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5단어와 해석

띠우
2021-11-14 14:18
277

 

p45 단어와 해석

ひばく [被爆]

せんとう [先頭]

おおいかくす [覆い隠す·覆い匿す] 덮어 가리다, 덮어 숨기다

けんしょう [検証]

てってい [徹底]

やたら [矢鱈] 함부로

めがとどく [目が届く] 주의·감독 등이 두루 미치다.

どうさつ [洞察]

きわだつ [際立つ] 뛰어나다, 두드러지다, 눈에 띄다.

ただちに [直ちに] 곧, 즉각.바로

とりもなおさず [取りも直さず] 곧, 즉, 바꿔 말하면

せいぎょ [制御]

かいならす [飼(い)慣らす] 길들이다

ねんりょう [燃料]

 

 

 

그러나 <핵의 평화이용>이라는 슬로건은 상당히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지금도 예전도 미국은 이러한 것을 무척 잘합니다. 실제, 일본에서는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이야말로 선두에 서서 핵의 평화이용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종류의 일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이용’이라는 말에 의해서 핵에너지 기술 그 자체의 문제가 가려져버린 것입니다.

군사이용이든 ‘평화이용’이든 애초에 원자력 기술이란 무엇일까요?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면 핵에너지의 ‘평화이용’이 바로 실용화되려고 했던 1950년대, 철학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좀더 자세하게 검정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역사에 ‘만약’은 있을 수 없지만, 그시기에 그러한 논의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면, 무엇인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조금 생각합니다. 어쨌든 ‘1960년대의 사상’이라는 것은 마구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1950년대의 사상’이라는 것은 대부분 들은 일이 없습니다. 이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물론 핵병기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의 문제까지 눈이 미치지 못했다는 면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반핵(병기)운동은 계속 있어왔으니까요. 앞서의 앤더스라든가, 혹은 버트란드 러셀이든가 철학자들도 핵병기에 대해서는 무성하게 발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평화이용’이든 무엇이든,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던 하이데거의 통찰이 눈에 띕니다. 애초에 그는 현대를 ‘원자력시대’라고 불렀습니다.

1963년에 『요미우리신문』(9월22일부)에 게재되었던 하이데거의 ‘원자력 시대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문장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자 에너지를 관리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될까요. 단언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 관리의 불가결한 것이 곧 <세우는 힘>[세계를 기술화하고 자연을 계량가능한 장소로 ‘세우는’ 힘]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 힘의 승인을 표명하는 것과 함께, 이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행위의 무능을 희미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지금 우리들이 직면하는 사태, 그리고 원자력발전의 본질을 바로 알아맞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연료는 계속 차갑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속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실 자체가 ‘이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행위의 무능력을 희미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치 원자력을 길들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 이번 후무시마 제1원자력발전의 사고도, 물로 핵연료를 차갑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언제 똑같은 사태가 일어날지 알수 없습니다. 또 멜트다운된 연료가 어떤 상태로 거기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애초에 그러한 상태가 되었던 연료를 꺼내는 기술도 없습니다. 기술개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이 ‘기술의 주인’일까요. 하이데거가 말한대로입니다.

특히 다른 철학자들이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시기에 그만이 핵에너지에 대해 깊이 사고했던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2
  • 2021-11-14 20:33

    哲学自然 p.49~52

    꼭지

     

    のみち [野道]

    くみかえる [組(み)替える·組(み)換える] 다시 짜다, 짜는 방식을 바꾸다

    まさに [方に] 지금 바로, 마침.

    さきほど [先程] 아까; 조금 전((‘さっき’보다 공손한 말씨))

    しゃくど [尺度]

    しそう [思想]

    きりすてる [切(り)捨てる] 1.잘라서 버리다. 2.수학 (어느 단위 이하의) 끝수를 잘라 버리다. (↔切(き)り上(あ)げる) 3.((斬り捨てる)) 사람을 칼로 벤 뒤 그대로 버려두다.

    みちびきだす [導き出す] 이끌어 내다; 도출하다.

    きりつめる [切(り)詰める]1.줄이다, 일부를 잘라 내어 작게[짧게]하다. 2.바싹 깎다, 조리차하다, 절약하다.

    いんぺい [隠蔽]

    クロイツァー Kreutzer

    しゅし [主旨] 주지, 중심이 되는 논점

    はたらき [働き] 1.움직여서 일·구실을 함;작동 2.활동;회전 3.작용;기능

    りょうしりきがく [量子力学]

    りゅうたい [流体]

    ねつりきがく [熱力学]

    きょうちょう [強調]

    ぶつぎをかもす [物議を醸す] 물의를 빚다[일으키다].

    ふかくていせいげんり [不確定性原理]

    かかんせい [可換性]

    ハイゼンベルク Heisenberg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1901-76). 양자 역학의 창시자이며, 노벨 물리학상 수상(1932

    ものすごく [物凄く] [속어] 대단히; 매우; 유별나게

    かんだんなく [間断なく] 간단 없이, 끊임없이.

    えがきだ-す [描き出す] 그려내다

    はどう [波動]

    かげをおとす [影を落とす] 1.빛을 비추다 2.그림자를 나타내다;그림자가 나타나다 3.그림자가 지다;불행·불안 등을 초래하다

    クローズアップする close-up하다

    おしすす-める [推し進める] 밀고 나가다; 추진하다; 강행하다

    げんかい [限界]

     

     

     

     

    나카자와― 하이데거의 원자력비판의 큰 포인트는, 현대과학을 밀어붙여 움직이게 하는 「계산성」이라는 것이겠죠. 『기술에 대한 물음』(주30) 이나, 『들의길』(주31)등을 읽으면, 하이데거와 현대의 과학기술은 「존재」를 에너지인 것처럼 「계산성」의 가운데에서 꺼내고야 만다고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가 과학기술에 의해서 「계산성」의 가운데에서 재조합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조금 전 말한 시장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사물이 교환가치라는 척도에 의해 수치화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가운데의 자연과학은 에너지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장과 똑같은 일을 해내고 있다고 하는 이해가 있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보면, 그의 전사상은 존재의 「증여성」을 잘라 버려가고 있는 인간사회의 네거티브한 효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독일어로 「~가 있다」(에스 기프트/Es gibt)라는 말로부터 존재의 「증여(gift)」성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만,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곧 「증여성」이었습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과학기술에 의한 「존재」가 「계산성」가운데에서 잘라 작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존재」로부터 그 「증여성」이 은폐되었다고 하는 의미도 됩니다.

    크로이처 기념강연(주32) 가운데에서 「자연과학의 방법이라면 이문제는 넘어갈 수 없다」 라고 주안점을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하이데거 가운데에서 「계산성」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실은 핵 에너지의 개발과정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 양자역학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원자핵 에너지의 개발에는 특별히 양자역학을 쓰지 않아도, 유체역학과 열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의 관계로 충분하다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그것을 준비한 것은 양자역학입니다. 지금은 거의 강조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만,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것이 물의를 일으켜다는 것은, 본래는 「비계산성」이 이론 가운데 짜여 들어가 있다고 하는 점에 있었습니다. 「불확정성원리」(주33)이나 「비가환성」(주34)등의 개념이 그것으로, 하이젠베르그가 양자역학을 만들 때의 결정적인 아이디어 였던 것은, 「교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비가환성」의 발견이었습니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세계의 가운데에서 「비계산성」이 근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시간으로 끄집어내면 엄청나게 짧은 것이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으로 물질의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그의 책을 충분히 읽고 있었고, 불확정성원리나 파동역학(주35)의 이론등은, 그의 존재론의 이미지에 빛을 비추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과 양자역학과의 관계성, 양자역학에 있는 「비계산성」이라는 걷워 들인 문제를 클로즈업한 적은 없었습니다. 만약 하이데거가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이로부터의 자연과학은 이쪽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면, 에네루고로지(에너지 존재론)을 크게 먼저 밀고 나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만, 그것을 하지 못했던 바, 하이데거의 하나의 한계였을지도 모릅니다.

     

     

     

     

     

     

     

     

    (주30) : 마르틴·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세키구치히로 역, 평범사, 2009년

    (주31) : 마르틴·하이데거 『들길 대화』 하이데거전집 제 77권, 아소오켄 외역, 창문사,2001년

    (주32) : 하이데거의 크로이처 기념강연은 『방하』 (하이데거선집 제 15권, 츠지무라코오이치 역. 이상사, 1972년)에 실려있다.

    (주33) :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란, 전자를 관찰할 때에 사용하는 감마선등의 전자파의 환경에 의해서, 전자의 위치가 미묘하게 어긋나 버리기 위해서, 정확한 관찰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 결국 「관찰한다」라는 행위가 끼치는 「관찰대상」 으로의 환경으로부터 생겨난 패러독스라는 것을 가리킨다.

    (주34) : 수학에 있어서 곱의 계산에서는 일반적으로 라는 가환성이 성립한다. 그러나, 특별한 대수적 구조에서는 이것이 성립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을 비가환성이라고 한다.

    (주35) : 물리학자 드·브로이가 제창한 「전자의 파동설」 ― 전자는 입자이며 동시에, 어떤 종의 물질파를 수반한다 ―을 기초로하여, 에르빈·슈뢰딩거가 만들어낸 파동방정식을 사용한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의 한 분야.

  • 2021-11-15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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