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부정과 망각의 차이

노을
2020-01-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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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감정을 잘 드러내고 표현한다고 하면, 즉각적으로 분노하거나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현대에는 어리석음이다. 이성이 우위를 점하는 사회 속에서 감정은 자제해야 마땅하다. 현대 사회에서 폭발적인 감정이 자기의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할 수 있는 곳은 그 감정이 형식을 갖춘 '예술'에서 뿐이다. 중세인들은 감정적이었지만 그 감정을 예술의 형식으로 만들었고, 일상에서 팽팽한 감정의 극들을 숨기지도 터뜨려버리지도 않은 채, 그 긴장감들을 고스란히 지닌 채 살아갈 줄 알았다고, [중세의 가을]을 쓴 하위징아는 말한다. 중세인들은 열정적이며 치열하고,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해 갈망했다는 1,2장의 내용들을 읽어나가며 생겼던 주요 질문 세 개.

 

1) 그들은 지금보다는 감정적으로 잘 동요되는 '광기'의 사람들이었을까?   

    : 감정을 드러내고 감정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시대였음을 분명할텐데, 그것을 지금의 시각으로 '광기'라고 표현하는 게 좀 어색하지는 않을까? 오히려 감정의 동요를 인정하고 그것을 삶의 어떤 형식으로 창조함으로써 감정이 휘두르는 거대한 힘을 견디는 힘이 더 강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2) 그들의-주로 귀족들의 '형식주의'는 혹시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통치성'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 (푸코에 따르면) '통치성'이란 민족국가같은 거대한/권력을 지닌/자가발전하는 관료제와 함께 태어났던 것 아닌가? 귀족들이 주로 형식주의를 창안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형식 안에서 그들은 명예를 걸고 결투하고 한 순간의 어리석음으로 몰락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살기를 자청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통치성을 강구하기에는 오히려 너무 순진한 사람들이 아닐까?

   

3) 이념이나 정치사가 아닌 일반적이며 발생적인 새로운 역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하위징아 역시 민중이 아닌, 일상의 예술이 가능했던 지배층만의 역사를 쓰고 싶었던 건가?

  : 아름다움으로 인생 자체를 고상하게 하는 일은 주로 노동에서 해방된 '엘리트' 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배층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위징아의 글 속에는 엘리트만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문둥이들도 그들의 딸랑이를 딸랑딸랑 흔들어대고 행렬을 이루어 지나감으로써 그들의 질병을 공개적으로 전시했다."(38)  "왕실의 모든 행사에 필수적 참여자인 일반 대중은 대규모 축제 행사일수록, 빈번하게 질서 유지의 방해꾼 노릇을 했다."(113) 이와 같은 문장들에서 하위징아의 초점은 지배층이라기 보다는, 진정 삶의 형식/유형이 아닐까? 형식적 삶이 있고 그 형식을 파괴하는 다른 형식들이 대결하는 삶. 그것이 중세인의 삶이다.

 

하위징아에 따르면, 사람들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세상을 외면하는 부정의 길이다. 이런 길을 가면 저승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고 믿고 이 세상의 형식에는 무관심하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을 개선하여 완벽하게 만드는 길이다. 이런 길을 가면 현재의 노동의 삶과 이상적 삶이라는 약간의 간극만 있으면 충분하기에 이 길에서 삶의 세련된 기술은 별로 필요가 없다. 아마 지금 현대인의 삶이 두번째 길에 가깝지 않을까. 

 

중세인들의 삶은 신이 창조한 완벽한 세계였기에 두번째 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이 만든 완벽한 세상을 그르치는 것은 현실의 인간들이었지만, 삶에 무관심하지 않고 아름다운 형식을 만들어 낼 줄 아았던 그들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그들을 "꿈을 땅을 통과하여" "삶을 화려한 색깔로 채색하고 빛나는 환상을 살면서" 현실의 가혹함을 망각하며 "나아가는" 세번째 길을 갔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세 번째의 길 역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처럼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환상을 산다는 것이 결국 환타지 영화같은 삶 만들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현재를 부정한다면, 그 현실을 힘들여 아름답게 채색하진 않을 것이다. 많은 시인들은 삶의 행복보다는 '비애'를 노래한다. 그들은 삶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비관적일지라도 그냥 울고있거나, 칵 죽어버리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지 않고, 굳이 그 절망을 아름답게 노래하여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여, 살게 한다. 시는 휘몰아치는 감정을 노래하지만, 감정적인 삶 그 자체는 아니다. 중세인이 걸어갔다는, 부정이 아닌 망각의 세 번째 길이란 이런 원리가 아닐까 싶다.

댓글 2
  • 2020-01-13 16:14

    이 책을 읽는 명분을 자꾸 찾고 싶었는지 다음 구절이 위로가 되네요 ㅎㅎ

    “(정치,경제)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꿈꾸는 사람은 아니다.(중략) 하지만 문화의 역사는 아름다운 꿈과 삶의 환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중략) 기사도의 이상은 아무리 인위적이고 진부하게 보일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중세 후기의 정치적 역사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 p189

  • 2020-01-16 08:47

    '중세인들은 인생의 즐거운 것들을 예외없이 죄악으로 여겼으나, 이제 그것들은 허용 가능한것으로 인식되었다. 단지 그 즐거운 것들에 함유된 영성의 많고 적음에 따라 윤리적평가가 달라질 뿐이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취하고싶고 세상에 굴복하기도 싫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달리 선택이 없었다.'
    고상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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