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읽기> 5강 후기

오선민
2020-09-04 22:03
672

들뢰즈의 카프카마지막 강의 후기

 

    성기현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강의로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의 마지막 8장의 「블록, 계열, 강렬도」와 9장의 「배치란 무엇인가?」를 다루어주셨다. 정말이지 배치란 무엇일까? 한 편의 소설을 ‘작품’이 아니라 ‘배치’로 다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제1장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내용 형식’과 ‘표현 형식’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글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저자나 독자에게로 환원시키기를 거절한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두 가지 점에 당황하게 된다. 첫째, 주인공들은 누구나 자신이 갇혀 있다고 느낀다. 둘째, 그렇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방(마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들은 갇혀 있지만 바깥을 꿈꾸지 않는 것이다. 카프카는 어떻게 이런 설정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곤란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출구를 찾았던 것일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바로 이런 카프카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문학 작품을 읽는 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어떤 문제가 발견될 때 나는 보통 두 가지 차원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문제가 되는 사태의 제작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그 사태의 사용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예를 들면 육아에 지쳐 뻗어 있을 때 첫 번째 차원에 서서 정부의 육아 정책과 그림자 노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 대고 고함을 치고 싶다. 그러다가도 두 번째 차원에서, 제도를 고치기보다는 내 마음가짐 자체를 바꾸자며 명상을 하기도 하고 법륜스님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이런 태도야말로 문제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다. 그들은 왜 어떤 문제 앞에서 원인을 찾거나 해결책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성기현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배치란 “여러 개의 기계가 조합되어 만든 전체”이다. 그럼 기계는 또 무어냐? 이들이 말하는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인데 여기서 핵심은 기계가 생산한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면 지금 후기를 쓰고 있는 나의 손-기계를 생각하면, 이 손-기계는 시각 회로, 신경 회로, 촉각 회로 등과 연결되면서 강의를 들으면서 떠올렸던 산만한 생각들이나 고파오는 배의 꾸룩거림을 절단해서 컴퓨터 화면 상에 문장들을 생산하도록 한다.

    이 기계 개념은 즉각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카프카에게 단식은 곧 글쓰기였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는 손으로 소시지(카프카가 절대 싫어했던!)를 집어 입으로 넣는 대신에 철창을 더듬는다.(「어느 단식광대」) 이때 굶는다는 것은 먹음을 멈추는 일만은 아니다. 카프카는 단식자를 연구자라고도 했다(단식 광대, 단식하는 개). 그들은 음식물을 집어 들어야 할 손으로(개라면 발로) 굶고 있는 자기 몸과 자기를 가두는 벽들을 더듬으며 자신을 먹이고 살리던 것에 대해 생각한다. 카프카도 뭔가를 잘 먹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입으로 뭔가를 넣는 대신에 그 손으로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다. 그럴 때 카프카의 손은 그의 파편적인 글들을 생산하는 기계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을 카프카-손-기계가 생산했다고 보면, 『변신』이나 『성』의 의미를 카프카의 의식(혹은 무의식)에 대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배치를 다시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로 나눈다. 성기현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예로 들어주셨는데 아주 잘 와 닿았다. 학교라는 배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 두 차원이 함께 잘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 욕망의 기계적 배치 차원에서는 물질적인 요소들이 필요하다. 건물, 교실, 책상, 칠판, 분필, 학교 안에 들어가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다 배치를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의 신체 또한 이 기계적 배치의 부분을 이룬다는 점이다.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에는 교장 선생님의 권위적인 훈화 방식, 선생님들의 어투, 동급생들 사이의 은어 같은 것이 다 포함된다. 교장 선생님께서 지나가실 때 학생들이 몸을 숙인다던가 하는 의례적인 몸짓들도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를 이룬다. 유치원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에 따라 말하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서도 그대로 말했다가는 놀림을 받게 될 것이다. 같은 한국어라지만 유치원, 초등학교, 편의점, 백화점, 대기업, 교회 등등에서의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는 다 다르다. 각 배치에 최적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투나 몸가짐을 잘 익혀두어야 할 것이다. 카프카는 언어란 기본적으로 ‘비유’라고 했다. 고요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는 것은 호수가 있는 문화에서다. 비유란 특정한 상황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는 말들의 연결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독일어는 독일에서의 비유이며, 한국어는 한반도에서의 비유이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유대인이지만 독일어를 썼으니 그가 작동시키고 있던 언표 행위의 배치는 적어도 세 개는 된다. 이 세 개의 배치에 카프카의 언어는 복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카프카의 글은 그 어떤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로도 다 회수되지 않는 잉여(잠재성)로 가득했다고 할 수 있다.

    『성』에서 성이라는 배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백작님이 계시는 성, 성곽, 성 아래 마을의 이장님 사택, 여관, 학교, 이웃들의 집 등과 함께 이장, 하급관리, 전령사, 교사, 학생, 여관주인, 하녀들 모두가 다 필요하다. 여기에다 이 마을에서만 통용되는 상식과 은어, 각자의 처지에 맞는 차림과 몸짓이 잘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K가 왔다. K는 학생들의 학교에서 신접살림을 차린다. 이장님의 뒷방이 거대한 서류함을 드러낸다. 또 K는 기본적으로 사람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 작품 속 대화를 잘 따라가다 보면 K는 늘 동문서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는 그렇게 마을의 배치에 균열을 내고 오작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또 그 뿐이다. K는 그저 그렇게 말썽꾼으로 돌아다닐 뿐이며 그가 지나간 자리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상복귀된다. 마을 사람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원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있다. K와 잠깐 사랑놀음에 빠졌던 프리다는 다시 성에서 파견된 조수들 중 하나와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해버린다. 그녀는 자석처럼 성에 다시 달라붙는다. 마치 그레고르 씨가 갑충이 되어 죽고 난 뒤 가족들이 다시 빚과 성욕의 삼각형을 되찾았던 것처럼 말이다(『변신』).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언표의 출현을 알 수 있는가?’ K의 시도를 어떤 이유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는가?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바로 여기야말로 우리가 해석을 거부해야 하는 지점인 것 같다. 도대체 K가 무엇을 했어야 한단 말인가? 백작을 성에서 끌어내려 효수(梟首)라도 해야 하는가? 카프카는 『성』을 미완으로 남겼다. 미완이야말로 카프카가 채택한 표현의 형식이다. K는 소란 일으키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가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성의 배치는 계속 고장 나는 중일 테다.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의 배치를 교란시킬 수 있는 시도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 시도가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세계는 배치이기 때문에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의 ‘배치’ 개념을 따르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가 함께 작동하는 거대 기계(성의, 자본주의의, 가족의)의 부품들(블럭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 신체의 부분부분들이, 언표 행위의 이모저모가 어떤 기계의 생산을 욕망하기에 그 기계적 배치가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 이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것은 나다. 그래서 투쟁은 아주 심플해진다. 이 거대 기계의 생산을 거부하고 싶다면 내 신체, 내 언표 행위를 각각의 블록이라고 보고 그 쓰임에 변화를 주면 된다. 학교에 이불을 둘러쓰고 가더라 해도 작은 일이 아니다. 그 일을 별 볼 일 없는 시도라고 판단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관점인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책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카프카의 「굴」이 떠오른다. 굴의 히어로, 굴을 파는 그 짐승에게는 어떤 입구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배치를 이루는 어떤 블록도 특별히 중요하지가 않기에 투쟁의 지점과 양식은 무한한 방식으로 잠재되어 있다.

    K는 거듭 말했다. ‘나는 여기에 살러 왔습니다.’ 정말 너무나 절실한 말이다. 여기에 안 살고 어디서 살겠는가? 그는 마을이 붕괴되거나 개선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떤 것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초월적 시점 같은 것이 K에게는 필요 없다. 나는 자기를 해석자 즉 초월자의 위치에 올려놓지 말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충고를 명심하고 싶다. K는 자기의 신체와 언표를 도구 삼아 온갖 기계들을 만들어보는 실험가이다. 그것이 K가 사는 법이다. 바로 그런 그의 실험이 성의 배치 전체를 흔들었다. 세상이 이러저러하다 말하기 이전에 카프카가 분해해 준 여러 블록들을 가지고 갖고 놀 일이다.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생각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얍! 

 

*좋은 강의를 마련해주신 문탁과 성기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시간 강의가 끝날 때마다 나왔던 묵직한 질문들은 다음 강의 시간까지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곤 했습니다. 성기현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많은 예들과 음악들, 그리고 그레고르 잠자 씨의 음악도 계속 생각났습니다. 강의가 끝나서 너무 아쉽습니다. ^^

아래 사진은 가을의 프라하라고 합니다. 카프카의 성이 보입니다. 

 

 

댓글 5
  • 2020-09-05 08:45

    친절한 제가 오선민샘이 첨부파일로 올려주신 (그렇게 하면 사진이 들어가질 않아요^^) 프라하 사진을 본문에 넣어드렸습니다.

    • 2020-09-05 10:19

      오! 감사합니다. ^^

  • 2020-09-05 10:37

    마지막 후기도 올라왔네요^^ 선민샘의 목소리가 들려 좋네요. 여기 살러 왔습니다! 는 k의 말을 저도 가끔 떠올려보겠습니다^^

  • 2020-09-05 13:47

    지금 한참 <성>을 읽고 있어서인지, 샘의 후기가 더 쏙쏙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가을의 프라하...한 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 2020-09-05 17:18

    '해석'하지 않고 '조립' 하며 읽기!! 대단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역시 그쪽이 '해석'보다 훨씬 어렵죠.....ㅠ
    매번 멀리, 더 머얼리 가보고 싶습니다.(문탁에 이르는 길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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