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철학학교Q&A③] 나는 어쩌다 ‘철학사 덕후’가 되었나

정군
2021-02-03 00:43
1501

사실 제가 ‘철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꽤나 단순합니다. 저는 이른바 학부제 1세대로서 2학년 2학기까지 ‘전공’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인문학부생’이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전공을 선택할 때가 되어 ‘철학’ 전공을 선택하고 가보니, 동기가 없더군요. 아, 한 명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자주통일’을 부르짖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에서 안 보이게 되었고요, 저는 ‘노동해방’을 부르짖다가 한 학기 평점 0.48을 기록하고는 다음 해에 단과대 학생회장이 됩니다.(단과대 학생회장이 되려고 방어율 0.48을 기록한 건 아닙니다. 뭐 어쨌든 저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임기가 끝나고 ‘노동해방’ 아닌가보다 하며 ‘전공공부’에 매진하게 되는데... 4학년 전공이라는 것이 대부분 ‘00000강독’, ‘00강독’, ‘00읽기’(읽기와 강독이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였습니다. 막막했슴다.

 

 

바로 그때, 등굣길 신촌 홍익문고 ‘서양철학’ 코너에 당당한 위용으로 꽂혀 있던 새빨간 책 두 권을 발견합니다. 그 책이란 힐쉬베르거판 『서양철학사』 상, 하권이었죠. 풍채도 좋고, 어찌나 당당하던지, 서점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모습으로 꽂혀 있던 책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어쩐지 막연한 기대 한 가지를 품게 됩니다. ‘저기에 아마 2000년 철학의 역사가 요약 정리되어 있을 거야. 저걸 사가지고 공부하면 우리 과의 킹왕짱이 될지도 몰라’.(그런 걸 보면 니체의 ‘권력의지’, 그리고 마르크스의 ‘물신성’ 개념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저는 그렇게 ‘킹왕짱에의 욕망’에 이끌려 홀린 듯이 신촌 홍익문고의 악성재고 두 권을 떠맡게 됩니다. 학교 선배가 당대의 벤처창업 붐에 힘입어 창업한 회사 ‘마이 콤플렉스’에서 검색 데이터 입력 알바로 받은 일당 5만원이 고스란히 ‘서양철학사’ 두 권으로 바뀐 것이지요.(그 회사는 곧 망했습니다) 그 후로 보름 정도 점심을 우유 한 개로 버텨야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 한 일이었다고 확신합니다.(아, 물론 킹왕짱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ㅎㅎ)

 

막막한 마음에 ‘철학사’를 집어들기는 했지만, 문제가 그렇게 제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원전’을 잘 모르면 ‘요약, 정리’여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그런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해’를 포기하고 그냥 책을 외우자는 느낌으로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공부방법을 고안하기도 했고요. 이를테면, ‘000강독’, ‘000읽기’ 수업을 하다보면 대개 교수님이 학생 하나를 찍어서 한 단락을 읽게 하고, 그 부분을 요약하게 시키곤 합니다. ‘요약’이라고는 하지만, 거기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말’로 설명하게끔 하는 것이었지요. 그런 수업을 따라가려면, 한 단락이든, 한 페이지든 읽고, 그 부분의 핵심적인 내용을 빨리 파악해서 그걸 중심으로 설명하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철학사’는 그 훈련을 하기에 맞춤한 텍스트였고요! 그리고 곧 훈련의 성과를 발휘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헤겔 정신현상학 강독> 수업을 듣는데, 이를테면 헤겔이 왜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파바박 이해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날의 경험이 제 인생을 영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그런 사연 덕에 ‘철학사’는 제게 조금 남다른 느낌을 줍니다. 한 번 ‘효능감’을 맛본 저는 표지에 ‘서양철학사’라고 적힌 책을 보면 일단 두근두근 하게 되었고요.(여전히 뭔가 읽고나면 '킹왕짱'이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껴요)

 

자, 이제 뭔가 내 공부가 어떤 벽에 막힌 것 같다, 책을 읽는데 이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싶은신 분들, 드루오세요~ 그 벽을 뚫으려면 커다란 드릴이 필요합니다. 드릴 몸통에 이렇게 적혀있네요. 'BOSCH', 아니 ‘서양철학사’라고요.

 

댓글 7
  • 2021-02-03 09:05

    이 글을 읽다가 불현듯 나의 서가로.
    앗, 있다!
    나의 최초의 철학사 , 아직 있다!
    1983년 감옥에서였구나. ㅋ

    KakaoTalk_20210203_090056472-horz.jpg

  • 2021-02-03 10:57

    문탁에 새로운 필진이 들어왔구나! 재미있네^^

  • 2021-02-03 14:19

    힐쉬베르거는 제게도 내용보다는 엮여 있는 사람에 대한 추억으로 참 각별한 책입니다. 누런 갱지에 인쇄된 90년,91년판을 지니고 있다가 너무 낡아 지금은 판갈이된 걸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마저 낡아 보여 얼마전 새로운 판이 있나 살피다가 절판된 걸 알았습니다.

    그냥 보내기는 참 아쉬운 책입니다. 생각해보니 30년에 걸쳐 두 번 정도 읽었으니 안 읽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100번을 읽으라 했고 개인적으로는 10번은 보려고 했으니 이제 여덟 번 남았습니다.

    운이 닿으면 올 해 한 번 더 읽을 수 있겠네요.

  • 2021-02-03 15:08

    ㅋㅋ 철학이나 심리학 철학관하는 점쟁이 공부하는 곳이라고 눈물짓던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 2021-02-03 23:13

    단기세미나에 읽은 책이 <사유 속의 영화>입니다.
    거기서 들뢰즈가 영화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내용이 실렸는데, 철학은 개념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하더군요. 전 개념없이 살아서. . 흠흠 멋지네요. 철학이라는 거. . .핫핫

  • 2021-02-04 06:46

    드릴같은 철학사 ㅋ
    아렘샘이 뭐라하실까봐 이제 변죽도 못울리겠어요 ㅎ

  • 2021-02-04 09:42

    이해를 포기하고 읽고 또 읽어 외우자!! 라는 다짐 !!!
    다시 불타는 의지가 뿜뿜!! 하는구먼요~

    정군님의 글은 뭔가 ...
    휘발유 같은 작용을 하는구먼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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