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강독 시즌2> 5강 / 바다 속에서 진주를 캐다

청량리
2019-10-22 07:16
302

신상환 선생님이 강의 도중 <중론>의 핵심은 몇 번씩 짚어 줍니다. 잊지 말라고.

아마도 다음 주 마지막이고 이제 몇 품 안 남았는데, ‘도루묵’이 되지 말라는 염려인 듯합니다. 물론 맘대로 되진 않습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거 몇 개 적어 봅니다.

 

1

이건 어쩌면 <중론>과는 밀접하게 상관없는 내용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질문 혹은 질문자가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있는지를 살펴보지 않고, 나의 상황에 따라 답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에게 답을 하는 게 일종의 오류가 됩니다. 이것이 대전제의 오류입니다.

침묵하는 자에게 약한 중관학파는 듣는데 선수들입니다. 논박자의 의견도 잘 들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말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논박자의 질문이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 나오는지 파악하고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합니다.

 

2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하는 방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구부정입니다. 구사론자들의 논박에 그만한 방편이 없습니다. 사구와 사구부정에 대해서도 중관학파 혹은 신상환선생님의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A에 대한 부정을 ~A라고 한다면, ~A에 대한 부정은 ~(~A)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의 부정은 흔히 긍정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중론>은 다르게 봅니다. A가 이미 ~A로 부정되었으면 ~A에 대한 부정은 논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즉 ~(~A)는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이 방법론이 묘하게 매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로 ‘백(back)’하는 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보는 건 세간의 논리이고 억지처럼 보입니다.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은 서로 다른 걸까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기실상의 세계에서 ‘백’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단순히 모(이것) 아니면 도(이것이 아닌 것)만 있지 ‘빽도’는 없습니다.

 

3

이런 ‘모 아니면 도’는 일체의 희론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희론’이란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즉 언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말들을 일컬어 부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적정한 상태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일체의 희론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과거 2,500년 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실상의 세계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것에는 어떠한 그침도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연기실상(즉 일제무자성,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그래서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하지만 부처님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를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괴리가 생겨난다. 부처님이 언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연기실상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말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중관학파에서는 ‘이제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4품 8번 게송에 이제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부처님들께서 행하신 법에 대한 가르침은

이제(二諦)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간의 진리(=속제)와

수승한 의미의 진리(=진제)다.

 

첫 행에 부처님들이라는 표현처럼 깨달은 자(=부처)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속제’는 ‘세상을 덮고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4품 10번 게송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바로 그 세간의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진제는 가르쳐질 수 없다.

바로 그 진제를 알지 못하고서는

열반은 얻어지지 않는다.

 

세간의 언어는 일체의 희론입니다. 그리고 속제 역시 희론에 포함됩니다. 언설의 모든 세계를 속제라고 말 하기는 어렵지만, 속제는 언설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속제를 통해 연기실상의 ‘진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군대도 빨리 가는 게 상책이라고 합니다. 2,500년 전에 태어났다면 희론에 덜 휘둘렸을까요? 언설의 세계 속 희론의 소용돌이를 뚫고 속제를 찾아내는 일이 왜 이렇게 중생들의 숙제처럼 느껴질까요? 어렵습니다. 말로 표현된 것은 진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로 쓰지 않으면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론>이라는 텍스트도 일체의 희론입니다만, 진제로 바라볼 수 있는 값진 속제입니다.

 

4

아마도 이렇게 희론에 집착하여 그 속의 속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습니다. 사태란 주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카더라’ 통신을 마치 자신이 그 사태를 파악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수업시간 중에는 ‘하늘을 나는 승려를 봤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요즘의 우리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중론>에서는 다르게 봅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하늘을 나는 승려를 봤는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이 미쳤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즉 하늘을 나는 승려의 상황은 그 사람에게는 사태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사태가 아닌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 자체는 하나의 사태입니다.

부처님이 본 사태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카더라’ 통신은 ‘하늘을 나는 승려는 봤다’ 사람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토요일의 신상환 선생님은 하나의 사태입니다. 우리는 그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어떤 것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연기실상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태가 품고 있는 속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제는 바다 속의 진주와 같습니다. 넓고 넓은 희론의 바다(=사태) 속에서 어렵게 찾아지는 속제라는 이름의 진주. 하지만 요즘에는 진주도 양식이 가능하다죠?

 

5

일체의 희론이 이미지의 세계(1종지)라면 속제는 이성의 영역(2종지)입니다. 속제를 통해 우리는 진제(3종지)로 나아갑니다. 진제는 초월의 영역입니다. 말로는 알 수가 없죠.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습니다. 진제를 반영하는 속제가 넓어질수록 진제에 더 가까워집니다.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들이 박사장 댁으로 사기 위장취업이 가능했던 것은 ‘믿음의 벨트’ 덕분입니다. 하지만 박사장과 그의 아내에게는 이성의 힘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박사장과 그의 아내에게 기택의 가족은 ‘카더라’통신을 그들의 눈에 보이도록 사기행각을 벌입니다. 그 사기행각의 끝은 박사장과 기정, 그리고 근세와 문광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기생충>을 논할 수는 없으니, 추후 공사일지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사태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자신의 태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다에 놓인 사태는 같지만 바다 위를 허우적댈지 아니면 바다 속 깊이 들어가 진주(=속제)를 캐낼지는 전혀 다릅니다. <중론>을 배우는 이유입니다.

 

 

댓글 2
  • 2019-10-22 09:22

    2,500년 전에 태어났다면 희론에 덜 휘둘렸을까요?
    :요 문장이요~ 청량리님은 그 때 태어날수는 없지만^^ 그 때의 대화는 읽고 있지요^^ 백일의 논어에서~
    치고 빠지는 '탁구공' 같은 그 언설의 세계에 살았던 공자님은 무엇과 '대결' 하려고 하셨을까요? 자왈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 ㅋ

    속제와 진제는 저도... 계속 잔상이 남았습니다.
    속제와 진제를 높고 낮음. 참과 거짓 등의 이분법으로 이해 할 수 없으며 속제가 진제를 '덮고' 있다.... '덮고' 의 의미를 수업내내 떠올렸으나 갈수록...
    음... <논어>의 개념들이 그런것 처럼...

  • 2019-10-22 22:43

    음.. 속제가 바닷속의 진주라는 비유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속제 samvrti-satya, 이 글자를 해자하여 신상환샘은 무엇인가에 의해 덮여있는 진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무엇인가는 굳이 말하자면 언어 아닐까요?
    이른바 세간의 진리, 속제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이나 종교, 과학, 철학과 같은 것은 모두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니까요.
    그 점에서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도 속제일 뿐, 궁극의 진리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요?
    중관사상은 이런 반론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제론이 강조됩니다.
    용수는 중론에서 불교의 중요한 핵심 개념들을 논파합니다.
    그렇게 논파하는 이유는 윤회, 열반, 업, 과보, 인연, 오온, 육근 등의 개념이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념 자체에 자성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논파하기 위해서이지요.
    개념은 개념일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것! 그것을 직시하고 붓다가 가르친대로 살아라!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앗! 이 역시 말이군요.ㅠㅠ
    개념들에는 자성이 없다는 논파 역시 말의 길을 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쩝!
    하지만 이런 말은 개념에 자성이 있다는 말과는 다르다고 용수는 주장합니다.
    떠드는 아이들에게 '소리내지 마'라고 해서 소리를 그치게 하는 방식과 달리
    이 방식은 환술사가 만들어 낸 환술을 다른 환술로 사라지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논리라는 환술로, 구사론자들의 주장을 논파할 때 진제 paramārtha-satya, 공의 진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참고로 달라이라마 존자의 이제론 설명을 인용합니다.
    "두 가지 진리라는 근본교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인과법칙이 작용하는 관습적 세계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을 관습적 진리, 상대적 진리라고 한다. 세상이 관습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세상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다.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그런 공성이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진리, 궁극적 진리(진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관계는 중요하다.
    현상의 세계는 궁극적 진리의 세계와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궁극적 본성이 성립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달라이 라마의 사성제에 대한 강의 중에서)

    더불어 희론, 속제, 진제를 스피노자의 1종지, 2종지, 3종지에 대입시키는 이해방식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고 싶군요.^^
    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유식학에 삼성설이라는 게 있어요.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는 것인데요.
    인식의 세가지 성질, 혹은 세가지 측면, 혹은 도(진여)에 이르는 세가지 과정이라고 하면 될까요?
    어떤 분은 유식의 삼성설을 스피노자의 1종지, 2종지, 3종지에 대입시키기도 합니다.
    중론의 이제설과 유식학의 삼성설의 관계도 불교 사상사 안에서도 논쟁거리였습니다.
    의타기성이 속제냐, 진제냐 뭐 그런 이야기랍니다.(언젠가 중론특강처럼 유식학을 공부하는 코스도 만들어 보고 싶군요.ㅎㅎㅎ)
    아무튼.. 스피노자와 불교를 연결시키는 것도 청량리만의 시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요.ㅋ
    청량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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