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 했을까 4~5장 요약

뭉클
2020-03-26 12:10
52

게시판 만권의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4장,5장

프로파일 뭉클하다 43분 전 이웃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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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와 낭비를 구별해보자. 낭비란 필요를 넘어선 여유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쓰고 남은 것이 낭비의 전제이며, 풍요로움과 사치의 조건이다. 낭비는 한계에 반드시 도달하기에 만족을 준다. 반면 소비는 만족을 결코 줄수없다. 현대의 소비는 물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물자에 부여된 관념만 소비하기 때문이다. 새차를 바꾸거나 새 핸드폰을 바꾸는 일은 '새 모델로 바꾸었다'는기호와 관념의 소비이다. 또한 광고에서 강요하는 '개성'은 소비자들에게 '개성적이여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하지만 이 '개성'은 결코 도달점 없는 실패가 되기 마련이다.'개성' 무엇인지는 불문에 부쳐진채 '개성화'를 부채질한다.소비사회의 인간은 의미를 찾아달리고 새로운 의미를 공급받아 끊임없이 소비하기에 완성되지도,만족도 없다. 물자도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다. 생산자가 팔기 원하는 상품의 유통이지 소비자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관념의 소비가 아주 길게 반복되고 이 과격한 소비는 과잉될수록 만족의 결여가 강해진다.만족하고 싶어도 그런 회로는 없다.소비에는 한계가 없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소비논리가 되버렸다. 특히 노동과 여가의 소비를 보자.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새로운 계급'은 '삶의 보람'이라는 관념을 소비하는 계급일 뿐이다. 소비논리가 노동에 적용된 경우다. 여가도 소비의 대상이다.' 여가를 자유롭게 써''생산적인 노동에 구속되지 않아' 라는 의미와 관념의 소비 증거를 보여줘야 하고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어'라고 주위에 과시해야 한다. 여가에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채워지지 않는 지루함의 전략적 생산안으로 사회 구성원들은 던져진다. 지루함을 무마하기위한 소비가 동시에 지루함을 만들어 낸다.이러한 순환의 반복에 한가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소비와 지루함은 상호 의존한다.

영화 (파이트 클럽)이 그려낸 사회를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의 관점으로 살펴보자.파괴로 치달았던 타일러는 소비사회에 의해 촉발되고 소비된 거울 이미지에 불과한 인물이다.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논리를 따라 소비사회를 거부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현대의소외'라 부를 만한 상황이다. 소외란 무엇인가? 소외란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것을 가리킨다.예전엔 '노동의 소외'가 주로 언급 되었다. 노동자는 자본가로 부터 노동 조건과 환경을 강요당하여 인간 본래 모습을 잃는다.하지만 소비사회의 소외란 끊없는 소비 게임을 지속하는 소비자 자신이 소외의 주체이다.즉 누군가에게 착취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좀먹는 소외의 모습이다.

하지만 '소외'라는 말에는 이전의 '원래' 혹은 ' 돌아가야할 모습'을 연상시켜'본래'의 모습이 결정될 위험성이 있다. '본래성'이 결정되면 그 의미에 의해 인간이 강제되고 본래성의 개념은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즉 '건강하게 노동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라는 본래성이 유포되면 '건강'을 누릴수 없는 인간은 인간상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다.이러한 강제와 배제가 소외의 논의를 꺼리게된 이유이다.본래성의 문제에서 소외가 공범이된 꼴이다.그렇다고 소외와 본래의 공범관계를 도출한 결론에 만족한 채 , '무언가 잘못 되었어''이런 상태로는 안되겠어'라고 느끼는 현실적 비참함에 사상이나 철학이 눈감아서는 안된다.원인 규명을 위해 소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철학사에서 소외를 검토해보자.루소는 평화롭고 마음 편히 살아가는 '자연상태' 개념을 제시한다.문명사회가 인간 소외와 불행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전쟁상태이다. 그닥 다를바 없이 '평등'한 인간은 힘도, 희망도 그닥 다르지 않다. 이는 '내가 갖은걸 다른 이도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부르고 방어책으로 무리를 지어 힘을 키우거나 위협하는 집단을 먼저 공격함으로 사람들 사이에 투쟁과 무질서가 생긴다.평화를 바라나(제1 자연법칙) 모두가 위험하다. 이 모순은 자연권을 폐기하고 법의지배를 받는 사회계약을(제2자연법칙) 통해 '국가'라는 필연이 도출된다. 루소의 자연상태는 사회상태의 상대적 정의이다. 자연상태는 자기애와 이기심의 구별을 위한 개념이기도하다.자기애는 자기보존과 보호의 충동이다. 이기심은 타인과의 바교우위를 지키려는 감정이다. 그래서 이기심은 사회상태에서만 존재한다. 자연상태에선 약탈도 '자연스런 일'이다. 어쩔수 없는' 일일 뿐이다.하지만 구성원 전원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전제하의 사회상태에서는 '힘으로 내것을 뺏는건 부당하다. 그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평등 신념은 원한를 낳고 이런 부정적 감정의 총칭이 이기심이다.이기심은 지배와 억압의 기원이다.거꾸로 말하면 이기심이 없으면 인간은 지배와 억압이라는 나쁜일을 할 필요도 없고 소유물도, 인간을 옭아매는 질서도 없기에 '악의 조건'이 성립 안된다.루소의 자연상태의 인간 '본래'는 인간 본래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문명인의 소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본래성 없는 소외이다.'소외'를 말하지만 본래를 끌여들이지 않는다.

근대의 소외가 루소에서 기원 한다면 헤겔과 마르크스는 이를 전면에 세웠다.헤겔은 인간은 인간 고유의 것을 버려야 높은 이상을 실현한다고 봤다. 자기 고유의 것,자기다움을 포기하는 것을 소외라고 본다. 이상사회는 그 소외를 넘어서야 실현할수 있다.그러나 마르크스에게 헤겔의 소외는 다음단계의 실현은 커녕 그냥 그대로 자기 포기일 뿐이다. 노동자가들의 소외가 그렇다. 지금도 통용되는 논의이다.파펜하임이 마르크스를 비판하며 헤겔의 노동개념으로 돌아가 '본래성'를 욕망한 것을 보자.'본래의 진정한 노동'이란 몽상적 노동 개념을 지적한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소외론자들은 '본래성을 회복하고 싶다'라는 욕망때문에 냉철한 논의를 못하는 형국이다. 마르크스는 노동 자체의 폐지를 논한 적이 없다. '노동으로 부터 해방된 인간'도 부르짖지 않았다. '자유의 왕국은 궁핍과 외적 유용성 때문에 강제로 수행되는 노동이 멈출때 비로소 시작된다.'에서 '궁핍'은 어쩔수 없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상황을 의미하고,'외적 유용성'은 산업사회에 유용한 것만이 건실한 노동이 되버리는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노동 시간의 단축이 그 근본 조건이다. 아렌트의 마르크스 비판은 이러한 점을 간과한 곡해다.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노동이 없으면 인간은 한가해지고 아침에 사냥, 낮에 낚시, 저녁식사후 평론을 하지만 결코 사냥꾼, 어부,평론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 공산사회라는 전제가 있지만 이것이 여가를 살아가는 기술이 된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은 한가함에서 고안된 것이다.루소나 마르크스처럼 돌아가야할 본래도 없고 '소외'로 부터도 눈 감지 않고 벗어나려는 것이 이책의 방향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질문으로 사고를 진전시켜보자.

-우리는 지금 자신의 역할을 찾고 있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스스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떠한 상황인가? 어쩌다가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일부러 역할을 주지 않으면 안 된 만큼 부초처럼 가벼운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까? 만약 우리가 스스로에게 중요한 존재라면 굳이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왜 이런 상황이 벌어 졌을까? 어째서 우리들은 자신의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이는 마치 모든 것이 우리에 대해 무관심해져서 크게 하품을 하는 상황과 다름없지는 않은가?

-어찌 되었건 우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찾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뤄야만 하는 일이다"라고 말할 법한 무언가를 찾는 중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금 흥미로운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끔 하려 한다.

-하지만 어딘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혹시 우린 지금 자기 자신에게 지루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키레 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지루해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왜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하이데거는 모두들 어렴풋이 아는 지루함을 고찰하기 위해 이것을 두가지로 나눈다.

제 1형식의 지루함은 어떤 것에의해 지루해짐을 말한다. 지루함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수동형 지루함이다.

기차를 놓치고 다음 기차를 기다려야하는 네시간동안의 지루함이 이 유형이다. 이 지루함과의 싸움은 더디게 지나가는 시간을 빨리 지나가게 하려 하는 기분전환의 행동들을 하게한다. 썩 성공적이지 않다. 시간은 우릴 붙잡고 있다. 느리게 흐르며 꾸물 거린다.뭐라도 해야 이 지루함이 떨쳐진다. 내용은 상관없다.그런데 일이란 원래 안하고 싶은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해야할 일이 없으면 공허해 진다. 기차역엔 거리도 가로수도 운행표와 비를 피할 장소도 있지만 정작 내가 타야할 기차가 없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제공받지못한다. 내 말을 안들어 준다.공허에 방치되고 시간에 붙잡히게되는 상황이다.

제 2형식의 지루함은 어떤 상황에 처하여 그 곁에서 지루해 함을 말한다. 뭔지 모르게 지루하고 지루함이 주위를 덮는다.

파티에 초대되었다.격식차린 음식도 맛있고 친구들과의 재밌고 유쾌한 대화도 즐겁다.대화, 장소 ,사람들 모두 지루한 것이라곤 없었다. 파티가 끝난 후 집에와서 읆조린다. '나, 실은 오늘 지루했어'.스스로가 명상에 빠져 내가 내 지루함의 원인이 된 것도 아니였다. '시간을 낭비해버렸다'는 후회 때문도 아니다.기분 좋았는데도 지루했다.이 기분은 뭐지? 공허하지도 방치되지도 않았는데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공허가 스스로 생겨났다.자신을 분위기에 내맡겨버리고 말자 스스로 공허해져 버렸다.1형식과는 다르게 '공허에 방치'되었다.기차역의 시간은 나를 붙잡아두었으나 파티에서의 시간은 우릴 방임하고 있다.시간의 흐름에 신경쓸 필요도 없고 흐르게 내버려 뒀으나 여전히 시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부모처럼 '너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묶여있는 존재'라고 뒤로 조심스레 물러나 있지만 속박한다.

한가롭진 않지만 지루한 파티에서의 지루함의 본질을 파악해 보면 우리 생활에 근접해 있는 지루함이다.기분전환과 얽혀있는 지루함,지루함과 얽혀있는 기분 전환, 우리를 오히려 지루하게 만드는 기분 전환...삶의 본질을 꿰뚫는 모습이다. 기차역에서 초조한 이유는 약속을 맞출수 없다거나, 일의 마감이 다가와서 그렇다거나, 일상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기에 그렇다.일에 열중하고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성실한 인간처럼 보이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엄청난 '속물성'의 증표다.이에비해 파티에 가는 사람은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여유도 있다.안정과 정상적 생활이다.'어떤것에 의해 지루해진다'와 '어떤 것에 직면해서 지루해 한다'의 두가지 형식중 제 2형식의 발견은 인간 삶의 본질을 추측하게 해 준다.

하이데거의 논의를 심화시켜보자.가장 심도 깊은 지루함이 있을까?더 이상 기분 전환이 안되는 지루함.지루함에 대항하는 기분 전환과 지루함을 회피하는 기분전환이 1,2 형식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루함이 깊어갈수록 기분 전환은 힘이 없어진다. 당혹스럽지만 '아무튼 그냥 지루해'가 있다.

제 3형식의 지루함 이다. 우린 이 형식에서 기분 전환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존재의 맡바닥에서 들려온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방법이 없다. 전면적 공허다.외부로부터 어떤 가능성이 주어져도 모두 거부되는 온전한 광역이다. 이럴때 인간은 자신에게 눈을 돌린다. 돌릴수 밖에 없다.자신에게 눈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거부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가진 가능성으로 눈을 돌린다. 가장 높은 지루함의 정점이 부른 붙잡힘은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붙잡힘이다. 이때의 붙잡힘은 부정적이지 않다. 절대적 '공허의 방치됨'을 깨부수며 상황을 새롭게 열어젖힐 가능성이 된다.

"아무튼 지루해"의 목소리로부터 탈출하려고 일의 노예가 되든 지루함과 뒤섞인 기분 전환을 탐닉하던 목소리는 들린다.유목이 정착으로 바뀌면서 탐색 능력은 사용하지 않지만 남아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여분의 능력이 "아무튼 지루해"라고 소리를 낸다. 지루함은 인간 능력의 발달이 고도화 했음을 의미하는 증거이자 능력 그 자체이다.여분의 능력이 내는 소리이다.

제3형식의 인간이 본 자기 가능성은 무엇인가? 바로 자유다. "우리들은 지루하다. 자유롭기 때문에 지루하다".그러나 아직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어떻게 실현할건가? "결단을 통해서이다.결단의 의해 자유를 발휘하라.하이데거의 결론이다.

결단을 통해 가능성를 실현하라? 괜찮은 결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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