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냐 충신이냐-이밀의 진정표

인디언
2021-10-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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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표(陳情表)는 제갈량의 출사표, 한유의 제십이랑문과 더불어 중국 3대 명문에 속한다고 한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이밀이 쓴 진정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출사표를 읽고 감정이 북받치지는 않는데 진정표는 마음이 울컥했다. 사람은 못되고 효자는 가능한 이상한 인간? ㅋㅋㅋ

이밀은 촉한출신으로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어머니가 재가하여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서진 무제(사마염)가 관직에 나오라고 하자 96세 조모를 봉양해야 하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갈 수 없음을 구구절절 아뢰는 내용이다.

마음을 움직인 표현들은

이밀이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아홉살까지 걷지도 못했는데 할머니 유씨가 고아가 된 어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몸소 어루만져 키워주셨다(躬親撫養)' 는 대목,

몹시 외로운 처지에서 조모와 손자가 '홀로서서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위로하며 지낸다(焭焭孑立 形影相吊)'는 대목,

황제가 특별히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이 집에 찾아와 재촉하자 '조서를 받들어 달려가자니 조모 유씨의 병이 위독하고 구차히 사사로운 정을 따르자니 호소를 허락하지 않으니 자신의 진퇴가 실로 낭패입니다(臣欲奉詔奔馳則以劉病日篤 欲苟順私情則告訴不許 臣之進退實爲狼狽)'라고 한 대목,

자신이 젊어서 섬긴 촉한을 위조라고 하며 자신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 벼슬과 영달을 도모하지 않는다거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대목(臣少事僞朝 歷職郞署 本圖宦達不矜名節)

'신은 조모가 없었다면 오늘날에 이를 수가 없었고 조모는 신이 없다면 남은 시간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臣無祖母無以至今日 祖母無臣無以終餘年)'는 대목과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교대로 서로의 목숨을 위했으니 이 때문에 제가 폐하고 멀리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母孫二人更相爲命 是以區區不能廢遠)'라는 대목에 이르면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96세 조모와 44세 손자. 이밀은 까마귀의 보은까지 언급하며 자신이 폐하께 절개를 다할 날은 길고, 조모유씨에게 보답할 날은 짧으니 끝까지 봉양하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효를 강조한 서진의 황제는 이밀이 불사이군(不事二君) 때문에 관직에 안 나갈 수도 있을거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지극한 효자인 이밀을 결국 등용하고, 조모를 위해서 돌봐줄 사람 두명과 옷, 식량 등을 계속 제공했다고 한다.

한문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도 문장을 읽으며 마음이 뭉클하니 옛사람들은 울고도 남았을 것같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다시 읽는 진정표가 더욱 아련하다

 

 

댓글 3
  • 2021-10-19 03:34

    후기로만으로도 샘이 울컥하신 기분을 알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1-10-19 07:40

    焭焭孑立 形影相吊

    돌봐줄 이 없는 외로운 손주와 할머니의 관계만이 아니라

    각자도생하여 살라는 시대, 우리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요.

    누구와 그림자하여 서로 위로하며 살까..

    충신도 효자도 아니라서 그런지.. 문득 산다는 게 서로에게 기꺼이 그림자가 되어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아닌가 싶네요.ㅎㅎ 

  • 2021-11-28 19:06

    후기 읽다 코끝이 찡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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