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철학학교Q&A②] ‘철학사 공부’는 왜 하는 걸까?

정군
2021-02-02 00:29
1772

안녕하세요.

철학학교 1학기 ‘서양철학사’ 튜터를 ‘맡아 버린’ 정군입니다.

저는 철학도 철학이지만 ‘철학사’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합니다. 이상하죠. 거기엔 눈물이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딱히 심금을 울리지도 않는, 흠, 그러니까 듣다보면 ‘자업자득이로군’이라는 반응을 절로 이끌어 낼만한 시시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런 ‘시시한 사연’이 뭐 중요하냐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연’이 있어야 ‘메시지’에 ‘정합성’이 생깁니다.(그 사연은 내일 올라올 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철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자체로 이미 거대한 ‘사연(유) 모음집’ 같은 것이지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알아보는데 ‘철학사’ 공부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거지’하는 의문이 들 때, ‘서양철학사’를 들춰보면 어딘가에 그러한 ‘사고방식’의 기원이 되는 사유(철학담론)가 대개는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문탁 네트워크의 실체가 뭐지’라고 물을 때 그 ‘실체’의 개념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데카르트에서부터 저 멀리 탈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볼 수 있는 개념이지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잘만 하면 내 사고와 개념어, 특수한 일상어들의 기원을 비교적 정합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원활하게 되면, 당연히 ‘변형’도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철학자들은 이 ‘변형’의 달인들입니다. 들뢰즈가 어떻게 ‘수동적 종합’을 떠올렸을 것이며, 데리다가 어떻게 ‘차연’ 개념을 덜컥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맥락’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의 능력이야말로 ‘철학’을 실용학문으로 만드는 핵심 기술입니다.

어쨌든, ‘철학사’를 공부하면 정말이지 다양하고, 오래된 온갖 형태의 ‘사고방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그 범위 안에서 사고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공부해 온 철학자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앞으로 공부할 철학들이 어떤 사고방식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정답은 바로 ‘철학사 공부’입니다. 철학 공부 계속 하실 거잖아요? 그렇죠? 네? 들리시나요? 네? 여보세요? (흠흠, 조금 흥분했네요) 그러니까, ‘실체’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데카르트, 스피노자를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그들 이전에 ‘실체’ 개념이 어떤 변화를 거쳐 거기까지 왔는지 모르면 그들이 어떻게, 어떤 사유의 매커니즘을 통해 이전 시대의 ‘실체’ 개념들을 변형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철학사’ 곳곳에 그런 변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개념의 진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개념들은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요?

을  공동체에게 특식은 없다는 말이 있습……, 아닙니다. 안 웃기네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철학사 공부’는 ‘사고방식’의 변형을 탐사하는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사’가 ‘변형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했을 때 중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 발상이고, 이 ‘만물의 근원’은 어느 때엔 ‘신’, 어느 때엔 ‘절대정신’, 어느 때엔 와서는 ‘기관없는신체’가 됩니다. 그것은 수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납니다. 그걸 다루는 철학의 분과가 바로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보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게 ‘인식론’이죠. 이러 저러하게 인식을 한다고 인식론을 정교하게 다듬어 놓고 보니, ‘아니 그런데 우리는 그 대단한 걸 인식하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구질구질한거야?’하는 의문이 생기죠. 그렇게 ‘윤리학’이 나오게 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을 지탱하는 세 기둥이 그렇게 태어납니다. ‘철학사’는 이 각각의 분과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진행됩니다. 거기서 뺄 것 빼고 남길 것 남겨서 양념치고 볶아서 끓여낸 게 바로 ‘서양철학사’라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제목이 붙은 책이지요.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이 사실, 증말 지루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원전’을 앞에 놓고 어질어질한 현기증 체험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 세미나’를 한다고 치면, 3대 비판서를 열심히 읽기는 하지만 ‘칸트가 내기 당구로 학비를 벌었다드라’ 이런 이야기는 잘 안 하지 않습니까? ‘서양철학사’에서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리고 한 챕터 넘어갈 때마다 그 시대에 딸린 원전, 참고도서 등도 한 보따리씩 나오게 될 겁니다.(제가 지금 그것들을 찾아서 목록으로 만드는 중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평생 무슨 책을 읽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공부는 앞으로 도래할 모든 공부들의 튼튼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와, 진짜 너무 매력적이져?) 네? 들리시나요? 네? 거기 계세요?

 

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

댓글 7
  • 2021-02-02 08:30

    ㅋㅋㅋㅋㅋㅋㅋㅋ
    서양철학사 공부가 확 땡기는~~
    앞으로의 정군님이 써 주실 연재글과 후기 기타 등등이 엄청 기대되는~~

    글구 "개념을 잊은 공동체에게 특식은 없다"...이건 내 언젠가 써먹으리라~~

  • 2021-02-02 09:42

    와! 정말로 읽는 것만으로도 아주 영양가 있어요.
    저는 천개의 고원을 읽으며 엄청 좌절했는데(그 경험을 겪고 나니 어떤 어려운 책을 읽어도 별로 좌절하지 않는 맷집이 생겼지요ㅋㅋ)
    들뢰즈가 철학사에 등장시킨 신개념 '기관없는 신체'가 '만물의 근원'과 관련되었다는 정군님의 이야기에
    또한번 뒤통수맞은 느낌이군요.(난 대체 뭘 이해한거야?^^)
    칸트가 당구로 학비를 벌었다는 이야기 같은 걸 나눌 수 있는 서양철학사 읽기, 기대됩니다.ㅎㅎㅎ

  • 2021-02-02 09:48

    네... 들립니다...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손들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내일도 기대되네요^^

  • 2021-02-02 11:29

    와 막 설득될라고 그래요.
    마침 초월성에 대해 공부하다가
    초월성에 대해 고민한 수없는 흔적들을 보면서 어찌나 놀랐던지 내가 막 내 멋대로 이해하고 있나 멘붕이 오더라고요.
    그런 것들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건가요?
    네? 들리시나요? ㅎㅎ
    낼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 2021-02-02 15:36

    이쯤 되면 한 이십명은 신청했어야 하는데, 여기 참 이상해요. 죄다 변죽만 올리시네 ㅋ.

    • 2021-02-03 09:35

      😁

  • 2021-02-02 20:54

    ㅇㅎㅎㅎ
    월욜 공부 오전에서 저녁으로 갈아타고 싶어지네요.
    손가락이 막 근질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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