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오이디푸스> 깊이읽기 종강 후기

정군
2020-02-20 00:37
569

1.
어떤 사상을, 어떤 책을, 어떤 강의를 한 번에 이해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매번 첫번째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특정한 '이해'를 가정한다. 그러다가 벽을 만나면 거기서 멈춘다. 벽의 표면을 하나씩 하나씩 고르고 매만지며 결국엔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좌절이다. 단어를 하나만 바꾸면 '재현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좌절'이 된다. 이건 들뢰즈/가타리로부터 가장 멀리 가는 길이다. 벽이 문제가 아니다. 가뿐하게 타넘을 수 없는 무거운 몸이 문제다. 넘을 가치가 없는 벽은 '이해'와 상관없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메모를 쓰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통과라고.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그저 가볍게 넘어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읽는 동안 바뀌는 내 신체와 관념이다. 이해의 영토를 가꾸는 일에 힘을 쏟아서는 안 된다. 진짜 중요한 건 주파 속에서 나를 재탄생시키는 일이다. '이해'라는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써보자면, 내가 이해한 '강도(내공)'란 그런 것이었다.

 

2.
오랫동안 어째서 '실천'은 늘 '이론'의 뒤만 쫓고 있는가 생각했었다. 그건 말 그대로 '도처'에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누구도 그걸 딱 맞게 포갠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말할 것도 없고 레닌이나 트로츠키 조차도 말이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재현도 원본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내 실천은 너무 빈약해'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론과 실천의 재현적 도식이 도덕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으로부터 단죄가 나오고, 그것으로부터 죄책감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만성화된 패배의식과 원한감정이 나온다. 그중 어느 것도 살아가는 일에 적절한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실천이 이론에 합치할 수 있는지 고민할 게 아니라, 그 문제틀 자체를 버려야했던 것이다. 이제 더는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더불어서 어떤 정치적 행동에 대해 선함과 악함 같은 판타지도 갖지 않는다. 적합한 작동과 고장난 작동이 있을 뿐이다. 잘 못해도 된다. 모든 일엔 '다음'이 있는 법이니까. '탈영토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3.
세계도 나도 늘 변한다. 사실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이 모든 변화의 바탕에 '기관 없는 몸'이 있다. 아니, '기관 없는 몸'이 변화의 바탕이다. 개체적, 인물적 특성도 없고, 작동의 특이성도 없는 상태 말이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들을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아찔한 기분마저 느낀다. 그럴 것이 세계를 산출하는 일자一者도 없고, 그 일자가 결국엔 도달할 목적도 없다는 걸 명징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바탕만 있을 뿐. 그점을 떠올리면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또는 의무 같은게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목적'이 없으니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 내가 해야할 일도 없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들(대개는 뻘짓들)의 의미와 영향력도 그다지 크지 않다. 이게 자유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한 번의 통과에서 얻은 자유로움이 이렇게나 크다.

 

4.
<안티 오이디푸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정말이지 훌륭하게 통과해냈다. 이번 생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믿는다'. 언제가 이걸 다시 통과할테고, 그때는 또 무슨 회로가 생겨날지 기대된다. 또 지금 만들어진 회로가 어디에 달라붙어 어떻게 작동할지도 기대된다.

 

6주 동안 함께 공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댓글 2
  • 2020-02-20 06:59

    북드라망에 만년필로 쓴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정군이 어딜 통과하고 있는지 가끔 들어가 볼게요~
    6주 동안 멀리서 오는 친구가 있어 반가웠는데.....이제 안 온다니 섭섭하네요...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0-02-22 07:06

    정군님,
    후기 읽는 내내 정군님이 직접 읽어주는 것같은 착각이 드네요.
    중후반 쯤 무의식을 확증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봐라는 문장에서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페이소스에 가까운 책이라 생각되어 통쾌했는데,
    아니,, 어쩔.. 마지막 문장에서 무의식을 분석하라니... 정말 짜증 제대로 났지 뭡니까. 그동안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왜 앞뒷말이 바뀌는가.
    세미나 마지막날은 제가 좀 흥분상태였네요. 그래서 정군님의 통과 이론이 위안이 됐지 뭡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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