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강독 단어 및 해석

야생
2021-09-26 14:54
386

284~290쪽

 

きょうだ [怯懦] 겁나; 겁이 많고 의지가 약함; 겁약(怯弱).

つつましい [慎ましい]1.조심성스럽다, 조신하다, 얌전[음전]하다, 수줍다2.검소하다.

さんにゅう []1.입궐;天皇를 찾아뵘2.정성스럽게 연구3.새로운 역할을 가지고 참가함

きょぎ [虚偽]

わくぐみ [] 틀을 짬; 또, 그 짠 틀; 전하여, 사물의 대충 짜임새.

しゃくよう [借用

 []

ばいかい [媒介]

ずし []

ひけん [比肩]

あまん-じる [甘んじる]1.만족하다2.감수하다

ぜいじゃく [脆弱] 취약; 무르고 약함.

 

16장 미소지니는 극복할 수 있을까

 

미소지니의 이론장치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남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남자는 남자들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서 남자가 된다. 남자를 남자가 되게 하는 것은 다른 남자들이고, 남자가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도 다른 남자들이다. 여자는 어차피 남자가 남자가 되기 위한 수단, 또는 남자가 되었다는 증명으로 주어지거나 따라오거나 하는 보수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를 여자가 되게 하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남자다.

 

남자가 된다는 것과 여자가 된다는 것의, 이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메커니즘을 눈이 확 뜨이게 이론장치로 설명해준 것이 이브 세지윅의 <남자동료들의 연대-영국문학과 호모소셜한 욕망>이었다. 이성애 질서, 남성간의 권력과 욕망, 동성애혐오, 젠더 비대칭성과 여성차별... 이것들의 관계에 대해서 세지윅의 이론 만큼 알기쉽게 설명해준 것은 없다. 그런가, 그랬구나, 역시. 어슴푸레 느끼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에, 그녀는 개념을 부여했다. 

 

개념은 개념이고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와, 미소지니라고 하는 개념을 손에 넣으니, 왜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가 사실은 여자를 멸시하는 것인가, 또는 역으로 왜 남자가 자기보다 열등한 여자를 욕망하는가, 잘 알 수 있다. 

 

남자에게 있어 이성애 질서란 무엇일까? 그것은 남자가 성적주체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다. 이성애의 장치 아래서는 남자와 여자란 대등한 쌍이 되지 않는다. 남자는 성적욕망의 주체, 여자는 성적 욕망의 객체의 위치를 차지하고,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서 비대칭적이다. 이성애 질서라는 것은 남자는 동성의 남자를 성적욕망의 대상으로 하면 안되고, 남자가 아닌 자 (즉 여자)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삼아야 한다, 라는 명령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남자에 의해서 성적욕망의 대상이 된 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된다. 그것이 남자일 때는, 그 자는 여성화된다, 즉 여자같은 남자가 된다. 여기서는 여자란 정의상 남자의 성적 욕망의 객체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의 성적욕망을 환기하지 않는 여자는 정의상 여자가 아닌 것이 된다.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주체인 것을 서로 승인한 남성끼리의 집단을 가르킨다. 여자란 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남자에게 욕망되고, 귀속하고, 종속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그렇기에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자신들보다 열등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다. 

 

여성이란 남자가 아닌 자에게 부여되는 표시로서의 명칭이고, 그것은 남자에게 부여된 여러가지 미덕이나 명예로부터 차별화해서, 카테고리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자란 남자랑 달리 '용감하지 않은 자' '단단하지 않은 자' '지도력이나 결단력이 없는 자' '비겁한 자' '얌전한 자' '무력한 자', 즉 주체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 부여된 명칭이고, 이 모든 것의 여성다운 속성은 남성의 지배의 대상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속성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그야말로 이성애 질서의 핵심에 미소지니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는 아이덴터티만이 남성다움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을 성적 객체로 해서 자신이 성적 주체인 것을 증명할 때 처음으로 남성은 동성의 집단으로부터 남자로서 인정받는다, 즉 호모소셜한 집단의 정식멤버로서 참가를 승인받는다. 윤간이 성욕과는 무관한 집단적 행위이며, 남성다움의 의식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욕망의 삼각형

 

세지윅은 자신의 이론을 착상하는데, 르네 지랄의 <욕망의 현상학-문학의 허위와 진실>로부터 욕망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이론의 틀을 차용하고 있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 즉 자신이 동일화하는 대상이 욕망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고.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여거서도 동일화의 대상과 욕망의 대상이란 다른 성별로 갈라져있다. 지랄의 욕망의 삼각형에서는 동일화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그 개체에 있어서 존경이나 애착이나 경쟁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욕망하는 남성끼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라이벌 동료와 같은 관계다. 원래 상대를 존경하고 있지 않으면, 타자의 욕망에 가치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화의 대상이 되는 상대의 욕망의 대상을 손에 넣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은 동일화의 대상인 욕망의 주체의 위치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 된다. 

 

욕망의 삼각형 아래서는 욕망의 주체는 남성에 한한다. 여자는 그 삼각형에서는 의사조차 묻지않는 욕망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객체에의 욕망을 통해서 복수의 남자동료는 자신들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욕망의 주체인 것을 서로 인정한다. 남자가 욕망하는 여자의 가치가, 그 역으로 여자가 욕망하는 남자의 가치보다도, 척도가 일원적으로 알기쉬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자신이 획득한 것의 가치를 다른 남자들에게 과시하지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성애 질서의 근간에 삼각형이, 즉 복수의 남녀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의) 두사람의 남자와 (욕망의 객체로서의) 한 사람의 여자가 있다는 것을 갈파한 것은 게일 루빈이었다. 그녀는 레비스트로스의 혼인 교환의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결혼이란 두사람의 남녀의 연대가 아니라 여자의 교환을 통해서 두사람의 남자(두개의 남성집단) 끼리의 연대를 세우는 것이고, 여자는 그 연대의 매개에 불과하다고 간주했다. 그야말로 이성애질서는 호모소셜(남자끼리의 탈성애적 연대)와 미소지니(거기로부터의 여자 배제)를 그  핵심에 두고, 호모포비아(동성애 구제)를 동반하는 것이다.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미소지니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미소지니의 3점세트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도식은 세지윅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의 오리지널이다. 이 모델의 인식이점은 여자에게도 호모소셜한 연대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동시에 답할수 있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비견할만한 호모소셜한 연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지윅은 여성에게도 호모소셜한 연대를 상정하지만, 그 젠더 비대칭성을 지적한다. 즉 남자에게 있어서는 호모소셜과 호모섹슈얼 사이에 단절이 있지만, 여자에게는 그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이것은 에드리언느 리치가 말한 레즈비안 연속체를 상기하게 한다. 

 

세지윅에게 권력의 비대칭성이 있는 곳에서는 호모소셜한 남성의 연대와 호모소셜한 여성의 연대란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똑같지 않다. 동성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이라고 하는 자원의 배분이 압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열등한 집단에 자발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원할까. 따라서 여성에게 있어서 호모소셜과 호모섹슈얼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불리한 선택, 열등한 것임을 감수하는 선택이 된다.

 

그것보다도 여자에게 있어서는 성적 욕망의 객체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 호모소셜한 남성 집단에 귀속하는 것을 통해, 설령 간접적이라 해도, 권력 자원의 배분을 추구하는 쪽이 훨씬 효율이 있을 것이다. 여자동료가 남자(에게 선택되는 것)를 둘러싸고 잠재적인 경합관계에 놓여있는 한, 여자끼리의 호모소셜한 연대는 있다고 해도 약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질서는 여자의 질투가 자신을 배반한 남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여자를 향하는 것을 설명한다. 

댓글 3
  • 2021-09-27 02:30

    297~ 302 뚜버기

    その通(とお)り 그렇고 말고요.(그 이상이죠.).

    似(に)て非(ひ)なる物(もの) 비슷하나 다른 것。

    外(はず)れる 누락되다, 제외되다.

    痩(や)せ 마름; 여윔; 또, 그 정도. 마른 사람, 야윈 사람.

    願望(がんぼう) 소원

    不妊治療(ふにんちりょう)

    首尾(しゅび)よく 성공적으로, 순조롭게

    鋳型(いがた) 주형, 거푸집

    嵌(は)まる 빠지다

    愕然(がくぜん) 악연, 깜짝 놀라는 모양.

    陥(おちい)る(못된 상태·환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다. 빠져들다.

    格闘(かくとう)

    根幹(こんかん)

    結びつき 결부, 관계, 결합, 결속(結束).

    防衛(ぼうえい)きせい [機制]

    第一義的(だいいちぎてき) 제일의적, 일의적, 일차적, 근본적.

    顧(かえり)みる 돌아보다, 회고하다, 돌이켜보다.

    しへき [嗜癖] 정신 의학에서 알코올·마약·수면제 따위를 상용(常用)하여 끊지 못하게 된 상태.

    怯懦(きょうだ)  겁이 많고 의지가 약함; 겁약(怯弱).

    女々(めめ)しい 연약하다, 계집애 같다, 사내답지 않다, 기개가 없다.

    懦弱(だじゃく) 나약.

    転(ころ)ぶ 쓰러지다, 자빠지다. 구르다.

    見(み)て取(と)る 간파[간취]하다, 알아채다

    丸(まる)ごと 통째로

    ぐるみ (名詞에 붙여서) …까지 몽땅, …까지 합쳐서

    付(つ)き合(あ)う 교제하다, 사귀다.(의리나 교제 상) 행동을 같이하다, 동조(同調)하다.

    介(かい)する

    貶(おとし)める 얕보다, 멸시하다.

    脅威(きょうい)

    源泉(げんせん)

    なるべく 될 수 있는 한; 가능한 한; 되도록

    生(う)まれつく  (성질·재능·모습 따위를) 타고나다; 갖추고 태어나다.

    打(う)ち克(か)つ (강한 상대를) 이기다, 이겨내다

    権化(ごんげ) 어떤 추상적 특질을 구체화[유형화(類型化)]하는 존재 화신

    誤(あやま)り

    闘(たたか)う

    杉田(すぎた)俊介(しゅんすけ)(1975年- )は日本の批評家。

    草食系(そうしょくけい)

    加害者臨床(かがいしゃりんしょう)

    更生(こうせい)

    名乗(なの)る 자기 이름을 대다. 자기가 바로 장본인임을 말하다. 실명(實名)을 갖다.

    水脈(すいみゃく)

    一助(いちじょ)

     

     

    남자에게도 자기혐오는 있다. 그럴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두 종류의 자기혐오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남자인 것을 향한 것. 또 하나는 자신이 충분히 남자이지 못한 것을 향한 것. 모리오카의 논의는 두 가지의 자기혐오가 구별되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 두가지의 자기혐오는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자기혐오는 향하는 방향이 완전히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남성학은 젠더의 굴레에 남자도 역시 괴로워해왔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후자, 남자가 “충분히 남자이지 못한” 것에의 괴로움이 아니었을까? 성적인 약자, 히모테(인기없는 남자), 프리터, 히키코모리 등의 ‘남성 문제’는 호모소셜한 남성집단의 규격에서 누락되는 것에의 공포와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규격에서 누락되는 남자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을 맛보고 고립을 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호모소셜한 집단에서 배제된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에게는 연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의 ‘규격’에서 누락되는 것에의 공포나 고통은 있다. 마르고 싶다는 소원, 불임치료, ‘싸움에서 진 개’ 공포 등. 그러나 그녀들이 성공적으로 그 공포를 극복하여 ‘규격’에 도달했을 때에 자신이 미소지니의 틀 안에 빠진 것을 알고 깜짝 놀라 ‘자기혐오’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규격’ 바깥의 그녀들이, 그 자기혐오와 격투하면서 연대했던 것이 페미니즘이었다. 왜냐하면 자기혐오의 보편성을 그녀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리오카가 지적하는 남성의 자기혐오에는, 확실히 남성성의 근간에 닿는 심도가 있다. 그는 남성성과 폭력과의 결부관계를 말하는 데, 폭력이란 공포라는 이름의 방어기제를 해제한 타자신체와의 과잉 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신체와의 관계이기 이전에 우선 일차적으로 자기신체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신체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는 무모함과 용기로서 드러나는 한편 알콜 중독이나 마약기벽(嗜癖)과 같은 완만한 자살로서도 나타난다. 다른 한편 신체에의 과도한 배려는, ‘겁약’, ‘계집애 같음’, ‘나약’ 등 ‘남자다움’의 결여로 간주된다. 어느 쪽에서 굴러도 남자에게는 ‘자기혐오’가 기대리고 있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남자인 것도 남자가 아닌 것도 어느 쪽도 고통에 가득한 경험일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남성의 자기혐오란 타자화된 신체로부터의 복수이다. 그런 남성이 미소지니를 넘어설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신체를 타자화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신체 및 신체성의 지배자로서의 정신=주체인 것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성에 연결되는 성, 임신, 출산, 육아를 ‘여자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만일 모리오카처럼 남자도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신체까지 합친 자기와 화해하는 것이다. 신체의 욕망과 그 귀결을 마주하고, 신체의 변화에 동조하여 신체를 매개하는 친밀함을 얕보지 않는 것이다. 신체는 누구에게 있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이고, 그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체를 매개로 연결되는 타자의 존재를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고, 위협이나 공포의 원천도 아니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연결될 터였다. 그 타자의 중심에 여자가 있다. 달리 말해 남자가 주체가 되기 위한 핵심에는 ‘여자(와 여자같은 남자)’의 타자화와 배제를 두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남자로 (되도록)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남자가 되지 않는’ 공포를 이겨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를 달성하는 것이 남자에게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남자의 욕망이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모리오카는 ‘남성으로서 태어나 교육받아온 것 전체가 통째로 긍정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결과 “페미니즘이 지니고 있는 남성 존재 부정의 메시지는 거부해야 한다.”(프리터즈 프리, 2010)고 계속한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는 것은 ‘남성성’이었고, 개개의 ‘남성존재’는 아니다. 만일 ‘남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마치 여자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온전한 나를 긍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가장 바라는 것인데-여자가 미소지니와 격투했듯이 남자도 자신의 미소지니와 격투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여서 남성 동성애자들은, ‘남자가 아닌’ 사람, ‘여자같은 남자’로서 계속 여성화되어 왔다. 남성동성애자들은, 미소지니를 극복한 사람들인 것일까. ‘남자가 되지 않는’ 것은 즉 동성애자로 되는 것과 같지 않다. 동성애자의 남성이 미소지니를 극복한 남자일지는 알 수 없다. 세즈윅이 지적한 것처럼 게이 운동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의 쪽에서 다음과 같은 오해가 성립되어 있다. “하나는 게이와 모든 여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자연히 공동투쟁하고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일치할 수 있다는 전제이고, 또 하나는 남성 동성에자는 여성혐오의 화신, 인격화, 결과, 어쩌면 제1의 원인이라는 전제다.”(세지윅,1985,2001), “나는 어느쪽도 틀렸다고 믿고 있다”고 그녀는 계속한다. 어쩌면 이 양자의 극단적인 설명은 그 어느쪽도 어느 정도는 타당하고 오느정도는 틀렸을 것이다.

    “게이와 페미니즘은 공동투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전에 나자신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에스, 다만 미소지니가 없는 게이라면, 이라고. 여기에 덧붙여서, 섹슈얼리니의 여하를 불문하고, 미소지니가 없는 남자라면 이라고 보태도 좋다. 페미니스트가 미소지니로부터 자유롭지 않듯이, 더욱 신중히 ‘미소지니와 싸우고 있는 남자라면’이라고.

    모리오카와의 대담 속에서 스기타 슌스케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포스트남성운동’적인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현재, 남성성에 관해서 다시 한번 백래쉬, 히모테, 초식계남자, 동물화, 오타쿠, 라이트 오타쿠, 아동포르노, 의사 아동포르노, 가정폭력, 가해자임상, 성범죄자의 갱생 또는 규제 등이 토픽이 됩니다. 그 중 일부는 겉으로는 남성운동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혹은 자각없는) 남성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 개개의 흐름을 서로 결부시키는 두터운 수맥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논점을 통일적으로 논할 수 있는 남성성의 이론이 불가결한 것은 아닐까요. (프리터‘스 프리,2010)

     

    맞는 말이다. 세지윅의 도움을 빌어 고찰을 진행해 온 이 책이 그러기 위해 일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남자인 것‘에 관해 논해왔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자에게 있어서 자기자신과 화해하는 길이다. 남자에게 있어서도 자기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을 리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기혐오‘와 싸우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리키는 것은 어쩌면 여자의 역할은 아니다.

     

     

  • 2021-09-27 03:51

     

    p290~297 단어 띠우

    しんちょう [慎重]

    こうむる [被る·蒙る]받다.입다.

    およぼす [及ぼす]

    さもなくば [然も無くば] 그렇지 않으면

    かざる [飾る] 장식하다

    いいまかす [言(い)負かす]설복시키다, 설파하다, 말로써 상대방을 꺾다.

    やっつける [遣っ付ける]해치우다

    おとる [劣る]뒤떨어지다

    えんきょくごほう [婉曲語法]

    りょうしゅ [領主]

    こいこがれる [恋(い)焦がれる] 사랑에 애태우다

    しか [史家]

    ちょうへいせい [徴兵制]

    さんたん [賛嘆]

    しょうみ [賞味] 상미,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음.

    わけいる [分け入る] 헤치고 들어가다.

    ほころび [綻(び)] 타짐; 벌어짐; 또, 그 자리.

    みえす-く [見え透く]빤히 들여다보이다;속보이다

    はいぜつ [廃絶] 폐절.모두 폐지하여 없앰.

    たっけん [卓見]

    もうしご [申し子] 점지해 주신 아이.흔히 부산물이라는 뜻으로 잘못 사용되는 수도 있음.

    かくせい [覚醒]

    あざむ-く [欺く]. 속이다. 착각시키다.깔보다

    じゅそ [呪詛·呪咀] 저주

    きたえる [鍛える] 단련하다

    いとう [厭う] 싫어하다. 아끼다, 소중히 하다

    えっきょう [越境] 월경

     

    섹슈얼리티의 근대

    물론 세즈윅은 이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미소지니의 3종세트가 초역사적인 것이라고 말할 정도, 신중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탐구의 목적은 ‘섹슈얼리티의 모습과 섹슈얼리티라고 보여지는 것이, 어떻게 역사적인 권력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그것에 영향을 끼쳤는가’인데,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시대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는 권력의 비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전거로써 드는 사례가 모두 19세기이후의 영국 문학속에서 거론했던 것은, 이 3종세트의 설명력이, 푸코가 말하는 ‘섹슈얼리티의 근대’의, 특히 이성애질서에 대해서, 높은 설명력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반대로, 이 개념장치가 설명력을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들이 ‘섹슈얼리티의 근대’로부터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의미한다. 적어도 이 3종 세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인 사태가 더욱 차례차례로 나타나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 3종 세트이상으로 높은 설명력을 가졌던 다른 개념장치가 등장하기까지는.
    이 문장을 쓰는 한창인 때에 시나리오대로처럼 안성맞춤의 예와 만났다. (2010년 5월 31일호)의 표지를 장식한 한류 스타 이병헌의 인터뷰 기사다.
    ‘자신보다 술이 강해서, 말로 이길 수 없는 듯한 여성은 사양하고 싶다. 여성은 자신이 지키고 싶으니까“
    ‘그 주변의 남자 따위는 혼쭐이 날 것 같다. 그런 여성은 무서워서 거북하다(웃음)’이라고 말하는 그는 강한 여성에게는 감각이 없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보다 뒤떨어진 여성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의 영토에 가둬두고 싶기 때문에’라는 명백한 욕망을 ‘지켜주고 싶으니까’라고 완곡어법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게다가 정중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남자친구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답은 낼 수 없다.’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의 삼각형’을 그대로 체현했던 발언이다. 이것은 다음처럼 읽는 것이 옳다. 가끔 좋아하게 되었던 여성이 친한 친구가 좋아했던 여성과 같다, 고 하는 상정은 아니다. 애착과 존경, 즉 동일화의 대상인 친한 친구가 좋아하게 되었던 여성이야말로 자신도 좋아하게 된다. 그때, 여성을 둘러싼 친한친구와 라이벌 관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우선해서 여성을 단념할 것인가 어떤가는 그렇게 되어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다’남성이 자주 ‘친구의 연인’이나 ‘스승의 아내’, ‘영주의 부인’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중세 기사도 연애의 대상은 손이 닿지 않는 기혼 귀부인에 대한 사랑이었고, 이 사랑이야말로 로맨틱 러브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그 여성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 그녀가 자신보다도 상위 남성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도 연애는 같은 여성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을 통해서, 기사단이라는 호모소셜한 인연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써 기능하는 것을 중세사가의 조르주 듀비는 분명히 한다.
    이병헌의 발언을 아직도 징병제가 있는 한국사회에 어울리는 마초의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인터뷰했던 <주간아사히>의 아마도 나이어른 여성 편집자가, 그의 발언을 반정도 황홀한 찬탄을 속에 넣고 전하는 것을 보자,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세디윅이 19세기 영국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호모소셜과 미소지니가, 아직 역사적인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세디윅이 이 3종세트를 무기로 근대 영국문학을 분석했던 것처럼 미소지니라는 열쇠를 손에 넣고 본서에서는 일본의 호모소셜한 사회의 분석을 시도했다. 그리고 미소지니가 어떻게 해서 일본 남성의, 그리고 일본 여성의 욕망이나 아이덴티티에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헤치고 들어가 보았다. 이 개념이 여전히 높은 설명력을 가지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들은 도리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론이 벌어짐을 볼 수 있는 갈라진 틈에서 새로운 변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소지니를 넘어서
    미소지니에 대해서 이렇게 라고 논한 후에 ‘미소지니는 넘을 수 있을까’라는 장을 두는 것은 그다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수법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간단히 넘을 수 있다면, 이런 이야기가 쓰여질 필요도 없기 때문에. 젠더와 같이 미소지니도, 그것이 역사적 구축말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ㄱ커녕 이제까지 논했던 것처럼 미소지는 매우 심하게 신체화되어 욕망의 핵심에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려고 하면 ‘대야의 물과 함께 아기를 흐렬보내다’, 즉 욕망 그 것을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소지니를 넘은 세계에 대해서는, 마침 마르크스의 계급의 폐절된 세계에 대해서 답한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미소지니가 매우 심하게 채워진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미스지니에 대해서는, 그것을 넘는 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여성이 넘는 길, 또하는 남성이 넘는 길이다.
    전자에 대해서, 자주 있는 오해를 풀어보자. 그것은 ‘페미니즘은 여성혐오다’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대로’라고 긍정해두면 좋다. 부정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유의 제1MS DL 미소지니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고 미소지니를 몸에 붙이지 않은 여성은 우선 없기 때문이고, 이유의 제2는 페미니스트는 스스로 미소지니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려고 하는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미소지니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여성이 있다면(그런 여성이 있다라고 해 두면) 그 여성은 싸우는 대상을 갖지 않았으므로 미소지니일 이유도 없다. 반대로 자기자신은 미소지니로부터 완전히 자유이지만 주위의 사회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회변혁을 위해서 싸운다는 사람이 있다면, 페미니스트는 이미 ‘자기해방의 사상’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도구가 될 뿐이다. 대부분 다른 문화 접촉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 같은 ‘정의의 강요’는 대화를 성립시키키는커녕 다수파에 의한 소수파의 억압과 배제로 끝나버릴 것이다. 애초에 무엇이 미소지니인가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판정될뿐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미소지니란 무엇인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말로 그것에 대해서 분노와 고통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기혐오
    또하나, 남자에 있어서는 어떨까? 미소지니란 남자에게 있어서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 있어서는 자기혐오가 된다, 라고 나는 썼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최근의 저작에서 ‘분명 대부분의 페미니스느에게 제일 보이지 않는 것은, 남자의 자기혐오라는 문제는 아닐까요’라고 지적하는 뛰어난 의견이다.
    ‘나는 페미니즘의 부산물입니다. 명백하게 페미니즘에 의해서 의식을 각성되었던 세대입니다’라고 단언한다.
    ‘남자로서의 자신이 연애와 성애, 섹슈얼리티의 면에서 갈기갈기 상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통증은 없는, 자신은 상처없음의 가해지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계속 속여왔다. ㄱ러한 형태로 사회구조 속에 자신을 적응 시켜왔다. 그것에 눈치채는데 무척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리오카는 남성의 자기 혐오에 ‘자기부정’과 ‘신체멸시’가 있다고 한다. 일찍이 나는 자신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소외’와 남성의 ‘신체로부터의 소외’로서 대비했던 구도에, 이 ‘신체멸시’는 대응하고 있다. ‘신체사’를 제창했던 오가미 미호의 탁월한 표현을 빌리면, 여성쪽이 남성보다도 ‘신체도’가 높다. 다른 말로 하면 여성은 신체에 종속하고, 남성은 신체를 지배하고 있다. 여성은 신체의 노예이라는 것을 일생 계속 저주하게 되고, 남성은 신체를 타자화했던 것의 외상을 일생 지불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자의 신체 혐오는 남자라는 것의 고질병이라고 말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배후에 있는 것은 근대에 있는 주체의 형이상학, 잘 아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정신과 신체의 이항대립이다. 남자가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신체를 끝까지 타자화하고 있기때문이고, 신체의 주인으로서 주체=자기를 과시하는 필요에 강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에 대해서 열등하게 있는 신체의 욕망이기 때문에야말로 성욕은 ‘더렵혀진 욕망’인 것이고, 그것이 더욱 열등하게 있는 여성에 의해서만 충족된다면, 신체에 대한 저주는 점점 심해질 뿐이다.
    남자의 신체에 대한 자기 혐오는 탈신체화, 즉 자기 신체로부터의 이탈의 바램으로써 나타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여성 자신에 대한 동일화로의 소원으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어쩌면 여장취미란 이상화되었던 신체에 대한 자기 동일화 소망이었고, 젠더 경계를 넘는 소원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m군이 어린 여자애의 신체를 난도질할 때 그에게 있었던 것은 ‘소녀로 되고 싶다고 하는 소원이었다’라고 오오츠카 에이지가 설명했을 때, 그 근거없는 단정에 이상한 리얼리티를 느꼈던 것은, 그탓이었을지도 모른다.

  • 2021-09-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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