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48 우물의 사회학, 수풍정

봄날
2019-07-30 09:10
1085

 

 

우물의 사회학, 수풍정

 

 

 

 

 

어릴 때 꾸었던 꿈 중에 아직도 그 느낌이 남아있는 꿈이 있다. 대개의 꿈이 그렇듯 맥락없이 내가 어떤 우물가에 있었는데 우물물이 둥글고 높은 턱을 자꾸만 흘러넘쳐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두꺼운 나무로 엮여있는 우물덮개를 우물에 덮어주었다. 하지만 그 육중한 우물덮개도 소용없었다. 물은 용솟음치듯이 넘쳐 우물 밖으로 계속 밀려나왔다. 나는 그 덮개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래도 물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덮개를 밀면서 계속해서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신밧드의 양탄자를 탄 듯, 기분좋게 출렁거리던 우물덮개의 움직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세로 뿜어져 올라오던 맑디 맑은 우물물. 지금 그런 꿈을 꾼다면 당장 로또가게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주역의 48번째 괘는 수풍정(水風井), 즉 우물의 이야기이다. 현대인들의 삶에서 더 이상 우물이 없지만, 바로 우리 어머니 세대들에게 우물은 일상의 삶과 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우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얼마간의 기억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우물이 있게 마련이고 그곳을 드나드는 아낙네들에게 우물가는 정보를 습득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엿보고, 한 패가 되어 그곳에 없는 누군가를 험담하며 은근한 동지애를 느끼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길가는 나그네와 앳된 처녀가 수줍은 정을 나누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 우물이 주역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되는가.

 

 

 

 

괘사의 첫마디는 정말 인상적이다. 개읍불개정(改邑不改井). 고을은 고칠 수 있어도 우물은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잘 살지 못하면 고을은 바꿀 수도 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물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받아들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불가피함이 아니라 우물이 가지고 있는 항상성(恒常性)이다. 그래서 괘사에서 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무상무득(无喪无得). 잃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주자는 이것을 덕의 항상됨이라고 푼다. 한편 우물이 우물로 유용하려면 두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첫 번째, 누구든지 그 우물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 아무리 좋은 우물물이라도 두레박이 있어 그 물을 길어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물의 임자를 따져서 그 사용여부가 허가되는 세상은 험한 세상이다. 방향이 약간 빗나갔지만, 가뭄 때 물줄기를 돌려 자기 논에만 물을 대려는 고약한 농부가 동네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이야기도 크게 빗나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물 앞에서 평등한 사회는 사실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한편 또 다른 괘사의 내용도 의미심장하다. 흘지역미율정(汔至亦未繘井)이니 리기병흉(羸其甁凶)이라. 우물물에 거의 닿았는데 두레박의 끈이 부실해서 길어 올리지 못하면 흉하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우물은 물을 퍼올려 쓸 수 있어야 그 효용이 있으니, 두레박을 잘 준비하는 것과 물통을 깨뜨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모두 우물의 유용성과 관계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 역할을 하는 존재는 도처에 있게 마련이나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용기(그릇)가 되는 사람을 찾는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항상 그것에 대비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물은 아무렇게나 우물을 판다고 그 물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풍정은 위가 물이고 아래가 바람이다. 바람은 또 나무이기도 하다. 왜 우물인데, 물이 위에 있고 나무가 아래에 있을까? 물이 아래에 있어야 나무를 키우는 게 아닌가? 수풍정 괘의 경우는 나무가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것 같다. 혹자의 해석을 보면 우물을 처음 만들 때 바닥을 파내려가고 난 후 그 바닥을 나무나 돌로 시공하지 않으면 우물물이 계속 흐려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나무를 마치 침목처럼 깔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물 아래 나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물을 팠더라도 그 물이 흐리고 먹을 수 없으면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도 우물을 찾지 않는다고 하니 초육의 경우가 바로 그렇게 우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거나 미처 갖추지 못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효는 아래괘의 가운데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붕어를 쏘고 독이 깨져 새니 아무도 도움을 주는 이도 없으니 차분하게 기다려야 하는데 성급하게 굴었다고 한다. 사실 자기의 처지가 급한데 일단 아무라도 손잡으려 하는 것이 사람이다. 주역이 때()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으레 하게 마련인 것을 꼬집어 말하고 있으며, 대개 그것이 기다림의 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구삼의 자리가 그러하다. 이것 역시 때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을 효사는 우물이 깨끗한데도 먹어주지 않으니 내 마음에 슬퍼함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렇 때 이런 사람을 제대로 보고 쓰는 것이 바로 이치에 밝은 왕(明王)’이다.

육사효는 정추무구(井甃无咎)이다. 우물에 벽돌을 깐다는 건 우물을 수리한다는 것이다. 괘의 위치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기도 했고 어떤 것을 대비해서 새로움 몸가짐을 갖춘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자는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음한 기운이니 다만 몸을 닦을 뿐이고, 만약 점치는 자가 스스로 몸을 닦는다면 남에게 미치는 공은 없어도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풀고 있다. 함부로 나서다가는 허물이 생기기 좋은 자리. 사효의 자리는 참 운신의 폭이 좁기도 하다.

구오는 양의 자리에 양이 오고 가운데 자리이기도 하므로 효사도 여유가 있다. 우물이 깨끗해서 시원한 샘물을 먹는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 견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은 오히려 어렵기가 힘든 자리이다. 그만큼 시절이나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를 치면 자기가 한 일 없이 날로 먹는상황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상효는 더 좋다. ‘우물을 길어 덮지 않고 항상함이 있어 크게 길하다는 것이다. 대개 하나의 괘가 상효의 자리에 이르르면 그 기운이 극에 달하면서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꺾이곤 하는데 수풍정 괘의 상육자리는 구오효보다 훨씬 좋다. 크게 길한 상효는 보기 드물다. 이렇듯 수풍정괘는 결과적으로 좋은괘이다. 그것은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좋은 시절을 위해 고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마르지 않는 우물물은 내가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에서 배웠던 코르누코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 로마에서 풍요의 여신을 의미하는 이 말은 산양의 뿔같은 잔에서 과일, , 잎사귀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넘쳐나는 형상으로 이야기된다. 물론 뼈를 깎는 인내의 과정을 겪지 않고 얻어지는 부()하고는 차원적으로 다른 이야기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수풍정 괘는 나중에 얻어지는 풍요로움의 근간에는 우리네 인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속도의 문제, 욕심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 절대적인 각자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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