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엔즈 입문 <192-226쪽 수정해석>

둥글레
2020-12-07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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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26쪽 수정해석>

누구의 마음 속에도 있는 것

  처음에 ‘새로운 사회의 실험’이라든가 ‘다정한 사회의 실험’이라든가 막연한 바람을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엇도 고매하게 심원한 이상을 얘기한 것은 아니구나 라고 느낀다. 집을 막 나가려할 때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 아주 싫은 느낌이 들어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 걸까 하고, 언제부턴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와도 사이좋게 살고 싶다’ ‘누구라도 안심하고 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라고 바라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눈앞에서 그 바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라도, 말로 하지 않아도, 불가능하더라도, ‘이런 자신이 되고 싶다’든가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어’라든가, 요컨대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디선가, ‘아무리 바라더라도 지금 세상 중에 실현될 수 있을 리가 없지’라고 체념해버리는 일은 없을까?

  여기 스즈카에서 살게 되어서 희망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처음에 ‘에코빌리지’나 ‘영원한 문화’나 ‘코칭’이나 ‘트랜지션(이행)’이나, 생소한 명칭의 활동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생활이나 활동에 대한 뜨거운 생각을 항상 절절하게 느껴왔다. 동시에 그 바람을 실현해 가기 위해, 그것을 진짜로 실현시켜 가기 위해, 사이엔즈 스쿨의 ‘사이엔즈’를 사용할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싸움이 없는, 행복한 세계’ ‘누구나 안심하고 그 사람답게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바라고, 살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지성과 마음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최근, 사이엔즈 스쿨의 코스에 참가해서 이제부터의 생활이나 활동에 ‘사이엔즈’를 활용해 갈 실감을 갖은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코스에 참가해 본 감상문이 있으니 몇개 소개합니다.

『마이라이프 세미나』

  「보여지는 이성사회」

                                                                               -마이라이프 세미나에 참가해서, 요시다 미쓰하루

  참가하기 전은, 자기계발적인 세미나를 상상해서, 어느 정도 무언가 대답이 있는 내용이거나, 자신의 내면을 참가자에게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을 상상했습니다만, 실제는 사이엔즈라는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방법으로 무척 재미있고 흥미깊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입니다. 학생 때부터 철학에는 흥미가 있었고 책을 읽어보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확실히 철학적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무엇이든 생각했던 것을 말한다는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주변 분위기를 신경 썼던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참가멤버와 마음을 터놓고 말하기 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자기 과거 경험이나 그때의 생각, 사고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분들의 과거의 경험이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생각했던 방법의 세미나는 아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각각의 과거 경험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을 일상에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질문을 받아보면 전혀 답이 떠오르지 않는, 그리고 모두의 의견을 듣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사고도 영향을 받고 변화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청년회의소에서는 ‘밝고 풍요로운 사회’를 내걸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밝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풍요로운’이란 무엇일까, ‘사회’란 무엇일까 라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청년회의소 멤버도 새롭게 한 사람 한사람 되물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말로는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말로는 그러한 것이다 라는 전제조건으로 고정하고 있었는데, 그 파악하지 못한 말을 근거로 상대의 말을 듣고, 자기 판단하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무섭습니다.

  ‘이 컵을 혼자 힘으로 만든다고 한다면’의 질문은 신선했습니다. 평소 도매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최종구매자가 손으로 하는 것에는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고 은근히 의식은 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새삼스럽게 의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손님은 신과 같다’는 생각은, 돈을 주고 받았다면 당연, 돈을 주면 내 물건이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었다고 통감합니다. 관계라는 관점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내가 있는 사회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라서 뿌리 내린 이 개념은 꽤 강력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라는 개념과도 맥이 닿아 있군요. 이 가방이 누구의 것인가라고 하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힘차게 ‘나의 물건’ 이라고 하는 기분이 솟구쳐 올라 온 것은 그 증거라고 스스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을 더욱 탐구해 나가고 싶다고 느낍니다.

  내 회사를 상상했을 때 나는 간판과 회사의 정면과 사무실의 영상을 떠오릅니다. 그것은 회사입니까?로 되었습니다.(앞의 말에 대해 누군가 그것이 회사냐고 물어본 것 같음) 회사란?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당연히 사원이 있습니다. 일반적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회사의 경영자보다는, 사원을 소중히 하고 있는 회사라고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고 할까, 머리로 생각하고 있어도 형태가 되지 못했다고 할까, 실천하는 것이 적었다고 할까. 사원을 가족처럼 친밀감을 가지고 인식하지 못했구나 돌아 봤습니다.

  아내에게 ‘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네요’라는 말을 듣는 내가,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고 이와테현에서 멀리 떨어진 미에현이라는 땅에서 6일간 갇혀서, 일과 다른 활동을 생각하면 한번은 참가를 단념해 볼까라고 머리를 스친 적도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참가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6일간 하루 종일을 다 써서 생각을 짜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세미나라고 느낍니다. 이번에 말을 걸어서 권유해 주신 요시다 나오미씨에게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모리오카로 돌아가면 친구들 모두에게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나오미씨와 이야기 했지만, 잘 전달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탐구를 하는 일’은 전하고 싶군요.

  마지막 날 밤 검토회에서의 ‘진짜 사회’를 생각했을 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친밀하게 생활한다면 어떤 사회가 될까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 지구는 엄청 살기 쉽고, 실현된다면 어떤 멋진 사회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 사회였습니다. 이 이미지를 모리오카에서도 흥미가 있을 것 같은 사람, 젊은 세대와 어떻게든지 공유할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이 필요없는 사회, 군대도 필요없고, 정부도 필요없고 국경도 없고, 싸움도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 정말로 실현되면 좋겠다. 실현하고 싶다.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중략) 지금까지 이런 사회가 좋아~라고 희미했던 것이 조금 보이게 된 기분입니다. 나의 현재 단계에서 떠오르는 이상(理想)적인 사회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커뮤니티를 목격한 것으로 실현을 향한 자신감으로도 연결되었습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는 말이 있지만, 이미 나의 머릿속에는 첫 시작으로 뭘 해볼까가 빙빙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마이라이프 세미나에 참가하러 와서,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진 느낌이 듭니다. ‘철학자는 실천자’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실천입니다.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생각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는 무엇일까를 늘 계속 탐구해 가고자 합니다. 감사했습니다. (2014년 11월)

『자신을 알기 위한 코스』

  「자신의 감각을 자각하면, 세계가 변한다」

                                                                                                                                 사다노 유키

 

  가장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모든 것이 자신의 감각이라고 자각했던 것. 세계가 마치 변한 것 같은 놀라움. 이것이 첫 걸음일까.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나의 소망이 모두 나와서 놀랐다. 이 중에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질까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감각이라고 자각했을 때, 타인의 시선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타인의 눈에 매여 있는 것 같은 감각을 계속 가지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정말로 기쁘게 생각한다.

   자신에게 제일 관심이 있다. 그 자체로 괜찮아. 지금까지는 이기주의자라든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인간?이라든지, 마치 나쁜 것인양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느껴서 정말로 편해졌다. 기쁘다. 머리 속의 근황,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이것이 많이 변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축을 가지고 싶다든지, 인정받고 싶다든가, 이것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이라니 가지지 않는 편이 좋다.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 따위 없었다고 생각하니, 지금은 어쨌든 자신에 대해 알고 싶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크다. 자신을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벌써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알고 싶다. 내관(코스)이 기대된다. 앞으로는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을 어머니 도시락처럼, 더욱더 기분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는 자신을 알자. 손님접대의 프로가 되고 싶다고 생각 했었는데, 이제는 프로가 될 필요 따위 없다고 느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일하고 싶다.

  관찰은 끝이 없는 여행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재미있었다. 식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에 자신을 관찰하는 것과 똑같이 더욱 잘 관찰하고 싶다. 틀림없이 심오하고 재미있을거다. 자신에게 가장 관심이 있다고 말했는데, 오랫동안 계속해서 아주 많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잘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서 불평을 말해왔고 싫다고 느꼈던 사람, 그 사람을 문뜩 생각하니 왠지 아주 사랑스럽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깜짝 놀랐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네. 주의하지 않은 관계로 되고 싶네. 내가 가장 소중히 하고 싶은 것은 자신.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을 가장 소중히 해주고 싶다. 내가 자신을 소중히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주변도 즐겁게 살아가면 좋겠다. 제멋대로라고 여겨지는 게 싫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제멋대로여도 좋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기쁜 것이었다. 

  자각으로 보여 온 것이 지나친 불평이다. 만약 뭔가 감정이 끓어 오르면 진짜 차분히 음미하거나 관찰하거나 해보고 싶다. 욕구라든가도 마찬가리로. 지금까지는 ‘이거 맛있어!’라고 권유해 준 사람에 대해서 ‘맛 없었어’라고는 절대로 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는 솔직하게 맛 감상을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자세히 자신의 행동을 관찰해 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내일 할 일’과 임무를 나열해서 자신에게 부과하고 (자신과의 약속), 할 수 없었다면 자신을 비난하거나 후회하거나, 죄책감에 매여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내일은 꼭 하자! 라든가 생각했지만 그것을 할까 어쩔까 하고 싶은가 어떤가는 그때 그때 바뀌고 약속이나 선언을 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묶을 뿐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죄책감이라니 대체 뭐란 말인가. 느낄 필요는 없잖아. 

  지금 자신의 감각을 자각하면 약속 따위 자신의 단정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과거나 미래나 이상 따위 보다 눈 앞의 지금을 소중히 하고 싶다. ‘잃고서 처음으로 깨닫다’라니 굉장히 싫다라고 생각했지만, 내관을 하고 또 더 이상 나중이라는 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을 소중하게 산다면 그런 건 없어 질거란 느낌이 든다. 사람들에게 듣고 처음으로 깨닫는 것도 아주 많을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탐구를 계속하고 싶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코스를 받게 하고 싶다고 느꼈다. 

『인생을 알기 위한 코스』

  「사람, 그 자체, 사람의 본체란?」 

                                                                                                                         요시오카 쇼이치로

  인생을 안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자기 속에서 머리(의식)와 마음의 조화라고 답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커지게 되는 것이 사고나 생각은 아니고, 마음 쪽에 중점을 둔, 어떤 것인가라는 관심이 향했다. 머리와 마음이 연동해있는 상태. 인간의 본래 상태처럼도 생각했다. 인생을 아는 것을 통해 그렇게 되어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

머리가 마음 쪽으로 눈이 향하지 않는 요인은 몇 개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인식방식 ‘인간관’이 실제의 인간 모습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코스 속에서 사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검토해가자, 드러난 것, 나중에 붙은 것을 사람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현재 상태의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언동 쪽을 보고 어떠한 사람이다. 감정이 나오면 그것을 보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라고 하거나, 자신의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해 그런 부분의 관점이 커지도록 생각한다. 자신에게 대해서도 같다. 그것은 그 사람 자체는 아니고, 그 사람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고, 후천적으로 붙은 것을 무자각으로 그 사람이라고 하는 상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사람 그 자체와 드러난 것이나 붙었던 것과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상태처럼도 생각한다.

  그러한 현상의 자기 상태가 떠오르는 한편으로, 사람 그 자체, 사람의 본체란 무엇인가, 라고 탐색해 가는 가운데 마음, 좀 더 말하면 마음의 진정한 성질의 본심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체처럼 생각되었다. 또 진짜 마음이 구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 만족하는 것은? 이라고 조사해 가는 사이에, 본심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안에서 조금씩 떠올라왔던 것 같다.

  마음이 정말 구하고 있는 것은 무작위는 아니고, 방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가와 크게 관계하는 것 같다. 또 인간의 행복한 모습을 살아 있다는 시점에서 보면, 인간답게 성장해가고 인간답게 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욕구는 시점을 바꾸면, 충족되어져 성장해 가려고 하는 작용같다고 생각했다. 지성도 역시 인간이라면 배우고 있는 요소로, 지적욕구가 충족되는 것에 의해서 마음도 만족하고, 마음이 만족하는 것에 따라 지성도 성장해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음과 지성도 혼자서 성장해가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닌, 사람들 속에서 채워져 사람의 사람됨이 자라나는 것 같다. 마음 속에서 마음이 자라나고 지성 속에서 지성도 자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혼자서 만족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함께 기쁘게 채워져 성장해 가려고 하는 것 같다.

  인생에서 하려고 하는 것을 말로 하면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든다. 사람의 본심을 아는 것이 간단하게는 표현할 수 없지만, 사람에 있어서 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본심을 혼자서 알려고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본심에 중점을 둔 환경(사람들) 속에서는 본심을 알아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그러한 일상을 실천해 보고 싶다. (2018년 1월)

『사람을 듣기 위한 코스』

  「 ‘사람을 듣는 것’에는 에너지가 필요없다」

                                                                                                                            미노와 레이세이

  ‘사람을 듣다’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 꽤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사람을 듣는다는 에너지 쓰지 않아도 되는걸까...  ‘남의 말을 들으세요’라고 들으면 ‘한다’라든가 ‘대답한다’가 달라붙어 있다. 어릴 때는 듣는다는 것이 애초부터 ‘하다’, ‘대답하다’가 꽤 붙어있지 않을까? 예컨데, 아이에게 말을 걸었는데 대답 없어서 그냥 멍하게 있을 때가 있었다. 지금까지 듣는다는 것은 이해하고 알때까지 가지 않으면 듣지 않는 것이 된다...아마 실제로는 상대는 알지 못해도, 자신의 의식에서 터무니없이 말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경험을 회전시켜 결론짓는 것이 ‘괜찮게’ 된다. 특히 ‘듣다 = 하다’가 몸에 배어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오노 씨가 ‘지금부터 일어서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노래해 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나의 움직임은 무릎 위에 있던 화이트 보드를 내리고 있었다. 쭉 말을 이해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말과 상대가 결합되어 있어 한층 더 그 결합된 것을 자신의 머리의 믹서에 탁 넣어 윙 해서 최종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기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말이라는 것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실감은 무엇일까... 말이 나올 때까지의 배경이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구나...  발해지는 말 =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 = 상대. ‘우메보시의 맛을 우메보시를 먹어 본 적이 없는 브라질 사람에게 설명해 주세요’. 표현은 말로 ‘짜다’ ‘시다’ 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의 것은 말할 수 없고 설령 말했다고 해도 자신이 느낀 것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언어사전을 늘리면 늘수록 이해하고 그리고 들을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해 왔다. 

  본래의 듣기가 실현되어 사랑(마음을 받는다)을 향하면 인간은 한없는 에너지가 있어서 자발적으로 뭔가 하고 싶어진다.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는 현재의 사회는 어떨까? 듣기와 하기를 결부시키고 말과 그 사람을 결부시켜서 말로 컨트롤할 수 있게 조련되는 가축 취급이지 인간이 아니다. 자신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작업을 어려서부터 한다니 흥미롭다. 더구나 사회 전체에서.

  그리고 ‘야단맞았어’, ‘나 지적받았어’가 되는 모든 복합작용이 듣는 것을 내가 인식하는 방식에서부터 오는구나. 실제는 그 사람 안의 세계를 말하는 거고, 오히려 그것 밖에는 말할 수 없달까....이것을 알 수 있으면 어지간히 해방될 거야~ 결국은 자각이라는 점, 자신의 사고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으로부터. 자각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다가와 보인다.

  말이라는 것은 들으면서 똑같은 대상을 말하고 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에 애초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전제를 보기가 어렵다. 사고 자체를 말로 행하고 있기 때문일까. 상대도 똑같은 단어를 말하고 있다든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쪽으로 의식이 빠지게 된다.

  내관이라면 과거의 것이라든가 떠오르는 실감이 엷어진 상태에서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알기 쉽고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라는 것에 까지 자연스레 흥미가 가는데, 리얼타임이라면 파악하고 있는 세계와 말들을 지나치게 실감해서 그 사람의 내면 쪽으로는 감각이 가지 않는 것이 현재의 상태다. 꽤나 자신의 인식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사람을 듣는다’는 상당히 어렵겠구나. 그런 반면에 관심이 있기만 하면 괜찮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사람 본래의 연결되고 싶다는 본심이라는 녀석에 몸을 맡길 뿐.

사람을 듣는 것에 의지는 필요없다. 원래부터 있으니.

일상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지 관찰이 기대됨.

여러 관점을 얻었으니까. (2018년 3월)

  올해 들어 ‘마이라이프 세미나’를 수강한 사람들 가운데서 잇달아 ‘사이엔즈 스쿨’의 코스를 생활의 기둥으로 삼아서 이제부터 자신이나 사회를 그려가고 싶다라며 스즈카로 사이엔즈 유학을 오는 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사이엔즈 연구소, 사이엔즈 스쿨을 저희들 스스로 창설하는 중이다. 15년째를 맞이한 애즈원 커뮤니티 스즈카도 사이엔즈 스쿨 스탭 양성 코스도 시작하고, 드디어 ‘사이엔즈’에 기반한 사회의 실현으로 나아갔구나 느끼는 요즘이다.

맺음말

사람은 왜 싸울까?

  사람은 왜 싸울까? 아마도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조금 지혜가 생긴 아이는 싸움에 대해 주의를 들으면, ‘○○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라고 할 때가 있다. 그 말의 숨은 뜻은, ‘나는 싸움 따위 하고싶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경우와 나라와 나라의 경우는 다를지 모르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싸움도 ‘상대가 이런 것을 해왔기 때문에’라든지 경우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상대방이 공격해 와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말 뒤에는 역시 ‘진심은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이라는 것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어떻게 된 걸까? 자, 본심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진짜의 본심은 상대방과, 나라이면 그 나라와는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싸우고 싶지 않다면 싸우지 않고, 그 진심이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모을 수는 없을까. 사람이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일까. 사람은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기 때는 부모나 주위의 모든 것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안심하고 자란다. 언제부터 싸울 마음이 몸에 배이는 걸까. 인류도 탄생 그 때부터, 서로 싸우며 살아왔을지 어떨지. 지금을 기점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원전 몇 천년 전부터 싸웠던 흔적이 있다. 그 전에는 어땠을까? 싸우지 않고도 생활했던 흔적은 없을까? 사람의 탄생으로부터 그 과정 중에 싸우는 것이 없다면, 인류가 탄생으로부터 싸움이 당연시되던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언가의 계기라든지, 무언가의 과정에서, 싸움이라든지,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든지, 결국에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죽이는 습관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바라고 있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거듭하고 있는 중에, 그것이 어디선가, ‘그런 거(당연한 거)’로 되어 온 거 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바라지 않는 것은, (즉) 몇 년이나 계속되어 왔다고 해도, 인간, 인간 자신의 지혜로 다툼 없이 누구나 안심하고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생명의 탄생으로 지금의 인간세계를 본다면, 인간의 역사는 아주 적은 시간으로도 볼 수 있어서, 지금이 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없겠지요. 

  그런 생각하면서 최근 수 년 TV 뉴스 등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뭔가 지금도 이웃 나라가 일본으로 공격해 와서 일본은 거기에 대처하지 않으면 나라가, 국민이 안전하지 않다, 같은 위기감이 들끓어 온다. 매우 위화감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점점), 전쟁이 가능한, 즉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 만약 싫다고 한다면, ‘비국민’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 같은 사회로 향하고 있는 느낌이다. 현재 일본의 헌법은 ‘싸우지 않고 누구나가 안심하고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해 가기 위해 적어도 나라와 나라의 분쟁으로 전쟁은 하지 않고,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서라도 무력은 가지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싸우지 않는 세계를 향한 귀중한 한 걸음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나 자신의 말로 한다면, 어떤 사태가 되어도 ‘인간은 죽이고 싶지 않고, 죽임 당하고 싶지도 않다.’ 헌법의 반전(비전)은 나의 맹세이기도 하다.

  요사이 인터넷에서 오키나와의 오나가 현지사가 해외특파원협회의 기자회견에서, 오키나와의 크고 작은 섬들은 일본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잇는, 평화의 완충지역으로 해 가고 싶다’라고 하는 구상을 말했다. 전해오는 게 있었다. 단지 헤노코(변야고) 신기지 반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품격이 있는 미일 동맹’이라고 하는 ‘말’도 몇 번인가 들었다.

  싸움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국경이 없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격에 맞지 않지만, 존 레논의 ‘이매진’의 세계이고, 그것은 머지않아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오키나와에서 먼저 나타날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일본 본토에서 모두 받아들이고 싶다. 미일의 지위협정도 오키나와로부터 떼어 내 그 모든것을 일본 본토에서 맡는 것은 어떨까. 거기서부터 ‘싸움 없는 세계’의 실현을 모색하고 싶다. 오늘 아침은 장마가 갠 사이. 그래서 한 구절.

  아삭아삭 반전의 맹세 오이를 먹다.

                                                                                                                           2015년 6월 현재

편집후기

  오늘날 세상에서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고, 지구가 둥근 것은 온갖 과학적 정보로부터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한 ‘틀림없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뜻밖에도 많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히 학교나 양친에게서 배웠던 것, 들었던 것이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음’이라고 하는 확신으로 사람은 움직이고 사회는 성립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본서를 다 읽은 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다툼부터 커다란 다툼의 대부분의 원인은, 그러한 ‘틀림없음’의 입장에서, 당신이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편집하고 있는 현재는, 전후 70년으로, 가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세상이 되어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가집니다. 그리고 정부나 이웃나라에 대해서도 반대나 이의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하는 강한 염원의 표현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툼의 불씨가 늘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사이엔즈’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지혜의 사용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오래되지 않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다툼없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있는 그 과정으로 생겨났던, 새로운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본서를 읽고, 흥미를 가진 분은, 사이엔즈스쿨의 사이엔즈를 알기 위한 교육과정에 참가하면 보다 이해가 깊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애즈원 커뮤니티 스즈카’는, 2000년부터 ‘사이엔즈’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기초로 해서 삶을 실험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본서 제2부를 읽으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 커뮤니티 사람에 접하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러한 분을 위해서 ‘애즈원 커뮤니티 탐방DAY’라고 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참가 등의 자세한 사항은 권말 자료를 보아주십시오. 이번에도 많은 분들의 협력으로 어떻게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5년 여름 PIASS NETWORK편집부 

제2판 간행에 있어서

『사이언즈5호』는 2015년 8월에 「사이언즈 입문서」로 간행되었습니다. ‘사이언즈’를 아는 최초의 계기의 책이기도 하고 또 ‘사이언즈’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적인 역할도 있어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습니다. 이번 제2판에서는 현재 사이어즈네트워크 활동 중에서 명칭이 변한 게 있기도 합니다만, 본문에서는 그당시대로 했습니다.명칭 변경된 것이나 새로 발족한 것도 있는데, 현재 다음과 같은 명칭으로 되었습니다.

애즈원커뮤니티 스즈카 → 애즈원네트워크 스즈카커뮤니티

커뮤니티 오피스→ 커뮤니티 HUB (허브)

PIESS NETWORK →애즈원네트워크

마이라이프 세미나 →2017년 1월부터 애즈원 세미나

사이언즈 연구회 →애즈원 미팅

마이라프 미팅 →애즈원 미팅

사이언즈 유학 → 2018년 4월부터 사이언즈 아카데미가 개강함

에즈원커뮤니티 탐방DAY → 2018년 3월부터 애즈원 스터디투어

이상, 기본적으로 제1판 내용을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만, 「제2부, 사이언즈가 있는 삶」가운데 소개하고있는 사이언즈스쿨 참가자의 감상문 3편은 최신 것으로 맞추어 바꿨습니다.

                                                                                                  2018년 5월 애즈원네트워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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