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고원> 위기의 13고원

고은
2019-10-30 08:27
343

 

 

1. 위기의 13고원

 

  너무나 아찔했던 <천 개의 고원> 13고원이 끝났습니다. 발제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발제를 다 못하겠군...' 발제 7년 인생 중 가장 큰 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앞의 추상적이고 어려웠던 고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읽으면, 말로는 표현 못해도 상상은 할 수 있었는데요. 이번 고원은 반대로 거의 다 아는 글자에 문장도 읽히는데 상상이 안되어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게 지금 뭘 상정하면서 말하고 있는거야..?' 

  13고원은 12고원과 이어집니다. 12고원에서 이어받아 명제10부터 명제14까지 전개되고 있습니다. 명제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실제로 명제라고 하기는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 12고원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명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2고원이 전쟁기계와 유목에 대해 다루었다면 13고원에서는 포획장치와 국가에 대해서 다룹니다. "국가는 어떻게 발생했을까?"하는 질문에 대답했던 수많은 학자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들의 어떤 부분은 가져오고 또 어떤 부분은 까면서 저자들만의 국가이론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13장을 완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해서, 후기에서도 13장을 정리하기 보단 제가 흥미로웠던 부분들과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좀 더 잘 이해해서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개인적으로는 2019 글쓰기 강학원 마지막 발제인 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2. 진화론에 대한 반박

 

  우선은 13고원에 등장한 학자들 중 제가 포착할 수 있었던 학자들과 그들에 대해 저자들이 어떤 부분을 취하고 어떤 부분을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명제11에서 저자들은 지속적으로 진화론과 결별하려하고 있습니다. 이 때 진화론이란 사회 형태가 점점 진보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변화해왔다는 입장입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나 고고학자 차일드는 국가란 일정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탄생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농업 공동체가 있고, 그 농업 공동체가 일정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생산력으로 인해 잠재적 잉여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터키의 한 신석기 유적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폐기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키의 제국엔 농업 공동체도, 생산력도, 잠재적 잉여도 발견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국가는 수렵-채집민의 생활에서 바로 등장했으며 농업과 목축, 야금술을 창조했습니다. 즉 국가가 일정한 생산양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을 하나의 양식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저자들은 두 학자를 더 가져오는데요, 이 두 학자의 주장에서는 일부 선택하여 취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탁에서도 많이 읽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저자인 클라스트르는 진화론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원시 사회란 국가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가 아니라고, 국가란 점진적으로 출현한다기 보단 단절을 통해 출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전개할 때 클라스트르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진화론적으로 설명했다는 한계를 가졌습니다. 두 번째 학자인 그리아즈노프는 정주 농민들이 유목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리아즈노프는 지그재그 식의 진화라고 해석해냈습니다.

 

 

 

3. 조건이 아니라 문턱

 

저자들은 진화론과 결별하면서 국가가 탄생하기 위해 도달해야 할 기반을 상정해놓지 않는 대신, 점진적인 과정을 위한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 대신, 국가로 전환되는 ‘문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계’란 마지막 직전의 것을 의미하고, ‘문턱’이란 이 한계를 넘어선 지점, “이제까지의 배치는 더 이상 존속할 수”(842)없게 된 지점을 의미합니다. 한계는 배치가 성격을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이 문턱에는 국가문턱과 도시문턱이 있는데요, 전자의 특징이 순환과 회로라면 후자의 특징은 계층과 수직체입니다.

저자들이 조건을 상정하는 대신 문턱이라는 개념을 들고 온 것은, 천편일률적인 한계 점을 상정하는 대신 또 다른 배치로 넘어가는 이행의 과정에 방점을 찍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턱이란 한계라는 마지막 점을 넘어선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지나 문턱을 넘는 순간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배치에 이르게 됩니다. 국가와 결부된 문턱, 도시와 결부된 문턱에 대해 설명할 때 탈영토화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 영토에 머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한 때 영토화에 도움을 주었던 것들이 (이를테면 여백) 이제는 탈영토화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국가라는 것이 갑자기 흐름을 절단하며 튀어나온다는 것도 ‘문턱’의 개념을 가져왔을 때서야 클라스트르와 달리 역사적이지 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시형태의 국가들은 일정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여 국가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 ‘문턱’을 넘지 않으려는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이행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국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해서는 ‘포획’의 개념을 다루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전에 앞서 ‘문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다른 학자들의 진화론적인 입장과 확실히 결별하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어쩐지 내년에 들뢰즈를 더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맑스 읽었을 때도, 고전대중지성 할 때도, 어느 정도 맥락을 잡고 제가 쓸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넘어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요. 들뢰즈는 20대 초반에 공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읽었던 푸코 때만큼이나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도 알겠고,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지도 알겠는데도 책의 내용이 손에 잡히질 않는 걸 보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네 발로 기어서 <천 개의 고원>의 끝을 향해가는 저 자신과, 또 쉽지 않은 과정을 함께 해주고 계신 글쓰기 강학원 동학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이만 후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1
  • 2019-10-31 08:50

    고생했어.
    나도 니가 발제를 제대로 해올 수 있을까, 진짜 걱정했단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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