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3강: 빗장은 풀리고 각운은 중단된다

호수
2021-02-17 00:13
467

작년에 퇴근길 대중지성 세미나에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를 읽을 때 놀라울 정도로 책에 빨려들었다. 읽어도 읽어도 뜻이 정확히 잡히지 않아, 앞부분은 정말이지 읽고 또 읽었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차이와 반복>은 그렇게 품을 들여 읽지 못하고 강좌만 듣는 데 그치고 있지만, 지지난 시간에 들은 '현재는 모든 과거가 수축된 것'이라는 말이 상당히 강렬하게 남았다. 팽이처럼 서 있는 그 원뿔 그림을 이따금 떠올린다.

 

세탁기에서 옷을 꺼내어 넌다. 재작년쯤 산 이 옷은 꽤 낡았다. 어느 부분은 닳았고 어느 부분은 늘어져 있다. 이 옷이 처음 내 손에 닿았을 떄, 기계에서 뽑아져 나온 물건들이 그렇듯 균일하게 평평하고 매끈했다. 하지만 이 옷은 나를 만나 나의 움직이는 몸을 감싸고 다양한 환경을 마주하면서, 어딘가는 닳고 어딘가는 늘어났다. 나와 함께한 시간을 포함해 이 옷이 겪은 모든 시간이 이 옷에 수축되어 있다.

모든 과거의 수축된 상태 내지 존재로서의 현재가 내게 왜 그리도 매혹적으로 느껴질까. 이 말을 곱씹을수록 지금의 모든 시간이 진한 의미를 지닌 듯 다가오고 내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이 풍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 진하고 풍성한 느낌을 벗어던질 것을 주문하는 듯하다. 자아가 수천 조각으로 쪼개져야 한다고. 지난 시간에는 세 번째 시간의 종합을 다뤘다.

 

 

<시간의 종합>(209쪽)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시간의 텅 빈 형식, 즉 자신이 텅 빈 순수한 형식임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빗장은 풀리고 각운은 중단된다. 이제껏 경험했던 내용이 버려진다. 습관과 기억, 즉 자아의 일관성은 버려진다. 전복의 순간이다.

 

<세번째 종합이 일어나는 단계>

 

1)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는 상태: 빗장이 풀릴 수도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행위의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위하지 못하는 나'는 '행위하는 나'보다 여전히 작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햄릿의 상태다.

 

2) '행위하는 나'와 '행위하지 못하는 나'가 동등해진다. 자아의 이분화: 이제 주인공은 행위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3) 행위가 일어난 이후: 나는 새로운 세계를 잉태했다. 그런데 이 자아는 수천 조각으로 쪼개어진다. 사건이나 행위가 자아의 일관성을 깨뜨릴 때, 이 사건이나 행위는 자신의 일관성을 수행하기 위해 자아를 희생시킨다. 자아는 대가를 치른다.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

 

들뢰즈는 이 상태가 니체의 초인이 이른 상태라고 암시한다. 그리고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는 오로지 사건/행위가 일어나 자아가 변신을 거치고 새로운 것을 생산한 이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세 번째 종합이 일어나 단순한 원환이 와해되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원환이 형성된다.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원환이다. 들뢰즈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과정을 설명했다고 주장한다.

 

"너의 열매들은 잘 익었다. 하지만 너, 너는 너의 열매들을 감당할 만큼 익지 않았다"

 

열매는 사상, 즉 앞에서 말한 '행위의 이미지'이며, 열매가 잘 익었다는 것은 행위의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열매뿐만 아니라 자아가 익어야, 즉 자아의 열매들을 감당할 만큼 익어야, 그리하여 아직 '행위하지 못하는 자아'인 나는 '행위하는 자아'와 동등하게-되기를 해내고 마침내 행위가 일어난다. 그리고 자아는 대가를 치른다. (잘 알려져 있듯 니체는 죽기 전에 이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세 가지 종합 정리>(217쪽)

 

첫번째 종합: 습관의 종합. 여기서 시간은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된다.

 

두번째 종합: 기억의 종합. 여기서 시간은 어떤 순수 과거로 구성된다. 여기서 시간은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또 다른 현재가 도래하게 하는 어떤 근거로서 기억의 관점에서 구성된다.

 

세번째 종합: 시간의 종합. 텅 빈 시간의 형식. 여기서 현재는 제거될 운명에 처한 배우이며 저자이며 행위자다. 과거는 잠재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다.

 

세 번째 종합을 이루어낼 때 반복의 철학이 탄생할 수 있다. 이제 습관(하비투스)의 반복과 기억(므네모시네)의 반복은 단계들로서만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4절> 반복과 무의식: "쾌락원칙을 넘어서"

 

4절의 앞부분을 살짝 들어갔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개념을 기초로 세 가지 종합을 다시 설명하는 듯하다. 지난 시간에는 첫번째 종합인 습관(하비투스)의 종합을 다뤘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는 개체화의 장소다. 유아의 신체는 성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신체, 다시 말해 성감대가 따로 없는 신체다. (성적) 흥분이란 이 신체에 가해지는 자극의 반복이 수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축을 통해 리비도의 집중이 일어난다. 이것은 쾌락이 일어나는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으로서 '묶기' 또는 습관화가 일어난다. 뒤집어 말해서 이 '묶기' 또는 습관 확립이 있어야 쾌락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프로이트의 개념으로 보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이상이 지난 시간의 정리(였기를...), 그리고 뒷이야기가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오늘 저녁에 보아요.)

댓글 1
  • 2021-02-17 10:06

    "Time is out of joint!"
    지난 강의를 압축하는 한 마디였습니다^^
    지난 강의에 결석하신 분들 좀 있었는데, 아마도 지난 강의가 이번 강좌의 엑기스가 아닌가 싶네요!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각운이 깨지고, 그간의 규칙성이 깨지고, 균열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렇고 그런 말인데, 들뢰즈는 참 어렵게! 강렬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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