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고명편2> '왕'이 죽을 때

자작나무
2021-06-11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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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활약하는(?) 장면이 두어셋 있다. 유비는 자신의 근거지를 찾아 동분서주하는데, 어느 때는 뒷문으로 도망가고, 어느 때는 개선장군처럼 듬직하고, 또 어느 때는 이게 뭐야 싶다가도 또 어느 때는 유덕자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악당(소설 속에서는) 조조에 비해서 개성이 없어 보이는 유비였다. 

 

그런데 유비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곳이 있으니, 그건 그의 임종이다. 익주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전쟁에 패한 그는 병을 얻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 제갈공명과 이엄을 '고명대신'으로 부른다(<서경 고명>편의 '고명'이 그 출전이다). 이들은 조정에서 가장 힘있는 자들이다. 유비는 고명을 내리면서 제갈공명에게 아들 유선이 임금노릇할 그릇이 아니라면 제갈공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제갈공명은 온몸의 피가 솟구치고, 땀이 삐질삐질 난다. 누군가는 덕있는 자 유비의 진심이라고도 하지만, 현장에서 그 말을 들은 제갈공명은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이다. 당시 조정에서 힘을 갖고 있는, 어쩌면 앞으로의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이엄이 보고 있다. 물론 유비도 아직 죽지 않은 상태이기에 제갈공명의 답 한마디와 표정 및 얼굴색에서 그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기민한 제갈공명이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이마를 땅에 박으면서, 간이 터지고 신장이 터질 때까지 충성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렇게 유비는 유선의 내부의 적이 될지도 모를 제갈공명을 굴복(?)시키고, 아들의 듬직한 후원자로 만들어주고 죽는 것이다. 

 

유비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왕의 죽음이다. 왕이 죽는다는 건 뭐였을까. 왕은 천지 가운데의 영명한 인간으로 음양을 다스리고, 백성을 돌볼 뿐만 아니라, 왕조의 운명이 영원토록 이어지도록 기원한다. 그렇기에 후계자 문제는 중요하다. 아직은 어린 후계자왕이다. 정치적으로도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데 주위에는 정치9단의 노회한 신하들이 있고, 때로는 외척세력들이나 민란에 이르기까지 어린왕이 왕으로서 제몫을 하기까지 가야할 길이 멀다. 어쩌면 왕은 어린왕과 왕조의 앞날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죽을 때까지 안배를 잘 해줘야 한다. 그렇게 왕의 고명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연출되는 것이다. 

 

<삼국지연의> 속 혹은 다른 왕조 속의 왕들의 죽음이 참조하는 것은 <서경 고명>편이다. 고명을 내리는 드라마 장면은 이렇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 아는 왕은 대신들을 부른다. 물론 그들과 마주하기 전에 먼저 "물로 손을 씻고 얼굴을 씻는다." 그러면 옆에서 부축하는 자가 그에게 면복을 입혀주고, 왕은 옥궤에 기대어서 대신들과 마주한다. 물론 왕의 침실 내 침대 주위에는 휘장이 쳐져 있기에, 병약해진 왕의 모습은 희미하게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고명을 내리는 목소리는 젖먹던 힘이라도 다 짜내서 짐짓 힘있게 울렸을 지도 모른다. 그래야 왕은 죽음으로써 대신들의 충성을 받아낼 수 있고 왕조의 운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은 참 죽을 때까지 말 그대로 죽음 그 순간까지도 힘겹게 산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댓글 1
  • 2021-06-11 09:07

    오호! 유비는 정말 재미있는 인물이군요.^^

    자작님의 후기를 읽으니 왕의 두 신체 생각이 나네요.

    왕에게는 '자연인으로서의 신체'와 '법적, 정치적 신체'의 두 신체가 있고,

    주권은 태어나고 죽기도 하는 자연인 왕이 아니라 영속하는 왕의 법적 정치적 신체에 있다는 칸트로비치의  주장 말이에요.

    국가라는 것은 주권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데, 주권이라는 것이 사실은 법 밖의 초월적인 것이니

    왕이 생물학적으로 죽는다 해도 주권자로서의 왕은 죽지 않는 것이겠지요?

    중세영국의 왕을 분석하면서 나온 이야기라는데.. 중세시대나 절대왕정에만 해당되는 거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근대국민국가의 주권 역시 법밖에 있으면서 법을 정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서경의 <고명>도 결국 주나라의 주권의 존속과 관련한 법적이고 정치적인 장치가 정착되어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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