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엔즈 2장 5,6

띠우
2020-12-17 19:36
48

수정해석올립니다

 

댓글 5
  • 2020-12-20 16:30

    제 2장 7

  • 2020-12-20 17:32

    제2장 4

    4. 사회의 실제는 어떨까

    사람들이 보다 좋게 살아가기 위한 사람의 모임이 사회입니다. 즉 ‘사람을 위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현상은 ‘사회를 위한 사람’이라는 면이 꽤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생활 우선의 사회운영’이 아니고 ‘사회운영 우선의 인간생활’입니다. 또 ‘사회는 사람을 규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사회 규범을 따라야만 한다’라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질서나 규범을 지키는 것을 우선하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고한 ‘인간의 사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에서 언제나 살고 있으면 ‘사회의 실제’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져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너무 당연해서 의문도 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사회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 벌칙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생활이 원활하게 영위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기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구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면 당연히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개선하고 바꿀 수 있지만 현상은 어떨까요. 기구는 당연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원활한 생활의 영위를 위하지만, 어느 새인가 사람은 기구에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 단속이나 벌칙마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사회나 조직을 원활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왜 벌칙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조차 터부시합니다. 사회나 조직에는 벌칙은 불가결해서, 벌칙이 필요없는 사회 따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구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나와서 문제가 된다면, 그 원인이 기구에 있는 건지 그 사람에게 있는 건지 등, 조사해서 개선해 가면 좋을 것입니다. 벌칙을 마련하면서까지 사람이 따르게 하려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소유란 무엇일까
    소유는 인간끼리 정한 약속입니다. 인간의 사고로 자연계나 다른 동식물, 토지나 바다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상의 모두가 인간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유는 필요한 사물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겠지만, 현상의 인간들을 보면 필요와 불필요의 분별없이 소유를 지키거나 소유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쪽은 필요 이상으로 있어도 그 소유를 풀지 않고, 한편으로는 소유가 적어서 필요량을 얻을 수 없는 ‘빈곤‘한 상황이 많습니다. 소유에는, ‘인간끼리의 서로 다투어 빼앗는 쟁탈전을 피한다’고 하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실정은 어떻습니까. 분쟁의 대부분은 소유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유란 무엇일까? 그 장치∙메커니즘을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이외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유는 갖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소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 일까요?
    인간 사회의 현상은 ‘○○의 소유’로 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자기 소유’로 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자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새들은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물고기들은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얻으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넓은 땅위에 살고 풍부한 물자를 얻으면서도 소유에 의해 공간을 좁히고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쌓아두려 합니다.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요?

    ○ 돈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뭘까? 화폐나 지폐일까? 통장에 적힌 숫자일까? 돈이 있다는 것은 뭐가 있다는 것일까? 돈이 없다는 것은 뭐가 없다는 것일까? 행정이나 공공사업 등도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거나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을 아무리 쌓아놔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실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만, 화폐나 지폐를 가공하거나 해서 건축 재료로 할 리는 없고, 후불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건 명확합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생각으로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갖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실은 돈을 갖고 싶을 리가 없겠지요. 돈돈하면 돈이 주체가 되어, 사물은 돈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이 일한다 등등, 돈에 의해 사람도 사물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양이 충분히 있는데 물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 필요한 사람이 있어도 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돈이 있다면 할 수 있다’라든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라든가, 이런 것은 실제가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를 보면 인간이 머리나 몸을 사용해서 생산·유통·학문·예술 등을 하고 있는데, 돈이 사람에게 영양가가 있다거나, 돈이 물건의 원료가 될 리는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실제는 사람의 행위나 사물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돈에 의해 살아갈 리가 없습니다. 인간 생활의 실제는 돈으로 성립될 리가 없는데도, ‘돈이 필요하다’라는 뿌리 깊은 관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2020-12-20 20:19

    2장 4절 이후 재수정 (취합)

  • 2020-12-20 21:12

    수정본 2020.12.14일 분량.(2장 3절까지)

    제2장 사람과 사회 - ‘어떻게 되어있는 것인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형성되었던 ‘인식방법’에 의해서, 그 사람 나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무언가를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나름의 인식방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사실・실제는 어떨까?’
    일상적으로 누구라도 ‘사실은 어떨까?’ ‘실제는 어떨까?’라고 하는 관심이나 욕구가 일어나는 일은 많이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은 ‘사실을 모른다’ ‘실제는 어떨지 알 수 없다’는 의식의 순간에는, 의문이나 관심이 있기는 한데, 이것저것 조사하거나, 확인하거나 하면, ‘사실은 이렇다’ '실제는 이렇다‘라고 아는 셈, 이해한 셈이 되는 일도 많겠지요.
    어디까지 조사해도, 아무리 확인해도, ‘자기 나름의 인식방법으로 파악한다는 자각’이 있다면, 자연히 ‘실제는 어떨까?’라는 관심이나 알려고 하는 욕구는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를 먹어서 달구나라고 느꼈던 경우, ‘단 사과구나’ ‘이 사과는 달구나’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거나 틀렸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자신의 감각이라는 자각’이 있는가, 어떤가. 자신은 그렇게 느꼈지만 ‘실제는 어떨까?...’라고.
    이 경우의 ‘실제’란 무엇인가? 실제의 요소는 여러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나는 먹고 달다고 느꼈던 ‘사과의 실제’, 또 하나는, 먹고 달다고 느꼈던 ‘자신의 실제’.
    어느 ‘실제’를, 아무리 조사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실제는 이렇다’라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사과에 대해서 말하자면, 맛을 느끼는 요소가 되는 성분이라든가, 다른 것과의 비교 등으로, 그 사과를 조사해갈 수는 있겠지요.
    ‘자신의 실제는 어떤가?’와, 자신이 달다고 느끼는 메커니즘을 조사해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생리적으로 달다고 느끼는 미각이 있을까도 모르겠고, 이전에 먹었던 것으로부터 느꼈던 맛과의 비교라든가, 지금까지 길러진 맛의 감각이라든가 이런저런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당도라는 척도가 있어서 당도가 높은 것은 달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당도가 높은 사과를 먹어도 ‘달지 않아, 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요. 같은 사과를 먹어도 ‘달다고 느끼는 사람의 실제’와 ‘시다고 느끼는 사람의 실제’가 있겠지요.
    ‘더러워진 방’은 어떨까요. ‘방의 실제’란 그 방에 어떤 물건이 있는가, 어느 물건의 양이라든가, 물건의 상태・모양 등입니다. ‘자신의 실제’란 체험이나 기억, 사회통념 등에 의해 길러진 ‘더러워져있다고 생각하는 감각’ 등이겠죠.
    예컨대 ‘저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지독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 ‘좋은 사람이다’라든가 ‘지독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비교적 자각하기 쉽습니다만, ‘저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는 자신의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저 사람은 무언가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저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도 무언가 말한 ‘저 사람의 실제’와 그것을 인식한 ‘자신의 실제’가 있을 겁니다.
    ‘저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자신의 실제는 어떨까?’. 거기에는 ‘자신은 그렇게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앞의 장에서 말했듯이 ‘자신은 저 사람 그 자체를 실제로는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자각이 기본이 됩니다.

    1. 말의 실제는 어떨까?

    언어는 무엇인가를 추상화한 개념의 표현이며 말을 다해도 그 자체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말은 그 사회에서 공통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의미란 한 사람 한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 그 말을 보거나 듣는 사람의 파악 방법에 의지하게 됩니다. 말에는 공통성이 있고, 말을 들으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일단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기 안의 일이고, 자기 나름의 아는 법, 파악하는 법이지요.
    안전하다, 위험하다, 안심하다, 불안하다, 벌었다, 손해 봤다, 경기가 좋다, 경기가 나쁘다, 많이 있다, 조금밖에 없다, 칭찬받았다, 비난 받았다, 사랑 받았다, 미움 받았다, 좋았다, 나빴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등등, 대상으로 하고 있는 ‘그 실제는 어떨까?’, 그리고 그렇게 파악하고 있는 ‘자신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안전하다’라는 실제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위험하다’라는 실제가 있는건 아니겠지요. 무엇인가의 상태가 있고, 그것을 사람이 ‘안전하다’, ‘위험하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안전하다’고 여겨진 것에 대해 A씨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안전하다’고 여겨진 것을, A씨는 이상하다,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 경우 ‘안전하다’고 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하는 것도 사람의 견해(인식방법)입니다. 하지만 A씨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위험하다.위험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안전하다’‘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안전하다’ ‘위험하다’고 파악하는 ‘사람의 실제’ 는 어떻게 되어있는 것일까요?
    저마다 생각하는 안전이 다르기 때문에 안전기준이나 보안기준이라는 것을 마련하기도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일치하여 결정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의 견해(파악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기준은 말로 표현되고 기준의 해석이나 파악방식은 사람에 의한 것이며 기준에 적합한지 아닌지도 사람의 견해에 의한 것입니다.
    ‘안전하다’, ‘위험하다’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위험하다’라는 사실·실제가 있을 리가 없고, ‘안전하다’, ‘위험하다’라는 일단의 판정이고, 인간의 사고이며, 그런 자각 하에 ‘실제는 어떨까’라고 계속 조사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상대가 ‘큰 집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큰 집에 살고 있다’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로부터 오는 자기 나름의 이미지나 정경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죠. 상대가 ‘큰 집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그 자체의 실제는 어떤 걸까요. 말 그대로 들어도, 상대가 표현하고 있는 것과 그 말을 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칭찬받았다’, ‘폄하되었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등은 어떨까요.
     ‘그런 사실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실제는 어떨까’라는 질문은 생기지 않겠지요.
      어떤 사실·실제가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칭찬받았다’, ‘폄하되었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자각. 그로부터 ‘실제는 어떨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실제는 어떠한가?’라는 탐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인 ‘사이엔즈’라는 말도, 저자 나름으로 이해하고 해명해 가면서, 지금의
    현단계를 해설해 보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사이엔즈’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이것이 사이엔즈다’라고 단언하지 않고, ‘사이엔즈’란 이런 것이 아닐까라고 살펴보고 해명해가면서 이해하는것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2. 원인·이유란 무엇일까

    원인·이유란, 일반적으로 ‘어떤 사실을 일으킨 바탕이 되는 사물’이라는 의미를 가리킵니다만, 사물에 관한 분석과 고찰에 의해서 두 가지 이상의 사항의 관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의 인식 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약을 먹어서 나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나은’ 원인·이유는 ‘약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겠지요.
     ‘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자각’이 없으면, 역시 자신이 파악한 원인·이유를
    ‘사실'로 여깁니다.
    ‘약을 먹었다’, ‘병이 나았다’라는 두개의 사항에 대해서 ‘약을 먹어서 나았다’로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인식 방법입니다. ‘나은 원인·이유’는 다른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약을 먹었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뭔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 믿었더니 나았다‘ ’기도했더니 치료됐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은’ 원인·이유를 ‘ale었기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라고 하는 경우이지만
    ‘자신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라는 자각이 없이 , ‘ 실제로 그렇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가망없는 중병에 걸린 사람이, 누군가가 어떤 종교룰 믿고 치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서 , 그런 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나은’의 원인, 이유를 ‘신때문이다’라고, ‘자신이 그렇게 인식이 있다는 자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앙 때문에’ ‘기도했기 때문에’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약을 먹었기 때문에’라는 것은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후자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확실히 각각의 체험이나 인식하는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론이나 실험연구등에 의해서 실증된 것을 근거로서 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신앙이 있는 사람은, 현대과학에 의한 설명할 수 없는 근거가 있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근거가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인식 방법이고 현 단계에서 인간의 견해이며 , 앞으로 다른 요소, 요인이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A를 하고 B가 되면 ‘A를 했기 때문에 B가 되었다’라고 사실, 실제를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A를 했다는 것이 원인, 이유가 되어 B가 되었다’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을까요? A와B 요소, 요인이 하나 일지도 모르고, 실제 원인 이유는 훨씬 다른 요소일 지도 모릅니다.

    · 빨간 신호라서 멈췄다.
    · 약속을 해서 그 시간에 갔다.
    · 주문해서 상품이 도착했다.
    · 일을 열심히 해서 피곤하다.
    · 모욕 당해서 화가 났다.
    · 피해를 입어서 소송했다.
    · 불경기여서 도산했다.
    · 벌칙이 있기 때문에 지키게 됐다.
    · 일을 해서 돈을 받았다.
    · 돈을 지불해서 전기나 가스등을 사용한다.

    일상회화에서든, 보도에서든,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습니다만, 앞의 예를 A와 B로 나누어보면 재미있겠지요.
    A때문에 B가 되었다.( B를 했다)’ 라고,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B가 되었다,(B를 한다)의 요소· 요인은 A만은 아니겠지요. A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욕을 당해서 기뻤다.’ ‘피해를 입어서 사례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된것일까요? ‘모욕을 당해서 화가 났다.’ ‘피해를 입어서 소송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빨간 신호’와 ‘멈췄다’, ‘일한다’와 ‘돈을 받을 수 있다, ‘모욕을 당했다’와 ‘화가 났다’ 등등, 그 관련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요?

    일하고 있다면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일을 해도 돈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한정 지을 수 없겠지요.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기나 가스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돈만 지불한다고, 당연히 전기· 가스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떤가요. (아무리 돈이 있어도 무인도에서는 전기도 가스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기나 가스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의 ‘실제는 어떨까’?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되기 위한 설비나 시스템, 사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많은 ‘사실· 실제’에 눈을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받고, 자신의 돈으로 전기나 가스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사물의 실제를 보지 않고, 자기 위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벌칙을 정했기 때문에’ ‘계약서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사람이 정한대로 일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라고 하는 집단에 의한 ‘관념상의 사실화’로 영위되는 지금의 사회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사람이 일한다는 것의 실제’에 눈을 향하면 당연한 것입니다만, 벌칙이나 계약서나 돈이 사람을 일하게 할 리는 없습니다.

    ‘벌칙·계약서· 돈’ → ‘사람이 일한다’

    이런 경우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라고, 그 장치· 메카니즘을 알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도 사회문제나 세계정세까지도 ‘......이기 때문에......다’라고 하나의 요소· 요인으로 생각되어지는 상황을, 원인· 이유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기 때문에 ......다’라는 인식방법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것이 원인·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왜일까?’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계속 조사할 필요가 있겠지요.

    3. 그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

    ‘사람의 언동’을 파악하는 경우, 발언을 듣는다거나, 행동을 보거나 하는 것이 정보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보거나 들었던 정보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해석을 더하여, ‘사람의 언동’을 파악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손을 움직여서 물건에 대는 것을 보고 ‘두드렸다’라고 파악하기도 합니다. 발을 움직여서 이동하는 것을 보고 ‘걷고 있다’든가 ‘달리고 있다’고 파악합니다.
    또 ‘사람의 언동’의 대부분은, 그 사람의 생각⦁사고⦁의지⦁감정 등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의 내면이 언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언동’을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하는 것과 동시에, 그 언동에 동반하는, 그 사람의 생각⦁사고⦁의지⦁감정 등을 살펴서 파악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저 버스에 타려고 달리고 있다’든가 ‘기뻐서 손을 두드리고 있다. 등.
    여기에 기술하는 ‘그 사람의 실제’란 발언과 행동만이 아니라 거기에 동반하는 그 사람의 내면의 것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예에서 ‘저 버스에 타려고’라거나 ‘기뻐서’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사과를 먹고 ‘맛있다’고 말을 했다. 그것을 듣고 ‘맛있다고 말했다’만이 아니라 ‘맛있다고 느껴서 맛있다고 말했다’라고 파악하는 것이 많겠지요.
    이 경우, ‘그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라고 조사해보면, ‘맛있다고 느껴서’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것이고, 듣는 쪽이 살펴서 파악한 것이고, 실제로는 ‘맛있다고 느꼈다’일지 어떨지 알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맛있다’라고 느끼지 않았어도 ‘맛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맛있었다, 좋았다, 싫었다 등의 말을 듣고 자기 나름으로 파악해서, 그 사람의 감정과 기분 등을 알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그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에게서 ‘지금 가겠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지금부터 간다’라는 의지가 있다고 파악합니다. 그리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지금부터 간다’라는 행동을 한다고 파악합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의 언동을 ‘자신이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을까 어떨까.
    ‘지금 가겠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가지 않은 경우, ‘거짓말을 했다’든가 ‘속였다’라고 파악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가겠습니다’라고 듣고 그 사람에게 ‘그러한 의지가 있다’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파악했던 자신의 인식방법과, 그 사람의 ‘의지와 행동’이 달랐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상태는 그 사람에게 ‘지금부터 간다’는 의지가 있고 ‘지금부터 간다’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갑니다’라고 하는 말을 하고 ‘갔다’고 해도, ‘가고 싶어서 갔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갔다’ ‘가는 쪽이 좋으니까 갔다’ 등등, 그 사람의 내면은 여러 가지 경우와 상태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언동은 그 사람의 내면∙마음의 상태로부터 드러난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 마음의 상태는 태어난 후부터 오늘까지 주위로부터 받은 것이나 경험∙체험의 집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람의 언동 하나하나는 , 그 사람만의 짐작할 수 없는 내면적 요소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갑니다’라는 발언과 ‘갔다’라는 행동만을 표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서는, ‘그 사람의 실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과나 실적이 오르면 좋다고 받아들여서, 오르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받아들인다든가 규칙이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을 좋다고 받아들여서, 지키지 않는 사람을 나쁘다고 받아들인다든가 하는 일이 많지만, ‘그 사람의 실제’에 눈을 돌리면, 발언이나 행동만을 파악하여서, 올바르다든가, 잘못 되었다든가, 좋았다든가, 나빴다든가,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량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괴로움∙고통∙ 증오나 마음의 갈등이 내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을 다한 행위의 결과가 많은 손해를 가져오고, 악인이라 불리거나 배척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사이엔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를 접할때도, 사람과 서로 이야기할때도, ‘그 사람의 실제는 어떨까?’라고, 그 사람의 내면∙마음의 상태를 ‘알려고 하는’태도가 되겠지요..

    4. 사회의 실제는 어떨까

    사람들이 보다 좋게 살아가기 위해서의 사람의 모임이 사회입니다. 즉 ‘사람을 위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현상은 ‘사회를 위한 사람’이라는 면이 꽤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생활우선의 사회운영’이 아니고 ‘사회운영우선의 인간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회는 사람을 규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사회 규범을 따라야만 한다’라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질서나 규범을 지키는 것을 우선하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고한 ‘인간의 생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에서 언제나 살고 있으면 ‘사회의 실제’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져서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너무 당연해서 의문도 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사회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 벌칙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생활이 원활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기구를 설치합니다. 기구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면 언제라도 어떻게도 개선하고 바꿀 수 있을 터이지만 현상은 어떨까요.
    기구는 당연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원활한 생활(영위, 살이)을 위하지만, 어느 새인가 사람은 기구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 단속이나 벌칙까지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사회나 조직을 원활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왜 벌칙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조차 터부시합니다. 사회나 조직에는 벌칙은 불가결로서 벌칙이 필요없는 사회 따위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보입니다.
    기구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나와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이 기구에 있을까, 그 사람에게 있을까 등, 조사해서 개선해 가면 좋겠지요.
    벌칙을 마련하면서까지 사람을 따르게 하려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소유란 무엇일까
    소유는 사람끼리 결정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자연계나 다른 동식물, 토지나 바다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상에는 모두 인간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유는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겠지만, 현재의 인간들을 보면 필요와 불필요의 분별없이 소유를 지키거나 소유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쪽은 필요 이상으로 있어도 그 소유를 풀지 않고, 한편으로는 소유가 적어서 필요량을 얻을 수 없는 ‘빈곤‘한 상황이 많습니다.
    소유에는, ‘인간끼리의 쟁탈전을 피한다’고 하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실정은 어떻습니까. 분쟁의 대부분은 소유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유란 무엇일까? 그 장치〮∙메커니즘을 살펴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흔히 ‘○○의 것’으로써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이외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유는 갖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소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입니까?
    인간 사회의 현상은 ‘○○의 소유’로 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자기 소유로 해야 해요.
    즉,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자신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새들은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물고기들은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얻으며 살고 있지요.
    사람들은 넓은 땅에 살고 풍부한 물자를 얻으면서도 소유에 따라 공간을 좁히고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쌓아두려 합니다.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요?

    ○ 돈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뭘까? 화폐나 지폐일까? 통장에 적힌 숫자일까? 돈이 있다는 것은 뭐가 있다는 것일까? 돈이 없다는 것은 뭐가 없다는 것일까?
    행정이나 공공사업 등도,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든가,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돈을 아무리 쌓아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실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만, 화폐나 지폐를 가공한다든가 해서 건축 재료로 삼을 리는 없고, 후불이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한 것은 명확합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사고로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갖고 싶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도, 실은 돈이 갖고 싶을 리가 없겠죠. 돈돈하면 돈이 주체가 돼서, 사물이 돈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된다든가, 돈을 얻기 위해 사람은 일한다 등등, 돈에 의해 사람도 사물도 움직인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양이 충분히 있는데, 물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도 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있다면 할 수 있다’든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든가 라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2020-12-21 13:29

    2020년 12 월 21일 2장 후반부 수정본입니다.
    2020년 12월 21일 (수정분 - 루시아)

    제2장

    4. 사회의 실제는 어떨까

    사람들이 보다 좋게 살아가기 위한 사람의 모임이 사회입니다. 즉 ‘사람을 위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현상은 ‘사회를 위한 사람’이라는 면이 꽤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생활 우선의 사회운영’이 아니고 ‘사회운영 우선의 인간생활’입니다. 또 ‘사회는 사람을 규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사회 규범을 따라야만 한다’라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질서나 규범을 지키는 것을 우선하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고한 ‘인간의 사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사회에서 언제나 살고 있으면 ‘사회의 실제’라는 것을 의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져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너무 당연해서 의문도 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사회의 실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 벌칙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생활이 원활하게 영위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기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구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면 당연히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개선하고 바꿀 수 있지만 현상은 어떨까요. 기구는 당연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원활한 생활의 영위위한 건이지만, 어느 새인가 사람은 기구에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 단속이나 벌칙마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사회나 조직을 원활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왜 벌칙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조차 터부시합니다. 사회나 조직에는 벌칙은 불가결해서, 벌칙이 필요없는 사회 따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구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나와서 문제가 된다면, 그 원인이 기구에 있는 건지 그 사람에게 있는 건지 등, 조사해서 개선해 가면 좋을 것입니다. 벌칙을 마련하면서까지 사람이 따르게 하려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소유란 무엇일까
    소유는 인간끼리 정한 약속입니다. 인간의 사고로 자연계나 다른 동식물, 토지나 바다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상의 모두가 인간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유는 필요한 사물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겠지만, 현상의 인간들을 보면 필요와 불필요의 분별없이 소유를 지키거나 소유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쪽은 필요 이상으로 있어도 그 소유를 풀지 않고, 한편으로는 소유가 적어서 필요량을 얻을 수 없는 ‘빈곤‘한 상황이 많습니다. 소유에는, ‘인간끼리의 서로 다투어 빼앗는 쟁탈전을 피한다’고 하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실정은 어떻습니까. 분쟁의 대부분은 소유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유란 무엇일까? 그 장치∙메커니즘을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이외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유는 갖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소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사용을 제한∙금지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 일까요?
    인간 사회의 현상은 ‘○○의 소유’로 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자기 소유’로 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자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새들은 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물고기들은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얻으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넓은 땅위에 살고 풍부한 물자를 얻으면서도 소유에 의해 공간을 좁히고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쌓아두려 합니다.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요?

    ○ 돈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뭘까? 화폐나 지폐일까? 통장에 적힌 숫자일까? 돈이 있다는 것은 뭐가 있다는 것일까? 돈이 없다는 것은 뭐가 없다는 것일까? 행정이나 공공사업 등도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거나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을 아무리 쌓아놔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실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만, 화폐나 지폐를 가공하거나 해서 건축 재료로 할 리는 없고, 후불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건 명확합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생각으로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갖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실은 돈을 갖고 싶을 리가 없겠지요. 돈돈하면 돈이 주체가 되어, 사물은 돈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이 일한다 등등, 돈에 의해 사람도 사물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양이 충분히 있는데 물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 필요한 사람이 있어도 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돈이 있다면 할 수 있다’라든가,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라든가, 이런 것은 실제가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를 보면 인간이 머리나 몸을 사용해서 생산·유통·학문·예술 등을 하고 있는데, 돈이 사람에게 영양가가 있다거나, 돈이 물건의 원료가 될 리는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실제는 사람의 행위나 사물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돈에 의해 살아갈 리가 없습니다. 인간 생활의 실제는 돈으로 성립될 리가 없는데도, ‘돈이 필요하다’라는 뿌리 깊은 관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장치·메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5. 자유·평등이란 무엇일까

    자유 · 평등이라는 말은 지배 · 속박 · 차별 등에 대한 반대말처럼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연계에는 지배 · 속박 · 차별 등은 없을 것이고 인간에게도 원래 부자유 · 불평등 따위는 없을 터인데, 굳이 자유 · 평등 등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입니다. 자유 · 평등은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만, 자유 · 평등을 외치는 것은, 인간이 부자유·불평등한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겠죠.
    속박이나 차별이 있는 상태로부터 그것이 느슨해지면 개방감과 대등한 느낌이 생깁니다. 현상태(現状)에서는 ‘자유를 느끼면 자유다’, ‘평등하다고 느껴지면 평등이다’라고 하는 감각적인 자유 · 평등, 이른바 자유감 · 평등감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여깁니다.
    지금까지 인간사회는 ‘해서는 안 되는 일’, ‘해야 할 일’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외국에 갈 때는 여권이 필요하다, 물건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약속은 지킨다, 법률은 따른다, 의무나 책임을 완수한다 등등, 부자유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게 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 점을 지적하면, ‘제멋대로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런 것을 허용하면 사회가 엉망진창이 된다’, ‘약속과 규제는 필요하다’ 등등, 각각이 가진 의사나 욕구까지도 억제하여 당연시하는 이상한 자유론이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평등의 경우에도, ‘차별을 없애자’라고 부르짖거나 하지만, 어떤 조직에서나 사람의 위아래가 있어서 대우의 차이가 만들어지며, 의견이나 의사, 요구나 욕구도 대등하게 다뤄 지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대등하게 의사결정이나 운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상하가 있어야 조직이 구성된다’ 등의 평등부정과 같은 조직론이 나오거나 합니다.
    앞에서 말한 ‘소유’나 ‘돈’이 있는 것 자체가 빈부의 차를 생기게 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또,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업신여기는 것이 당연하다든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 당연하다든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나 잘하지 않는 사람이나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은 불평등하다 등등, 현실의 인간사회와 자신의 생활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해서, ‘사람과 사람의 평등’에 관해서는 무척 경시되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6. 인간관과 사회

    인간관이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인간에 대한 관점 · 인식 방법입니다. 자신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이것에 관하여 열심히 탐색하여,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자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선설 · 성악설이라든가, 죄를 짊어지고 있다든가, 번뇌가 있다든가, 선인과 악인이 있다든가, 예로부터 다양한 인간관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감 · 경계심 · 시의심등도 인간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벌칙 · 소유 · 돈 등으로 사회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도, 인간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관의 형성은, 어린 시절부터의 환경에 의한 것이 큽니다. 태어나서 자란 사회의 토대가 되어있는 인간관이나 주위 사람들의 인간관을 흡수하면서 성장하며, 그 사람의 인간관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있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인간은 육체적인 면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이 중요하다’는 인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정신적인 면의 성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예의범절을 가르치거나 교육에 힘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과연, 지금까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이나 교육으로 ‘인간답게 성장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의 사회에서도,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인간에게는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인간관을 인간이 만들어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는 것에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던 ‘관념상의 사실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형성되면, 자기 의지로 그 관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복종’이라고 하면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만, ‘~해야만 된다’ ‘~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관념을 지켜서,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다면, ‘복종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폭테러도 특공대도 자기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지요.
    이런 인간관이 대부분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인류의 역사는 몇 천 년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이나 규칙 하나하나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벌하거나, 예의범절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평화를 바라고,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원하고 있어도, 분쟁이나 빈곤이 없어지지 않는 원인은, 선악을 가르치거나, 인간을 심판해서 벌을 주는 ‘사회의 존재방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간사회가 된 원인은 사회의 토대가 되어 있는 잘못된 인간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6. 인간관과 사회

    인간관이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인간에 대한 관점∙인식 방법입니다. 자신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이것에 관하여 열심히 탐색하여,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자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선설∙성악설이라든가, 죄를 짊어지고 있다든가, 번뇌가 있다든가, 선인과 악인이 있다든가, 예로부터 다양한 인간관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감∙경계심∙시의심등도 인간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벌칙∙소유∙돈 등으로 사회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도, 인간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관의 형성은, 어린 시절부터의 환경에 의한 것이 큽니다. 태어나서 자란 사회의 토대가 되어있는 인간관이나 주위 사람들의 인간관을 흡수하면서 성장하며, 그 사람의 인간관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사람은 육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이 중요하다’는 인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정신적인 면의 성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예의범절을 가르치거나 교육에 힘쓰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과연,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이나 교육으로 ‘인간답게 성장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의 사회도,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인간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인간관을 인간이 만들어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는 것에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던 ‘관념상의 사실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형성되면, 자기 의지로, 그 관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복종’이라고 하면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관념을 지켜서,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다면, ‘복종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폭테러도 특공대도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지요.
    이런 인간관이 대부분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인류의 역사는 몇 천 년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이나 규칙 하나하나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벌하거나, 예의범절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평화를 바라고,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기원하고 있어도, 분쟁이나 빈곤이 없어지지 않는 원인은, 선악을 가르치거나, 인간을 심판해서 벌을 주는 ‘사회의 존재방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간사회가 된 원인은 사회의 토대로 되어 있는 잘못된 인간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7. 인간을 모르는 사회

    ○ 힘으로 인간을 움직이다
    태고의 옛날부터, 사람의 집단⦁사회라고 하는 것은, 힘을 사용해서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면 평화로워지지 않는다’라는 뿌리 깊은 생각이 계속 이어져오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힘이란 무력이나 권력⦁법의 힘 등으로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을 채찍으로 때려서 움직이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반복하면, 직접 때리지 않더라도, 채찍을 보거나 채찍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도 학습능력이 있기 때문으로, 당근과 채찍으로 동물을 조련하는 것은 이 능력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인간의 경우, ‘조련’이라는 표현을 쓰면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만, 예의범절을 가르치거나 지식을 가르치거나, 법의 힘이나 벌칙에 의해서 행동을 강제하거나, 그것을 판별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등의 메커니즘은 ‘조련’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또,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힘을 사용해서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 ‘행동을 강제하고 있다’라는 자각이 없는 일이 많겠지요.
    ○ 권력과 권리
    권력이란, 사람을 강제해 복종시키는 힘, 강제력.
    권리란, 일정한 자유와 요구를 행사할 수 있는 힘.
    민주주의라든가 주권재민이라고 불리는 현대는, 정권을 획득하여 정치를 움직이고,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도 개인도 서로 힘을 행사하는 (행동을 서로 강제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 외부의 것으로 움직이다
    서커스의 동물은 뛰어난 재주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줍니다만, 과연 그들 자신의 의지로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동물들은 본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안내견이나 경찰견 등도 마치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과연 정말로 그것이 하고 싶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를 들어, 노인이나 몸이 부자유한 사람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행위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그러한 사람을 ‘친절하게 돌보는 마음’에서의 행동이겠지요. 그러나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 아이에게 부모가 보다못해 ‘양보하세요’라고 말하거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말 사소한 예이지만, 본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행위임이 분명하지만, 마음이 솟아나기 전에 가르치거나 깨우치거나 해서, ‘마음’보다도 ‘행동하는 것’을 몸에 익혀버리는 일이 있겠지요.

    ‘외부의 것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 선악, 규칙, 주위사람의 눈 등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여기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하는 의미입니다.

    한편, 자신이 ‘하고 싶은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속 내용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사람에게 나쁘게 생각되고 싶지않다’등으로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 나오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외부의 것으로 움직이는’것의 예이겠네요. 때로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죄의식과 같은 마음으로부터의 행동도 있겠지요.
    그 밖에도 ‘성적을 올리고 싶다’ ‘남을 이기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등도, 외부의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사람을 벌하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려는 사회에서는 그 의도대로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몸도 마음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똑같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잘못이나 과오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움직이려고 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따끔한 맛 또는 불쾌한 꼴을 당한다는 것을 가르쳐 그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벌칙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사람용 채찍 같은 것이겠지요.
    어른이 아이에게, ‘말을 안 듣는 아이에게는 간식을 안준다’ 등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벌’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예의범절이나 교육으로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벌해도 원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이나 과오가 사라질 리도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벌을 받거나 벌서는 사람을 보고, 벌을 받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에 힘을 쏟는 것이죠.
    사람은 벌을 받으면 잘못이나 과오를 알아차리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될까요? 벌을 체험한 후 다시는 벌을 받고 싶지 않다는 기분에서 나오는 행동이 과연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외부의 것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벌칙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벌칙으로 강제하기 때문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주거나 강제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 사람을 비난하다
    ‘벌주다’는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지만, ‘비난하다’는 정신적인 측면으로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을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을 비난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어 있는걸까 탐구해 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왜일까 라고 물으면,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이유로 들지만,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할 때에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만, 사실은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난하는’ 마음으로 ‘벌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이 벌을 받는 것으로 ‘비난하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만약 벌을 받은 사람이 기뻐하거나 즐긴다면 비난하는 마음은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비난하다’의 어원은 ‘공격하다’와 같다고 합니다. ‘꾸짖다’ ‘탓하다‘ ’규탄하다‘ 등도 비슷한 심정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끔한 맛을 뵈다’ ‘불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벌하다’와 비슷합니다만, 둘 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자각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겠지요.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비난’할 때의 속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다툼의 원인
    다툼의 원인은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고’ ‘행동을 강제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다투고 있는가? 물으면, 상대의 실수나 잘못을 이유로 든다거나, 서로의 주장이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완전하게 실수나 잘못이 없어지고 주장이 같아지지 않으면, 싸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인간, 잘못이나 실수를 일으키거나 주장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거나’ ‘행동을 강제하는’ 일이 없으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인간에게 알맞은 사회로
    솔직히 ‘주세요’라고 말하면 좋을 것을, ‘넘겨’ 라고 하면 주고싶은 마음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할 마음이 있어도, ‘해!’라고 하면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힘을 이용하여 하게 한다든지, 문제 삼는다든지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실정이죠. 사람에게 강제하고, 복종하고, 사람을 벌주고, 비난하고, 사람과 싸우고 ......본래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걸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강제하는가, 복종하는가, 벌주는가. 비난하는가, 싸우는가’를 물어보아도, ‘이런 이유 때문에’로 끝나는 것이 실정이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하기 싫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지 기계가 아닙니다.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법입니다. 게다가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과 건강을 위해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과오나 잘못을 일으키기 쉬운 면도 있습니다. 특히, 미숙하고 어릴 때에는 그렇지요. 그것에 대해서 비난한다든지 꾸짖는다든지 힘을 이용해서 움직이려 한다면, 자연히 학습능력에 의해서, 불쾌감을 당하지 않는 행동을 기억해서 몸에 익혀가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인간 자신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인간답게 성장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기능이 점점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은 아닐까요.‘불쾌감을 주어 인간을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불쾌감을 주어 인간을 움직이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라고 하는 인간 불신의 인간관이 바탕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믿으세요’ 라든가, ‘신용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두 제멋대로 움직여서, 사회는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종래의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제하거나, 복종하거나, 벌하거나, 비난하거나,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에게 적합한 사회를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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