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왕각서 후기

느티나무
2021-11-02 22:29
355

등왕각서-비운의 천재가 남긴 글

  저번 주에 읽은 귀거래사와 오류선생전이 은자(隱者)의 삶에 관한 글이었다면 이번 주 글 ‘등왕각서’는 입신양면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젊은 천재의 호기(豪氣)가 넘치는 글이다. 이 글을 지은 왕발은 당나라 초기의 인물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고종에게 발탁되어 박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의 아들이 투계를 좋아하자 이를 풍자하여 ‘격영왕계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고종이 이에 노하여 관직을 박탈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23세였다. 그 후 임지(任地)에 있는 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길에 등왕각에서 열린 도독 염백서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천재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 글이 바로 ‘등왕각서’이다.

  ‘등왕각서’는 인용의 지뢰밭이다. 온갖 인물들과 그 인물에 얽힌 사건들과 그로 인해 생겨난 고사들이 한 줄 건너 하나씩 등장할 정도다. 인물을 모르고 고사를 모르니 글자를 찾아 해석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게 모지?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런 건 다 알아듣고 훌륭한 글이요, “천재로다”라고 칭찬을 했을까?

   예전 <낭송 춘향전>을 읽을 때였다. 서민들 사이에서 구전된 이야기라기엔 고사성어와 비유된 인물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예사롭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양반들에 의해 각색된 것이 아닐까 잔뜩 의심했었다. 그런데 길진숙 샘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에겐 이런 고사성어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누구나 다 아는 그래서 일상에서 인용되는 말들이었다고 했다. 단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왕발의 이 휘황찬란한 비유들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능한 것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이 화려한 글은 말미에 염백서를 향해 입신양면을 위해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씨(謝氏) 집안의 보배로운 나무는 아니지만 맹씨(孟氏)의 아름다운 이웃을 접하였네. 훗날에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다가 외람되이 어버이 모시고 리(鯉)-공자의 아들-처럼 대답할 것이고, 오늘 아침 옷소매 받잡고 예를 갖추어 용문에 의탁함을 기뻐하네.“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나마 내가 아는 그 맹씨와 공씨의 아들이 나오니 반가웠다. 하지만 만약 이때 공자님이 왕발을 만났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나는 이래서 말 잘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살의 나이에 이런 글을 지은 천재는 그 외의 별다른 기록이 없다. 여기저기를 뒤져보니 26의 나이에 역시 아버지의 임지를 찾아가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니 왠지 ‘등왕각서’의 글들이 그리고 그의 시가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서 있는데,

패옥(佩玉) 소리와 수레 방울 울리던 곳에 가무가 그쳤네.

단청한 마룻대는 아침에 남포의 구름 속에 나는 듯하고,

붉은 주렴은 저녁에 서산의 빗속에 걷히네.

한가로운 구름과 못 그림자 날로 유유하니,

풍물이 바뀌고 별이 옮긴 것이 몇 해나 지났던가.

누각 안의 제자(帝子)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난간 밖의 장강만 속절없이 스스로 흐르네.

 

댓글 3
  • 2021-11-03 15:51

    이번에 <북산이문>과 <등왕각서>를 읽으면서 사육변려체의 맛을 좀 본 것 같아요.

    이사의 <간진황축객서>도 변려문에 가깝다고 하는군요.

     

    변려문의 특징으로 이하 다섯 가지를 드네요. (아래 다섯가지는 인터넷에서 찾은 겁니다.)

    첫째는 대구를 존중했다. 이것은 한문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특별히 대구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둘째는 넉 자 또는 여섯 자의 구(句)를 많이 쓴다. 한문에는 원래 넉 자·여섯 자로 된 구가 많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의식적으로 이것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셋째는 평측(平仄)과 압운(押韻)을 존중한다.

    넷째는 음조의 아름다움을 살린다.

    다섯째는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 사용을 존중한다.

    이렇게 해서 화려한 미문의식을 높이는 것이 변려문의 총체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변려문은 형식미를 추구하는 스타일리시한 글이어서 웬만한 문장가 아니면 아무나 잘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운동으로 등장하는 한유나 유종원의 글 같은 것이 쓰기 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래도 우리가 읽기엔 훨씬 담백한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 2021-11-03 17:33

    제대로 예습도 못하고 듣기만 했던 제 입장에선 한유가 참 고맙습니다^^

  • 2021-11-25 05:37

    등왕각서는 인용의 지뢰밭이라는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너무 읽기 어려웠어요 ㅠㅠ.

    요요쌤 덕분에 변려문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하고 알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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