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강독 단어 및 해석

야생
2021-09-05 17:07
305

267~270쪽

 

ひとく [秘匿] 비닉, 몰래 감춤

てんじて [じて전하여; 방향을 바꾸어.

せいちゅう [·制肘]철주; 곁에서 간섭하여 마음대로 못하게 함; 제약.

せいおう [西]

しなん [指南]1.지남2.지도; 교도(敎導)함; 또, 그 사람3.(남쪽을) 가리킴.

ぜんぎ [

とうすい [

はじらい [恥じらい·羞じらい]수줍음; 부끄러움.

じょうこう [情好] 親密な仲。よしみ。

じおんな [地女]1.その土地の女。2.商売女に対して、素人の女。

いがた []주형; 거푸집.

いがたにはめる [鋳型にはめる] 틀에 박다; 규칙이나 교육 등으로 인간을 동일 유형으로 하다.

こくいん [刻印

ちつ []질; 여자 생식기의 일부.

もちか-える [()える]딴 손으로 바꿔 쥐다. 쥐는 법이나 갖고 있는 것을 바꾸다

あじきな- [ない]맛이 없다; 싱겁다; 재미없다; 따분[시시]하다.

まめまめし- [しい·実実しい] (귀찮아하지 않고) 충실하고 부지런하다

くちく [駆逐]구축.

 

 

프라이버시의 성립

 

푸코의 4가지의 '억압가설'의 배후에는 '성의 사적화'라고 하는 메커니즘이 깔려있다. 성을 공적세계로부터 축출하고 감춤으로, 사영역 즉 가족으로 둘러싸는 것. 가족이 현저하게 성적인 존재가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다만 서둘러 덧붙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사적화에 의해서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권력화 되어 인격과 결부된 것이다.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억압가설'이란 문자 그대로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말해'라고 하는 '고백'이라는 제도를 배후에 동반하고 있다. 금지와 명령은 한 쌍의 세트로 성을 특권화하고, '어떤 성행위를 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격의 지표가 되는 것에 이른다. 

 

성이 사적화된 이후,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성적인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족이 '성적 가족'이 되고, 부부가 성적 유대의 대명사가 되고, 혼인이 성행위의 사회적 면허가 되고, '초야'가 성관계의 개시를 알리고, 섹스리스가 부부관계의 '병리'가 된다...라고 하는, 지금 알려진 결혼과 부부에 관한 '상식'은 이와같이 성립했다. 

 

'프라이버시'의 어원은 라틴어의 '박탈되었다'에서 유래한다. 공적권리를 박탈당한 영역, 바꿔말하면 공권력의 개입을 거부하는 영역이 사영역인데, 그 영역은 그대로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블랙박스, 법이 들어갈 수 없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부장의 전권적 지배 아래 아내나 자녀들이 종속되는 '가족의 암흑'이 성립한 것이 근대가족사이다.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란 강자에게는 공권력에 의한 제약없이 자유로운 지배를, 약자에게는 제3자의 개입이나 보호가 없는 공포와 복종의 장소가 된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누구를 지키는가? 강자를, 이라고 하는 것이 성폭행이나 가정폭력의 피해자, 성적 소수자의 대답이다.

 

 

성적만족의 권리와 의무?

 

부부간의 계약관계가 결정하는 것은 성행위의 권리·의무관계까지이다. 어디에도 '성적만족'의 권리·의무관계에 대해서는 씌여있지 않다. 사실, 서구 중세의 부부관계를 가르치는 책에는 부부 사이에는 성의 의무가 있지만, 그것은 임신과 출산을 위한 수단이고, 그것에 따르는 쾌락은 할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되어있다. 그야말로 임신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성간 성기성교는 장려하는데, 임신과 연결되지 않는 항문성교는 신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오랄섹스나 전희는 억압되고 금지되었다. 

 

그런데 근대의 섹슈얼리티의 이데올로기는 '부부관계의 에로스화' 즉 '성적만족의 권리·의무'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게이가 인용한 텍스트에는 부부간의 섹스가 얼마나 감미롭고 도취적인가, 젊은 아내의 곤혹과 부끄러움과 함께 묘사되어있다. 남편의 안내로 쾌락을 배우는 아내는 '낮에는 숙녀처럼, 밤에는 창부처럼'이라고 하는 브루조아 성도덕의 모범이 된다. 

 

일본 근대의 통속성 과학서 <조화기론>에는 부부간 성애를 최상위의 성애로 간주하는 언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많은 부분 외국으로부터 소개된 책의 번안·소개물이기 때문에, 원래는 영어권의 청교도적 성도덕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 통속성 과학서의 하나인 <신편오고락세계고안서>에는 '쾌락의 극점'으로서 '실로 인생의 쾌락은 부부간의 친밀성에 있다'고 한다.

 

'연애상대'를 '유녀', 아내나 어머니인 여자를 '부녀'라고 불렀던 에도시대의 일본을 생각한다면, 성적쾌락의 최고의 파트너가 남편이고 아내라고 하는 발상은 신기한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없다. 

 

'부부관계의 에로스화'에서 아내는 '쾌락의 권리와 의무'를 남편에 대해서 가지는데, 그것을 남편에 대해서만 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아내에게 쾌락을 가르친 것이 남편이기 때문에. 그뿐인가. 처녀인 아내를 '훈련'하는 것으로, 틀에 박듯이 아내에게 쾌락의 모양을 각인한 것은 다름아닌 남편이기 때문에, 아내는 다른 남자로는 쾌락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아내에게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있어서, 자신이 '처음의' 그리고 '유일한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는 제7장 '춘화의 미소지니'에서 기술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성립하는 게 당연했다. 만약 부부간의 섹스가 최상의 쾌락이라면, 남편은 창부를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메이지 시대의 성지침서의 텍스트에는 창부와의 성교는 손을 질로 바꾸는 자위행위이며, 재미도 없고 질도 낮다고 반복해서 기술되어있다. 바꿔말해 만약 남편이 창부에게 달려간다면, 그것은 아내의 성적 서비스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 한편 아내에게 있어서도 남편과의 성애가 만족스럽다면, 욕구불만으로 인한 히스테리 없이, 부지런히 남편에게 충성스러웠을 것이다. 쾌락의 시장에서는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게 당연했다.

 

권력 대신 쾌락이, 궁극의 남성지배를 완성한다. 그러나 '권력에 대신해서 에로스'가 아니라 '권력이 에로스의 형태를 티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또는 반대로 '에로스가 권력의 형태를 띠고'라고 바꿔말해도 좋다. '권력의 에로스화'란 그처럼 근대의 섹슈얼리티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댓글 3
  • 2021-09-06 01:22

     

    P271~275 단어와 해석 띠우

    こうしゃく [侯爵]

    ちかい [誓(い)] 맹세

    つかえる [仕える·事える] 시중들다, 봉사하다, 섬기다.

    むちうつ [むち打つ·鞭打つ·鞭つ]채찍질하다. 질타 격려하다.

    けんとうちがい [見当違い] 대중[짐작]이 틀림, 예상이 어긋남, 방향을 잘못 잡음, 엉뚱함.

    ぼうえい [防衛]

    加虐[かぎゃく]↔ ひぎゃく [被虐]

    きちく [鬼畜] 귀축. 마귀와 짐승.

    ぞうふく [増幅]

    きりさきジャック [切り裂きジャック] [역사] 잭 더 리퍼.

    メッタ [滅多] 분별없음, 마구 함, 함부로 함

    そうにゅう [挿入]

    しんみつ [親密]

    はばひろ-い [幅広い]폭넓다.활동 범위가 넓다

    がいぜんせい [蓋然性]

    きしどう [騎士道]

    しきどう [色道] 색도, 색(色)[정사(情事)]에 관한 일

    いっつい [一対] 한 쌍, 한 벌.

    めかけ [妾]

    ほうこう [奉公] 주인에게 봉사함, 고용살이함.

    おつとめ [お勤め] 직업, 근무((‘勤め’의 공손한 말씨)).

     

     

     

    해석 P 271

    사도마조히즘의 탄생

     

    ‘권력이 에로스화’를 이해하기 위해 참고가 되는 것이, 마르키 드 사드이다. 사드 후작이 프랑스 혁명기라고 하는 중세로부터 근대의 과도기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이 죽은’ 후 질서의 진공을 ‘자연’이 메운 뒤에, ‘원죄’를 인간에게 가르친 것은 ‘신’이 아니라 ‘성의 자연’이 되었다. 원죄로써 성은 쾌락과 함께 벌을 받았다. 벌을 주는 채찍을 쥔 것은, ‘신’ 대신 아버지이자 남편인 남성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혼인의 맹세 중에서 ‘너의 신에게 시중들듯, 너의 남편에게 시중들어라’라고 하는 것은 ‘신의 대행자’로서의 ‘가부장’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오오, 신이시여, 나에게 좀 더 벌을’ 이라고 간절히 청하는 것은 ‘아, 나에게 좀 더 쾌락을’과 같은 뜻이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에게 채찍질당하는 아들은 그런데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고,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는 거기에서 남편의 사랑을 느끼고 황활하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폭력이다,라고 현대의 DV 전문가라면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좀 더 복잡하다. ‘권력의 에로스화’란 지배가 성애의 형태를 취한다라는 것이고, 뒤집힘, ‘에로스의 권력화’란 성애를 폭력과 지배의 형태로 표현하는 사람들(주로 남성이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은 나를 때릴 정도로 사랑하고 있네’라고 생각한다든지, ‘때려주지 않다니,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여성이 느끼는 것도, 반드시 아주 엉뚱한 것은 아니다. 성과 나란히 폭력이란, 자기방위라는 안전장치를 뗄 정도의, 제정신을 잃을때까지의 상대방의 신체에 대한 과잉개입이라는 점에서 공통이고, 폭력의 쾌감이 성의 쾌감을 일으키고, 또 그 반대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알려져 있다.

    사디즘의 이름이 거기서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드 후작이, 에로스에 가학, 피학을 반입한 때, 그는 가학자 쪽의 쾌락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은 아니다. 귀축계 포르노에 접했던 데(제5장 참조)서 논했던 것처럼, 가학자는 피학자의 고통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서 쾌락을 증폭시킨다. 따라서 사디즘이 사도매조히즘(가학,피학취향)이라고 이중화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사디즘은 마조히즘과 딱 잘라 두 개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조히스토와 상상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으로부터야말로, 쉽게 역할의 전환을 할 수 있다. 복수의 행위자를 끌어들이는 사회적 게임에서는, 역할의 룰이 정해진다. 부부도 부모자식도 그렇게 역할연기의 룰이 정해져있는 관계이기 때문이야말로, 역전의 역할놀이(롤플레이)가 가능하게 된다. 성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남성에게 있어서는 가학과 쾌락이, 여성에게는 피학과 쾌락이 묶여져 왔기 때문에, 쾌락으로 도달하기 위해서 각각 가학, 피학의 회로를 더듬는 것이 조건지어져 있다. 그것을 우리들은 ‘남성은 능동의 성/여성은 수동의 성’이라고 바꿔 말할 뿐이다.

     

    섹슈얼리티의 탈자연화

    콜린 윌슨은, 연속여성강간살인사건의 범인 ‘잭 더 리퍼’를 논하는 속에서, 10대 초반의 어린 커플의 비슷한 살인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소년이 좋아했던 소녀의 몸을 칼로 무분별하게 찔러서 죽였다. 그것을 해설해서 윌슨은 말한다. 혹시 이 소년이 섹스를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는 소녀에게 나이프를 찌르는 대신에 페니스를 삽입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나는 폭력과 성이 같은 충동에서 왔다든가, 혹은 대부분의 남성성연구자가 말하듯 성충동이 공격충동에서 왔다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남성 호르몬 중의 테스토스테론이라든가 할 생각은 없다. 그 반대다.

    푸코를 시초로 하는 온갖 섹슈얼리티의 연구자가 해왔던 것처럼, 여기서도 나의 과제는 섹슈얼리티를 역사화하는 것, 즉 탈자연화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가 폭력이나 가학부터 애착과 친밀함까지 폭넓게 스펙트럼을 얻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에 ‘본질’은 없다. 즉 ‘성은 애초에 공격적인 것이다’라든가 ‘성은 친밀함의 표현이다(그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은 규범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아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맥에서 성이 특정한 무언가와 특권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개연성뿐이다. 그리고 푸코가 시사하고, 우리들이 그것에 모방해서 사용하는 ‘권력의 에로스화’란 근대가 에로스를 비대칭적인 젠더 관계, 즉 다름 아닌 권력관계와 연결했다는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고 젠더가 권력관계의 용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반복하지만, 에로스가 젠더관계와 연결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젠더관계가 에로스적일 필요성은 전혀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에로스적인 관계란 동성 사이에서 성립한 것이었다. 그것에 비교하면, 부부관계는 어느 쪽이냐 하면 지배와 소유의 관계였다. 젠더관계 속에서도 부부관계가 특권화되는 듯 되었던 것은 중세 말기이후의 일이었고, 그런데도 부부의 성에 에로스는 들어오지 못했다. 중세 서구의 기사도 연애에서는 로맨틱 러브의 대상은 기혼 여성이었고, 근세 일본의 정사의 일에서도 에로스는 부부관계 이외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젠더 관계가 부부라는 한 쌍의 남녀로 상징되었던 것도, 일부일처혼이 정착했던 근대이후의 일이다. 중혼이 당연한 사회에서는, 혼인은 조금도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고, 한 쌍의 관계에서조차 아니었다. 첩이란 첩살이하는 고용인, 즉 전속계약의 성노동자였다. 일본 아내에게서도, 섹스는 오래도록 ‘봉사’이고 노라고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직업’이고, 쾌락은 있을 리 없었다. 혹시 그 아내들이, 부르주아적 혼인의 규범이 ‘성적 쾌락의 권리, 의무’라고 알았다면! 일본에서는 부르주아 사회는 성립한 일이 없었다,라고 하마터면 말을 꺼낼 뻔 했다.

  • 2021-09-06 03:15

    変更(へんこう)

    苦痛(くつう)

    崩壊(ほうかい)

    しへき [嗜癖] 기벽

    麻薬中毒(まやくちゅうどく)

    増(まし) 더 나음;더 좋음

    広義(こうぎ)

    標語(ひょうご)

    暫(しばら)くして 한참 뒤에

    棄(す)てる

    清野(せいの)初美(はつみ)

    分(わ)かり合(あ)う 互いに理解しあう、認め合う様を意味する表現。

    切(き)り出(だ)す 말을 꺼내다[시작하다].

    適(かな)わない 견딜 수 없다; 참을 수 없다.

    溜(た)まり 굄, 괸 곳. 溜(た)まる 한데 모이다.

    沸点(ふってん) 寸前(すんぜん)

    込(こ)み上(あ)げる 치밀어오르다, 복받치다.

    萌(も)える 싹트다

    中島(なかじま)梓(あずさ) =栗本(くりもと)薫(かおる) (1953년~2009년)는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이다.

    先駆(せんく)

    漸(ようや)く 겨우, 간신히. (=やっと, かろうじて)차차, 점점, 점차.

    希求(ききゅう)

    項(うなじ) 목덜미

    色(いろ)っぽい 요염하다, 성적 매력이 있다.

    ひかがみ 오금

    ぞくっと (기대나 공포・오한 따위로 인해) 몸이 떨리는 모양.

    刷(す)り込(こ)み 인쇄물

    なぞる (이미 써 있거나 그려 있는 글자·그림 따위의) 위를 덧쓰다[덧그리다].

    変節(へんせつ)

    癖(くせ)に 주제에

    張(は)り子(こ)の虎(とら) 종이 호랑이((장난감)). 허세부리는 사람.

    形骸(けいがい) 형해, (건물 등의) 뼈대.

    支(ささ)える

    僅(わず)か 얼마 안 되는 모양・조금;약간・불과

    下克上(げこくじょう)

    困惑(こんわく)

    俵 萠子(たわら もえこ、1930年12月7日 - 2008年11月27日)は、日本の評論家・エッセイスト。

    俵 孝太郎(たわら こうたろう、1930年11月12日 - )は、日本のニュースキャスター、政治評論家

    顛末(てんまつ) 전말。

    駆(か)け出(だ)し 갓 시작하여 미숙함, 신출내기, 신참

    師弟(してい)

    崩(くず)れる

    指導(しどう)

     

    신체화된 생활습관
    성애의 역사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애의 현실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지는 않다. 마치 그것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에 훈련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지 모른다. 너무나 깊이 신체에 파고 들어, 다른 상태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변경하는 것이 신체의 고통이나 자아의 붕괴에 이르는 듯한 기벽이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마약중독을 생각해 보면 좋다. 마약을 그만둘 정도라면 죽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화란 집단적인 습관적 생활양식이고, 광의의 생활습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생활습관은-생활습관병처럼-체형을 바꾸고 체질을 바꾼다. 사고의 양식을 바꾸고 감정의 양식까지 바꾸는 것이리라.
    그 옛날, 리브의 여자들이 만든 표어에 “안길 수 있는 여자에서 안는 여자로”라는 는 것이 있었다. 한참 뒤에 “해보면 안기는 여자 쪽이 쾌락은 깊었네요”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쾌락을 버릴 정도라면, ‘안기는 여자’인 채로 있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세노 하츠미의 <할 얘기가 있어 - ‘알고 싶은 여자’와 남자>>(2009)는 상징적인 타이틀의 책이다. 이런 타이틀에 느껴지는 위화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는, 여자는 ‘서로 이해할 수 없’어도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정도, 누구라도 알고 있다. 제7장에서 거론한 오구라 치카코의 “여자는 관계를 추구하고, 남자는 소유를 추구한다”는 명제에 대응시킨다고 하다면, 남자는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고 ‘관계’하지 않아도 섹스를 할 수 있는 생물이다.
    어느날 아내로부터 “할 얘기가 있어”라고 말이 시작되면 남편에 있어서 공포일 것이다. 그때까지 ‘관계’를 추구해서 참을 수 없었던 아내의, 고여있던 생각이 끓어오르기 직전이 되었다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할 얘기가 있어’는 ‘이해하고 싶은 여자’가 ‘가정 안의 여자와 남자의 대등성’을 추구하는 대사라고 말하는 데, 그것을 읽으면서 “거짓말일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치밀어오른다. ‘관계하고 싶은 여자’의 ‘관계’의 존재방식이 다양하지, 반드시 대등한 것만을 추 구한다고는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리라 버티컬한 관계가 아니라면 싹트지 않는 사람도 있다.
    2009년에 암으로 죽은 나카시마 아즈사는 쿠리모토 카오루라는 이름으로 <미소년>이라는 문학장르를 확립한 선구적인 작가였다. 그녀는 <미소년학 입문>(나카지마,1998)에서 자신은 수직의 낙차가 있는 관계가 아니면 싹트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동성애자 중에도 부모자식이나 형제처럼 낙차가 있는 관계를 추구해서 그것에 의해 점점 관계의 양식이 안정된다는 사람도 있다. 동성애자가 아성애의 비대칭이나 권력성을 싫어해서 ‘대등한 성애’를 희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일부 페미니스트의 규범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대등한 관계’를 추구했다면 여자는 연상의 남자나 장신의 남자나 지위나 학력이 높은 남자 등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 존경할 수 있는 남자 밖에 사랑할 수 없어’라는 것은 ‘남자에게 종속되고 싶다’는 욕망의 발로이고, ‘젊고 귀여운 여자애에게 밖에 싹트지 않아’라는 남자는 자신의 손에 끝낼 ‘지배와 소유의 대상’에게 밖에 성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발정 장치- 에로스의 시나리오>(1998)에서, 에로스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고 썼다. “여자는 목덜미가 요염하네”라든가, “오금이 섬뜩해진다”고 말할 때 문화가 각인을 신체에 덧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로스라는 것은 ‘문화적인 발정의 장치’이기 때문에, 지성도 교양도 필요한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여자로부터의 ‘할 얘기가 있어’는 여자 쪽의 ‘변절’로 보일 것이다. 심지어 ‘대등한 관계’따위 조금도 바라지 않은 주제에 시간이 흐르는 동안 권력관계는 변화하고, 그 과정에서 여자는 변절한다. 권력자는 실력도 권위도 읽고 종이호랑이같은 뼈대였음이 드러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얼마간의 나이차이가 가진 의미는 줄어들고, 학력도, 지위도, 신장도 권력을 지탱하는 자원이 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아내의 ‘변절’이고 ‘하극상’인 것이다. 많은 남편이 곤혹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결혼 이래로, 변하지 않았고 바뀐 것은 니쪽이다.”라고.
    “자립한 여성”의 롤 모델 중 하나였던 타와라 모에코상이 “전남편 타와라 코우타로와의 이혼의 전말을 쓴 에세이가 있다. 신출래기 저널리스트였던 타와라상은 이미 establishment가 되어 있었던 평론가 코우타로상의 제자로 들어가 거기에서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코타로 상은 그런 모에코상을 사랑하고 둘은 결혼했다. 그런 부부관계를 모에코상은 ‘사제관계’였다고 회상한다. 그런데 이윽고 모에코상이 저널리스트로서 자립하여 세상에 나가게됨에 따라 ‘사제관계’는 무너져갔다. 코타로상은 젊은 애인을 만들고 모에코상의 아래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에코상에게는 이전의 ‘사제관계’를 다른 여성과 재생산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뀐 것은 아내 쪼ᅟᅩᆨ이고 바뀌지 않는 것은 남편이다. 남자는 자신이 지도하고 우위에 서는 여자 밖에 사랑할 수 없는 데, 아무 것도 그것을 DNA나 테스타스테론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여자 쪽도 일단은 ‘지배되고, 지도받는’ 즐거움을 맛보고 그리고 그로부터 졸업한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피해자였을 리는 없다.

  • 2021-09-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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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일본어강독모집]<특집: 두 개의 전쟁, 하나의 세계> 평론 읽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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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ゆるく考える> p349~ 단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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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게 철학하기> 336 단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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