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철학학교] 계몽・공리・자유주의 후기

정군
2021-04-13 00:01
584

 

이번에 발제를 맡은 부분은 제가 평소에도 관심이 많은 부분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세미나 중에 잠깐 말씀드린 ‘계몽의 시대가 끝난 것 같다’는 말씀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었고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언제 시작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17-18세기 어디쯤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른바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도 그렇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산업혁명’도 그렇고, 역사가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관념도 그렇고, 그 모든 진보의 토대에 ‘지식’있다는 관념도 그렇고 오늘날의 ‘상식’ 대부분이, 어쩌면 ‘감각’ 방식까지도 그 무렵에 태어나지 않은 걸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오늘 우리 세미나가 ‘활기’ 있게 진행되었다면,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미 ‘상식’이 되어서 어느 정도 모호하게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후루룩 올라왔던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하나로 묶어 ‘계몽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담론이 서서히 생명력을 다 해 간다는 것도 ‘이미’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와 관련하여, 질문으로 나왔던 ‘개인’ 개념의 문제도 오늘날에 와서는 아예 새로운 토대에서 새로 사유해 볼 수 있는 요소가 꽤 많습니다. 개인은 정말 분리불가능한 단일한 주체인가라는 질문부터, 좀 더 좁게는 계몽주의적 주체로서 ‘개인’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까지, 거기서 나아가 오늘날에는 그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는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또, 그 ‘조건’이 해체되었다면 다른 ‘주체성’을 이야기해야 할 시점인 것인가, 아니면 아예 ‘주체’라는 개념마저도 ‘역사’로 보내버려야 하는가 같은 질문으로까지 이어가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루소가, ‘자연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자연으로 고스란히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문명적 자유‘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도, 더는 ‘공동체에서 덕을 발휘하는 인간’의 개념이 작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3, 4세기 전에 계몽주의자들이 풀어야 했던 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풀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어쩌면 이게 ‘철학사’를 공부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시대를 ‘역사적 맥락’ 안에 끌고 들어와 파악하는 것 말입니다. 그건 어떻게 살아도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떻게든 ‘질서’를 부여해서 파악해 보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흔히 ‘혐오의 시대’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세미나에서도 말했다시피 ‘자유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 북반구의 여러 나라들에서 당연히 따라야할 ‘규범’이었습니다. 거기엔 ‘방임주의’라는 야만의 얼굴과 ‘관용주의’라는 휴머니즘의 얼굴이 함께 엮여있고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떤 국가도 ‘방임’에만 모든 걸 맡겨 두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어떤 ‘원리’의 차원 속에는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또 ‘관용’의 가치는 한쪽에선 ‘야만’을 가리는 베일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또 한쪽에서는 ‘혐오의 권리’를 억압하는 기제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통탄할 노릇’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또는 ‘관용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수준에서 보아야할 문제를 넘어서, 어쩌면 이전과는 다른 원리를 필요로 한다는 (국가와 법률을 넘어서는 강제성과 힘의) ‘요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회를 유기체로 보는 버크의 논의나 소규모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루소의 논의에서 ‘신선함’을 느꼈다면, 우리 시대의 노쇠함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결국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세미나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철학’은 여러 학문들이 태어난 장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 남은 게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건, 이 질문이 살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유주의 다음의 지배적인 규범은 무엇인가’ 같은 커다란 질문들의 바탕에 놓여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이 질문은 바로 현재를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로, 더 먼 미래로 향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한 어떻게든 제기되는 질문인 셈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잘 답하고자 공부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알아야할 게 너무 많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더, 더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마 ‘계몽주의 시대’의 인간이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

댓글 5
  • 2021-04-13 16:30

    와, 빠르기만 한게 아니라 웅장한 후기로군요. 막 감동이 밀려올 것 같아요 ㅎ

     

    혼자 읽고 나서는 늘 뭔가 어수선한데 샘들의 발제문을 읽으며 한 번, 세미나에서 다른 분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또 한 번 새롭게 정리가 되곤 합니다. 어제 세미나에서 저는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오래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는 어디서 주워들은 (아무래도 학교였겠지요?) '사회계약론'이라는 말에 꽂혔었어요. 그냥 그 용어만 듣고 혼자 아, 지금 내가 보는 사회의 모습과 제도가 우리 구성원들의 어떤 합의에 의해 작동하는 것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게 역사적인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 사회의 단순한 수동적인 구성원이 아니고, 어떤 합의에 자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지금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부당한 일에는 의견을 낼 수 있는 한 구성원이라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아요. 어디서 주워듣고 내 마음대로 상상한 이 개념이 로크 건지 루소 건지 찾아보지도 못했지만 (동네 서점에 사러갔더니 여기 있지도 않지만 어차피 니가 읽을 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뒤로 하고 나온 기억이 ㅎㅎ) 그런 생각이 제게 묘한 힘을 주었던 것이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철학사를 읽으면서 각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상상해보는데, 정작 내가 사는 이 시대의 공기는 내가 이 안에 있기 때문에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 이것은 제게 어떤 중립지대였던 것 같아요. 이 공기를 기본으로 삼고 다른 시대를 상상하고 있었던... 그런데  이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며 내가 사는 시대를 아주 조금은 뒤로 물러서서 다르게 다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은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랄까요. 

     

    + 세미나 도중에 용어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저도 궁금해서 찾아보니 '계몽된 자기 이익'은 영어로는 enlightened self-interest로  정군샘 말씀대로 자주 쓰이는 표현 같습니다. 우리 책에서는 홉스에 딸려서 나왔지만 애덤 스미스의 이론으로 자주 설명되는 듯해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또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liberty와 freedom의 차이점은... 사실 어원적인 차이가 있을 뿐 내용상 큰 차이가 있진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freedom을 노예 해방 맥락에서 자주 쓰긴 하지만) liberty는 외적인 제도로부터의 자유, freedom은 내면적인 자유(내가 심지어 노예로 살아도 내 정신의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 할 때의 자유)를 더 의미하는 듯합니다. 우리 책에 liberty가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원상 liberty가 라틴어에서 왔고 저자들의 언어에서 자유가 같은 어원을 두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 2021-04-14 12:08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 댓글이 더 웅장한 것 같은디요 ㅎㅎㅎ

      말씀을 듣고 보니 아예 '사회계약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해도 좋을 듯 합니다. 홉스, 로크, 루소, 스피노자가 쓴 사회계약론에 관한 저작들을 읽어보는 것이지요. 

      아.... 재미있을 듯 합니다.(이건은 제가 따로 메모를 해두겠어요)

       

      '+'로 말씀해주신 liberty-freedom은 의미상 큰 차이가 없더라도, 어쩌면 그 '차이없음'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liberty가 라틴어-지식계급의 언어로부터 왔고, freedom이 독어 frei로부터 온 어휘라면, 실제 의미가 같을지라도 역사적으로 구성된 용법, 주로 사용된 계급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거든요. 이걸 주제로 『자유liberty와 자유freedom 사이』 같은 저작까지 상상해 보게 됩니다 ㅎㅎ. 

  • 2021-04-14 16:27

    자유주의의 기원을 탐색하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로운 것 같아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도 19세기 자유주의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책은 고전정치경제학과 자유주의를 관계를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어요.

    칼 폴라니를 읽을 때 하나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 시대의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 종횡으로 분석하는 것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는데(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잊었습니다만ㅋ)

    이번에는 철학사 속에서 자유주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홉스로부터 자유주의가 시작된다는 진술은 출발부터 매우 정치학적이라고 느끼기도 했고요.

    역시 경제학보다는 정치학이 철학과 더 가깝구나, 실없이 그런 생각도 했구요.^^

    게다가 저는 언젠가 <녹색평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아주 우호적으로 이야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읽을 때 속으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물음표를 하나 찍어놓았었죠.

    그래서 그런지 '사회자유주의'라는 말로 J.S.밀을 설명하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음.. 정군님과 호수님이 주고받는 내용을 읽고 나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여기까지 쓰고나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하나.^^

    공부내용과 관련한 학구적인 후기도 좋지만.. 세미나도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데.. 아무리 줌 세미나라 해도

    사사로운 이야기도 가볍게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뒤풀이 같은 것도 하고 싶네요.

    좋은 아이디어 없으신가요?

    • 2021-04-14 19:59

      정말 그러게 말입니다. 뒤풀이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 세미나 끝나고 이어서 하면 너무 늦어지게 되고....(저는 괜찮습니다만)

      따로 날을 잡아서 하자니 일정이 어떻게 될지...ㅠ 일단 하루를 잡아보고 안 되면 날짜를 둘로 나눠서 시간 되시는 분은 줌에 접속하시면 어떨까요.

      각자 음료와 다과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도란도란... ㅎㅎㅎ 

  • 2021-04-18 01:40

    같은 날이건 따로 날을 잡건 괜찮습니다. 바쁜 티를 내는 저지만 오히려 공부와 세미나가 더 많은 다른 샘들이 가능하실지 모르겠네요... 공부가 읽어서 되는 것도 있지만 같이 먹어서 느는 것도 있는데... 작년과 올해는 이래저래 영 모양이 안나고 힘이 안나네요... 뒷풀이와는 별도로 네 명 모이면 밥이라도  한 끼 먹으면 좋으련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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