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 주역 > 63 수화기제 水火旣濟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영감
2019-11-1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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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주역의 64 괘는 순 양陽과 순 음陰 효들로 구성된 중천건乾, 중지곤坤 괘로 시작해서, 양과 음이 골고루 섞여 있는 수화기제水火旣濟와 화수미제火水未濟 두 괘로 마감한다. 완성을 뜻하는 기제 괘 대신 미완의 미제 괘로 마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이치를 알게 한다.

기제旣濟괘의 괘사는 '형이 소니 이정하니 초길하고 종란하니라亨이 小니 利貞하니 初吉하고 終亂하니라.' 인데 정이천은 이를 '기제 旣濟의 때에 큰 것은 이미 형통亨通하였으나 작은 것은 아직 亨通할 것이 있다. 이정利貞은 기제旣濟의 때에 처하여 이로움이 정고貞固히 지킴에 있는 것이다. 처음에 길吉함은 막 이룰 때요, 끝에 혼란함은 이룸이 지극하면 뒤집혀지는 것이다.' 로 해석했다. 큰 일을 이루었을 때 작은 일을 살펴 성공을 관리해야 되고, 성취욕이 지나치면 혼란스러워진다는 말이다. 

기제 괘는, 내려가는 성질인 물의 감坎괘가 위에 있고 올라가는 성질인 불의 이離괘가 아래에 있어 서로 만나고 이루는 모양이다. 여섯 효가 제자리正位에 있는데, 음양의 효들이 모두 응하는 '이상적'인 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변역의 질서에 따라 닥쳐올 우환에 서서히 대비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기제 괘는 이제 작은 일들에만 형통하면 되니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라지 말라는 게 핵심 메시지다. 기제 괘와 같이 아래에는 불이 있지만 위로는 물 대신 연못을 이고 있는 택화혁 澤火革괘는 다르다. 연못이 넘쳐 불을 끄지 않으면 불이 연못을 말려버리고, 서로 극하여 상대방을 없애는 혁 괘는 변혁의 상황이다. 양과 음의 각 세 효가 사이좋게 교차하는 기제 괘와 비교하여 양 효가 네 개인 혁 괘는 역동적이고 불안정하다.

기제 괘는 원만하고 안정된 상태로 시작해서 다시 혼란스러워지는 변화의 과정이다. '졸업'과 '시작'이라는 중의를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 'commencement'처럼, 세상만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해도 말이 된다. 학업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와서, 취직을 하고, 혼인을 하고 ....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주요 단계마다 그러하다.

말년에 조심하라는 말을 군대 제대 무렵에 많이 듣는다. 다 왔다고 방심하지 말고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기제 괘의 경고에 해당한다. 사고를 당해 목발을 집고 제대하는 병사들은 축구를 하거나 장난치다 부주의로 다친 경우가 많다. 매출이 좀 늘었다고 해서 바람이 들어간 경영자가 가볍게 처신하다 회사를 그르치는 일도 이에 해당한다. 기제 즉 완성은 자연의 순환 과정에서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데, '영원한' 완성으로 오판하고 경솔하게 행동하다 화를 입는다. 이런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쓰는 동사가 '까불다' 이고 그 다음에 대개 '다치다' 가 따라붙는다. 좀 이루었다고, 좀 먹고 살 만하다고 '까불다가 다치는' 사례를 사회 각 분야에서 목격한다.

괘사에 이어 기제 괘의 효사는 성취한 자가 명심해야 할 교훈을 시기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初九는 曳其輪하며 濡其尾면 无咎 : 수레바퀴를 뒤로 끌며 꼬리를 적시면 허물이 없으리라
六二는 婦喪其茀이니 勿逐하면 七日에 得하리라 : 婦人이 그 가리개를 잃었으니, 쫓지 않으면 7일에 얻으리라.
九三은 高宗이 伐鬼方하야 三年克之니 小人勿用이니라 : 고종이 鬼方을 정벌하여 3년만에 이겼으니, 小人을 쓰지 말아야 한다.

내內괘의 세 효는 성공한 이후에는 속도를 조절하며 차분하게 대처하라고 한다. 정권을 잡은 집단은 캠페인 과정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살피고 봉합해야 한다. 전투 태세에서 국정 운영 체제로 전환하여 제반 정치 자원을 재 분배, 조정한다. 공약들을 심사하여 정책 반영 여부와 절차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初九 효). 정권 창출의 공신은 은둔해서, 다시 세상을 바꾸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군주의 부담을 덜어준다 ( 六二 효 ). 같은 맥락에서 九三 효는 공로의 대가로 자격이 미달하는 '소인'을 등용하는 것은 위험하고, 당사자와 정권을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수사 괘에서도 동일한 소인물용小人勿用이 나온다.

六四는 繻에 有衣袽코 終日戒니라 :젖음에 옷과 헌 옷을 장만해 두고 종일토록 경계함이다
九五는 東鄰殺牛 不如西鄰之禴祭 實受其福이니라 : 동쪽 이웃의 소를 잡아 성대히 祭祀함이 서쪽 이웃의 검소한 祭祀가 실제로 그 福을 받음만 못하다.
上六은 濡其首라 厲하니라 : 그 머리를 적심이니 위태롭다.

내 괘가 정권 초기라면 외 괘는 집권 후반의 상황에 해당한다. 六四 효는 불가피한 권력의 누수를 물이 새는 배로 은유하며 대비하라고 한다. 연이어 터지는 악재로 국정 추진 동력이 떨어진다. 수세에 몰린 정권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졸속하게 기획한 정책과 인상적인 정치 이벤트로 반전을 노려보지만 점점 궁지에 몰린다. 한편 반대파가 부각되고 (九五 효) 몰락을 앞당긴다 (上六 효).

산을 오를 때와 내려 갈 때 사용하는 근육과 심장의 박동이 다르듯이, 성취하는 과정과 성취한 후에 지켜야 할 도리도 다르다. 투지와 노력으로 이룬 다음에는 겸허하게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하산은 시작된다. 오르막 길은 힘들지만 내리막 길은 위험하다. 하산길의 안전을 위해 정상에서는 막걸리도 자제하는 게 좋다. 이루고 난 후에 성취감에 도취하여 설치다가 낭패한다. 챔피온이 되기 보다 방어하는 게 더 어렵다. 한 방에 훅 간다. 완전무결의 뜻으로 쓰이는 ‘완벽完璧’이란 말도 조나라의 인상여가 화씨의벽이라는 귀한 구슬을 진나라로부터 끝까지 지켜낸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남보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가고 보는 천박한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 비리와 타협하여 남을 밀치며 쉽게 이룬 오염된 성취는 다시 쉽게 혼란으로 바뀌고 만다. 정이천은 인생의 세가지 불행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하는 것, 부모 권세로 좋은 벼슬에 오르는 것, 재능이 뛰어나고 글 솜씨 좋은 것을 꼽았다. 무릎을 치며 탄복 하게한다. 완성은 종점이 아니고 정거장이다. 끝은 없다.

외3

 
댓글 1
  • 2019-11-20 17:24

    끝이 없다는 거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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