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 56. 화산려괘 - 여행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우연
2019-09-24 03:11
802

<20119 어리바리 주역>은 이문서당 학인들의 주역 괘 글쓰기 연재물의 제목입니다. 

제목 그대로 어리바리한 학인들이 어리바리한 내용으로 글쓰기를 합니다. 형식도 내용도 문체도 제각각인 채 말입니다.

하지만 압니까? 언젠가는 <주역> 그 심오한 우주의 비의, 그 단 한자락이라고 훔칠 수 있을지^^

 

여행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주역의 56번째 괘 화산려는 뇌화풍 다음에 온다. 풍괘는 크다, 풍성하다를 뜻하는 괘이니 큼이 그 생명을 다하면 거처를 잃고 떠돌게 된다고 한다. 려괘는 산 위에 불꽃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형상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님을 의미한다. 주역이 쓰여졌던 시대를 B.C. 10C경이라고 추정해 본다면 그 시대는 농경이 채 뿌리를 내리기 전, 반농 반목의 시대였다.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다가 땅이 그 기운을 다해 수확량이 떨어지고 척박해지면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찾아, 살던 곳을 떠나는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주역의 화산려괘이다.

이와는 달리 현대의 우리에게 여행은 가벼운 훙분과 설램, 짜릿한 일탈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현장에서 잠시나마의 벗어남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이 이미 정착되고 고착화되어있다는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가 동경하지만 쉽게 떠날 수 없는 여행, 되풀이되는 반복적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그런데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현대에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벗어남은 고생의 시작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던 과거에는 물론, 일정의 먹거리와 신뢰의 사람들에게서 멀어짐은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였을 것이다. 하여 경고망동하게 나그네의 길에 들어섬은 재앙을 부르는 일이었다. -初六 旅?? 斯其所取災- 지금도 별 생각없이 여행을 떠나면 고생하기 십상이다.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가 길 위에서 얻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려旅는 일정한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니 흐트러지기 쉽다. 책임질 일도 드물고 꼭 해야 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여행도 우리 삶의 일부분, 그 안에도 지켜야 할 도리는 있다. 옛 말에 道는 어느 곳에나 항상 존재한다고 했으니까. 여행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이천은 그것을 유순함과 겸손함이라 하였다. 낯선 곳에 이르러 나를 낮추는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곳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을 얻으면 여행이 편안해진다. 유순함으로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 여비를 낭비하지 않고 좋은 가이드를 만나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六二 旅卽次 懷其資 得童僕貞-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 가서 그들을 얕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괜한 돈 자랑이나 하고 이래서 후진국이라는 등 거들먹거리고. 이를 주역괘에서는 음의 자리에 강한 양이 와서 재앙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中하지도 못하고 正하지도 못하면 위태롭다, 여행자-나그네-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九三 旅焚其次 喪其童僕貞 厲-

낯선 곳으로 떠돌아 다님은 즐거움일까 괴로움일까. 비록 나그네로서의 道를 인지하고 스스로를 낮춰 조심한다하여도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한 것이 여행자의 마음이다, 지금 시대의 우리들 대부분은 여행이라기보다는, 관광이라는 미명 아래 떠들고 즐기고 행락과 유흥으로 낯선 곳에서 경박한 자유를 만끽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삶의 근원적 공허함과 마주하기 어렵다. 하지만 관광이 아닌 여행을 떠나본 자는 안다. 낯선 밤거리의 네온사인 속에서 문득 스치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푸른 바다의 장엄한 일출과 마주했을때 조차도 느껴지던 그 가슴 아픔을,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막막함, 유한한 인간의 삶에 대한 숙명적 절망감 등이 길 위를 떠돌 때 그 언제보다도 확연히 다가온다, 비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겸허한 자세를 지켜나간다고 하여도 마음의 공허함을 어찌할 수 없는 게 나그네의 숙명이다. -九四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 不快- 허나 주역에서 말하길 나그네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초심과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마침내 소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 화살을 사용하여 꿩을 쏘아 맞춘다고 했다. 끝내 명예와 복을 얻는다고 한다. -六五 射雉一矢亡 終以譽命- 나그네의 삶에 뭐 그리 편한 생활을 구하리랴만은 스스로를 돌아볼 자각이 있다면 궁색하고 구차하지는 않을 것이다.

 

 

산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는 불꽃을 닮은 삶에도 이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기에 순간 순간 놓치지 말고 지켜내야 하는 인간의 도리는 존재한다. 주역에서 56번째 괘 화산려火山旅를 읽고 현실적 삶의 책임과 의무가 가벼워지는 길 위의 삶에서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한다, 떠돌이 삶은 한때 나의 로망이었고 지금도 그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내 블로그의 제목이 `길 위에서(On the road)`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겸손하게, 조금 더 신중하게 길 위에서의 삶을 꾸려간다면 괘사처럼 조금은 형통하고 길한 삶-旅 小亨 旅貞 吉-이 되지 않을까하는 바램을 감히 가져본다.

 

댓글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132
<케임브리지 중국철학 입문>(1) 질문 (4)
고은 | 2024.03.27 | 조회 56
고은 2024.03.27 56
1131
[2024 고전학교] 세번째 시간 <춘추에서 전국까지> 후기 (4)
곰곰 | 2024.03.26 | 조회 68
곰곰 2024.03.26 68
1130
[2024고전학교]<춘추에서 전국까지>2-질문 올려주세요! (3)
자작나무 | 2024.03.20 | 조회 82
자작나무 2024.03.20 82
1129
[2024고전학교] <춘추에서 전국까지> 두번째 시간 - 후기 (5)
가마솥 | 2024.03.19 | 조회 101
가마솥 2024.03.19 101
1128
[2024고전학교] <춘추에서 전국까지> 1 - 질문을 올려 주세요 (6)
고전학교 | 2024.03.13 | 조회 104
고전학교 2024.03.13 104
1127
[2024고전학교] 첫 시간 후기 - 요순우탕문무주공 (2)
진달래 | 2024.03.12 | 조회 127
진달래 2024.03.12 127
1126
[2024 고전학교] '중국철학 입문' - 첫시간 공지입니다 (3)
진달래 | 2024.02.28 | 조회 134
진달래 2024.02.28 134
1125
24고전학교를 신청해야 하는 이유(3) (3)
자작나무 | 2024.01.22 | 조회 185
자작나무 2024.01.22 185
1124
[고전학교-번개세미나] <맹자> 전편 읽기 (4회) (8)
진달래 | 2024.01.18 | 조회 397
진달래 2024.01.18 397
1123
[2023 고전학교] 2학기 에세이데이 후기 (1)
진달래 | 2023.12.17 | 조회 249
진달래 2023.12.17 249
1122
[2023 고전학교] '사기열전 읽기' 2학기 에세이 데이 (4)
진달래 | 2023.12.13 | 조회 287
진달래 2023.12.13 287
1121
[2024 고전학교] 역사, 문화와 함께 보는 중국 철학 '입문' (18)
진달래 | 2023.12.06 | 조회 1917
진달래 2023.12.06 1917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