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실천이성비판> 1강 후기....를 가장한 딴 생각

정군
2021-01-08 18:30
810

칸트는 저에게 늘 이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텍스트들을 보고 있자면, ‘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사유할 수 있지?! 리스펙!!’과 같은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연역> 부분은 그 치밀함에 있어서 역사상의 그 어떤 텍스트보다 ‘꼼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잖아요? 꼼꼼한데 재미까지 있는거 진짜 어렵잖아요? 네, 칸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핵노잼’의 핵심에는 ‘형이상학’의 부재(?)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리형이상학’(의 정초)가 있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처럼, 헤겔처럼 이 우주의 진상의 슉슉 그려가는 ‘멋짐’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는 ‘아니야. 형이상학 아니야. 그거 그냥 가상이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윤리학’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매사에 ‘제약적’인 듯 보입니다.(판단력 비판에서는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러고선 자신은 ‘학을 튼튼한 토대 위에 놓기 위해’ ‘이성의 능력을 비판critique’하는 작업을 하겠다고 하고,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 무엇을 해도 좋은가(실천이성),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끼는가(판단력)’를 묻는 책, 각 세 권을 씁니다. 진정 덕력 높은 덕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비판’일 뿐 아직 진짜 ‘학’은 시작도 안 했다고도 합니다. 여전히 생각해보면 대단하기는 하지만, 조금 갑갑합니다. 저는 성향상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앞의 땅이 진흙탕인지, 포장도로인지, 아니면 내가 발로 나아갈 수 있는지, 기어서 갈 수밖에 없는지 그런 걸 따지는 걸 선호하지 않습니다. 음... 저도 따져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많이 막 따지지는 않습니다. 일단 가보면 무슨 땅인지, 내 몸뚱이가 어떤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요. 칸트에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칸트의 사고방식 전반에 걸쳐 있는 그 ‘꼼꼼함’이 저를 가끔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만들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식’의 매커니즘을 설명할 때에도 그는 프로세스 전체를 꼼꼼하게 분석합니다. ‘주체 밖에 현상계가 있다. 우리에겐 현상계를 지각하는 감관이 있다. 감관을 통해 ‘현상’이 지각된다. 지각된 ‘현상’을 오성이 ‘범주’로 판별한다. 그러면 우리가 인식한 것은 ‘사물’인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의 ‘현상’만 인식했을 뿐이다. 사물 그 자체(물자체, Ding an sich)는 인식할 수 없다.’ 아, 진정 대단하고, 진정 꼼꼼하며, 진정 ‘사물 자체’로 확 달려들고 싶어집니다.

 

예전부터 저는 칸트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실천이성비판』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아마 칸트의 철학이 처음 시작된 곳도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생각했고요. 물론 이건 제 뇌피셜이기는 합니다. 뇌피셜이기는 합니다만, 어떤 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가 철학하게끔 하는 동기는 ‘사변’ 그 자체에 있기 보다 ‘현실 세계의 문제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상식이 무너지는 걸까? 어째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다른 이득을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능력들에 대한 비판까지 갔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불어 이후에 칸트가 구축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의 체계가 ‘윤리형이상학’이었다는 걸 보면 꽤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그 사유의 전제들(이성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실천이성비판』을 읽으면 이 극도로 보수적인 윤리관,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끔 행동하라’는 명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칸트의 윤리철학이 ‘상식을 잘 지켜라’는 통설에 대한 철학적 버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그렇게 보자면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메시지는 ‘겸손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칸트의 철학이 ‘겸손과 상식’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의 종교(경건주의 기독교)와 꽤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뇌피셜도 있습니다)

 

어제 강의를 들을 때, 한편으로 제 머릿 속에 떠올랐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권리 대 권리라는 이율배반이 발생하는데, 이들 두 권리는 똑같이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는 것들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짓는다.
― 칼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길, 334쪽

 

맑스의 유명한 문장이지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더 옳은 것’을 원리적으로 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유에 있어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니체, 맑스, 프로이트 이전 사유에서는 ‘더 옳은 것’을 원리적인 수준에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힘, 충동, 조건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 윤리의 ‘법칙’ 이런 거 없다는 것이죠. 어제 이수영샘께서 ‘인식과 윤리가 일치할 때 대량학살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맑스’와 ‘니체’가 실제로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정말 묘하게도 실제 그 사상의 내용과는 별개로 ‘맑스주의 윤리’가 있었고, ‘니체의 윤리’, ‘프로이트의 윤리’가 역사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보자면 문화대혁명, 나치즘, 68혁명기 몇몇 소집단 내에서 일어났던 성적 문제들 같은 것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상의 실제 내용’과 그 사태들은 ‘내용상의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수용형식이 문제가 되었었죠. 그렇다면 그 수용형식 상의 문제는 왜 일어났을까? 저는 바로 거기에 결여되었던 게 ‘겸손과 상식’이 아니었을까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를 마냥 ‘갱유’해버릴 수 없듯이 칸트도 마냥 없애버릴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조금 답답하고, 보수적이고, 요즘말로는 ‘꼰대’스럽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칸트는 지난 20년, 또는 10년 전에 비해 더 중요한 철학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였습니다.

 

....아 이번에도 딱히 ‘후기’라 부를 수 없는 후기가 되었네요. ‘내용’은 각자 강의록을 한번 씩 더 읽는 것으로 갈음하면 되겠습니다. 껄껄.

댓글 4
  • 2021-01-09 07:32

    아! 겸손과 상식!! 1강 결석자로서 많이 의지되는 후기네요^^ 겸손과 상식의 키워드를 기억하고 2강에는 꼭 출석하겠습니다!!

  • 2021-01-09 16:48

    음.. 후기아닌 듯한 후기가 후기같은 후기보다 재미있어요!!ㅋㅋ

    저는 지난 여름 <순수이성비판> 강좌를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인식이 끝나는 곳에서 윤리가 시작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인식이 끝나는 곳'이란 인식의 근거를 묻는 이성비판 너머의 자리일텐데, 왜 윤리의 자리가 거기란 말인가? 이런 질문이었더랬죠.
    칸트에 의하면 현상으로서의 사물의 세계(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겠죠?)에는 자유가 아니라 인과성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는 인과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왜 그런지는 저는 아직 잘 모르는듯합니다.)
    자유란 물자체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대체,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 궁금했습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순수이성비판 서문을 간신히 맛을 본 뒤
    이제 겨울이 되어서야 칸트의 자유와 윤리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네요.
    이 기회에 <순수이성비판> 2판 머리말에 등장하는 구절,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를
    느낌적인 느낌으로가 아니라 칸트가 생각하듯이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끝없는 혼돈의 구름속으로 들어가게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뭐 그렇다 한들 어쩌겠어요.
    차차 조금씩 공부해 가면 되겠지요..ㅎ

  • 2021-01-09 20:11

    앗 뭐야? 요요의 이 자발적 후기는...ㅋㅋㅋ.. 뭔가 "의무"후기자로서...매우 쫄리는군요. 그래서 일단 빨리 해치운다는 느낌으로,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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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실천이성비판>을 읽지 않아도 그 책의 맨 마지막 결론에 나온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아카넷 판, p331)

    그리고 또 우리 대부분은 이런 문장도 안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아카넷 판, p151) (보통은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타당한 입법이 되는 것처럼 행위하라")

    한국교육의 문제점일 것이다. 칸트를 안 읽어도 저 문장들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은....ㅋㅋㅋ

    그런데, 버뜨, 난 지난 시간에 저 두 문장, 특히 두번째 문장을 갑자기 이..해..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겸손과는 거리가 먼, 이 오만방자!!)

    그건, 아마도 칸트가 친절하게 개념을 정리하고 연역적으로 사고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실천 원칙들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규칙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서 단시 주관의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즉 주관적이다. 즉 준칙들(maxim)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즉 실천 법칙(law)들이다." (아카넷판, p133)

    그러니까 저 유명한 문장은, 나의 준칙(주관적 가치관)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으로 만들라는 이야기이구나!! 아하!!! 실천이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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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뜨...이건 완전 개뻥같은 소리고....지난 시간 내내 든 의문들을 정리해보자.

    1. 순수이성비판은 흄과 라이프니츠를 넘어 리얼형이상학을 정초하려는 칸트의 분명한 문제의식(=야심) 속에서 써진 책이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은 왜 흄 등과 대결하는 게 아니라 소위 '행복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들과 대결하는 거지? 그 맥락은 뭘까?

    2. 갑자기 실천이성비판을 설명-주해-정리-계-과제... 이렇게 쓰는 이유는? (이러면 어쩔수 없이 스피노자가 떠오르잖아...ㅠ)

    3. 이수영선생은 칸트의 윤리학은 '살신성인' 따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매우 까칠+가소롭다는 듯이) 말했지만...리얼리? 갑자기 명명덕..지어지선에서 至善(=최선=최고선)을 주자가 '사리당연지극'이라고 주를 붙였던 게 생각났다.(선=좋은것=理=법칙)..즉, 고대유가(그리고 성리학)는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우주의 보편적 원리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한 사람들 아닌가? (소이연-소당연의 관계)

    4. 자유와 도덕법칙과의 관계? 자유는 의지의 자율성, 즉 (스피노자가 그렇게도 부정한^^) 자유의지. 자연의 인과성(필연성) 너머에 있는 그 무엇. 그런데 우리가 법칙 혹은 법(law)라고 말하면 그것은 당위이고 의무인데.. 자율적인 것과 당위적인 것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자유와 법칙이 같은 것인가? (이건 아마도 지난 강의 말미, 자유에서 도덕법칙으로 가는가? 도덕법칙에서 자유로 가는가?..의 문제인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5. 칸트의 윤리학은 '형식윤리학'이라는게 알 듯 모를 듯 하다. 그것이 감성세계의 질료와 관계를 맺는 게 (이건 준칙이다) 아니라는 점에서, 질료가 아니라는 점에서 '형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 윤리학'이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팍! 이해가 되진 않는다.

    역시 원문을 꼼꼼히 읽는 게 최고일텐데...과연....글쎄......ㅋ
    이수영 샘...우리 그냥 받아먹게만 해주시면 안될까유? ㅎㅎ

  • 2021-01-13 10:20

    평소에 모범생 이미지로 머리 속에 저장해뒀던 칸트는 예상했던 대로 좀 인간적인 느낌이 없는 철학으로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행복은 질료적이며 하위욕구능력이라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자유의지는 인정한다는 것인가? 과연 자유의지를 형식적 법칙으로 담는다는 게 뭘까....철학이라곤 스피노자 밖에 공부한 게 없는 저로서는 스피노자의 자유와 다른 칸트의 초월론적 자유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막연히 언어로는 다르게 표현되지만 깊이 탐구해보면 통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궁금증도 들었습니다
    순수이성비판 강좌도 서문읽기도 참여한해서 이번에 망설였는데 역시 어렵긴 했지만 이수영선생님께서 transcendent와 transcendental을 알기 쉽게 구별해서 설명해 주신 부분은 쏙 들어왔습니다. 그외에도 도표로 개념 설명해주신 부분들 크게 도움 될 거 같아요.
    이상 칸알못의 짧은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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