련해서 다소 의역을 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그 문장에서 논리학은 “객관적 학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런 학문들”과 구분되는데 이 객관적인 학문이란 대상을 다루는 학문(object: 대상이자 객관)을 뜻하기도 합니다. 앞서 저 문장에서는 논리학이 인식 대상을 ‘도외시’ 즉 ‘추상화’ 내지 ‘추출’로 제거하는 학문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2. 징검다리: 이성의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인식

이성의 인식이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두 가지, 이론적 인식실천적 인식입니다. 전자는 개념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전부고, 후자는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여기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85쪽에 가서 다시 “이성의 실천적 인식”, “이성의 실천적 자료”가 언급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룰 윤리를 말하는 것이리라고 함께 추측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이 ‘실천 이성’에 있을 듯한데.. 과연 그것까지 같이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2. 수학과 물리학

우리는 흔히 진리(대상)가 놓여 있고 우리는 그것을 조금씩 발굴해낸다고 생각하지만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말하며 주체는 자기가 갖고 있는 개념들에 따라 “그 사물[대상] 안에 스스로 집어 넣”어 판단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집어 넣는다”는 행위가 무엇이냐,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날 얘기가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간단하게는 '가설'을 수립하는 것이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는 것이 '증명'이 되고요. 자연과학 역시 같은 방식입니다. 이성은 자연을 따라가지 않고 “앞서 나가”요. 그러면서 “자연으로 하여금 그의 물음에 답하도록 시킵”니다.

 

3. 형이상학

칸트가 보기에 학문이 안전한 길을 걷느냐의 판단 기준은 혼란이 없다, 재차 돌아볼 필요가 없다 인데 그런 면에서 형이상학은 “싸움터”입니다.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모범 삼아 형이상학에서도 사고방식의 변혁을 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념들이 대상들을 따른다고 가정하면 결국 전과 똑같은 곤경에 빠지므로 경험이 개념을 따른다고 가정해야 안전한 길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곧 사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것들 안에 ‘집어 넣은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는 사고방식의 변화된 방법”이 필요합니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는 대상 안에 “집어 넣어” 질문을 하면 자연이 대답을 해주는데, 형이상학의 첫 부문(‘초월적 분석론’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에서는 학문의 안전한 길이 약속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문(‘아마도 ’초월적 변증론‘)에서 어려움이 발생하는데, 형이상학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경험과 모든 현상의 한계를 넘어가도록 몰고 가는 것” 즉 무조건적인 것[무조건자, 무제약자]가 있어서입니다.

칸트는 여기서도 자신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합니다. 그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데요, 1. 만약 종래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즉 “경험인식이 사물들 자체로서의 대상들에 따른다고 가정하면” 무조건자는 “모순 없이 생각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이율배반‘). 2. 대신 칸트의 새로운 방법을 여기서 시도한다면 즉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로의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이 사물들 자체로서의 대상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들로서의 이 대상들이 우리의 표상방식에 따른다고 가정”하면 “모순이 제거”됩니다. 정확히 말해, 같은 말일 수도 있으나,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사라짐‘입니다. 3. 결국 무제약자는 우리는 그것을 절대 모르고, 그것은 그저 물자체의 그곳에 자리할 뿐입니다. 모순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사변적 이성에게 초감성적인 것의 영역으로의 전진이 거절”되었습니다. ’순수 이성 비판‘은 여기까지만 다루지만 칸트는 여기서도 이것이 “이성의 실천적 인식에서 발견되지 않을까”라는 말로 여지를 둡니다.

 

4. 비판

이제까지의 방식을 바꾸려는 이 혁명, 이 시도에서 순수 이성의 ’비판‘이란 무엇일까요. 저로서는 분명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비판' 자체는 잘 모르더라도(문탁샘께서 푸코가 칸트의 '비판'을 중요한 학문적 자세로 가져왔다는 언급을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비판을 하는 이성이 무엇이고, 이 이성이 형이상학을 탐구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마지막 단락을 재차 읽어보면 칸트가 생각하는 순수 이성과 형이상학의 상이 조금씩 다가옵니다. 칸트가 보는 순수 사변 이성은 “유기체”와 같습니다. “한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을 위해서 또한 모든 부분은 각각의 한 부분을 위해서 있는 그런 완전히 별개의,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통일체”입니다. 이 순수 이성의 비판으로 형이상학이 안전한 학문의 길로만 들어서면 형이상학 역시 완전함을 갖춥니다.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마땅히 그에게 속해야 할 인식의 전 영역을 완전히 포괄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여 결코 더 늘어야 할 것이 없는 자산으로서 후세가 사용하도록 남길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수영샘의 강의에서 이율배반에 대한 마지막 강의는 참으로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그것으로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부분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칸트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의 핵심은 제가 생각하는 핵심과 달랐네요.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을 무너뜨리지만, 대신 이성의 체계 그 자체를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가져갑니다. 이렇게 칸트는 완전함의 영역을 유지합니다.

댓글 2
  • 2020-10-05 13:47

    앗...칸트 후기닷!
    앗...다시 칸트를 읽어야 할 시간이구나...ㅋㅋ
    하지만 아마도 다 까먹었을테니 재판 서문을 첨부터 다시 읽어야겠지?
    호수님 후기와 함께 찬찬히 다시 봐야쥐~~~~~~~~~~~~~~~~~~~~~~~~
    (글고 나서 첨부할 거 있으면 다시 댓글 달게요. ㅎㅎㅎㅎㅎㅎㅎ)

  • 2020-10-08 15:56

    저는 도저히 읽은데 다시 들여다보지는 못하겠습니다. 겸허하게 다 까먹은 상태를 인정하고 호수샘 후기만 읽고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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