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강독 시즌2> 3강 후기. 이렇게 들렸다

다인
2019-10-09 20:07
56

이렇게 들렸다

 

중론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일은 괴롭다. 수많은 각주에 달린 티벳어, 혹은 산스끄리뜨어의 의미를 알아야하나, 그냥 넘겨야 하나. 이 해석은 티벳 전통인지, 구사론자의 주장인지, 용수보살의 주장인지 구별해 내는 것도 어렵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 파악에 집중할라치면 전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헛갈리고. ‘고통에서의 해방’이 중론의 목적이라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는 이번 시즌에서는 어려울 듯하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안 될수도 있지만. 그런데 목표를 낮추면 그렇게 괴로운 일만은 아니다. 수많은 각주를 살짝 건너뛰고 엄격한 해석에서 조금 벗어나보면 거칠게나마 무슨 뜻인지는 파악된다. ‘여시아문’, 나에게 이번 시즌 중론은 ‘이렇게 들렸다’로 정리해 보련다.

17품 업과 과보, 18품 아와 법, 19 시간에 대한 것이 이번 시간에 다룬 것이다. 그 중 17품은 33게송으로 『중론』 가운데 세 번째로 게송 수가 많다. 게송 수가 많은 이유는 구사론자와 용수보살의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업은 이런 것이며 그에 따른 이러저러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구사론자의 주장에 용수보살은 그런 것은 없다고 단칼에 잘라 버린다. ‘너가 주장하는 그 개념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을 펼쳐 보임으로써 논쟁을 끝낸다. 물론 이 싸움의 결과는 용수보살의 승이다. 그 논쟁의 현장을 내게 들린 대로 재구성 해보면 이렇다.

17품. 업과 과보

<구사론자>

업이라는 것이 뭘까? 가령 다른 사람을 돕고자하는 자비심를 낸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마음 때문에 얻게 되는 어떤 결과가 있을 거야. 그 결과를 과보라고 해. 그 과보는 금생은 물론 다른 생까지 이어지지.(17-1)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생각으로 짓는 것(思業)과 생각했던 것으로 짓는 것(思已業) 등이 있어.(17-2) 意業을 思業이라 하고, 身業과 口業을 思已業이라고 해.(17-3) 생각하는 것 까지라면 意業, 곧 思業이지만, 생각한 후에 어떤 몸짓과 밖으로 나온 말은 색의 영역이 수반되는 思已業이야. 사이업을 좀 더 나누어보면 6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 말과 몸짓 2가지에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無表)으로 나누어 보는 것. 아! 몸짓을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혹시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드러나는 찰나의 몸짓 이후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몸짓에 남아있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잖아. 좀 어렵지만 여하튼 그것은 생각은 아니니까 意業쪽은 아니고, 色의 일종인 거야. 그런 것을 무표색이라고 하지. 또,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어. 그러면 의업을 포함해 7종으로 업을 구분해 볼 수 있지. 알잖아, 이 모든 것은, 다 부처님이 일러 주셨다는 거!(17-5)

<용수보살>

업의 종류가 무엇이든, 그 업이 그대로 이숙하여 어떤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라면 그 업은 항상 존재하게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어떻게 다른 과보라는 거야. 만약 그렇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사라졌는데 무슨 과보가 있다는 거지?(17-6)

 

<구사론자>

아, 또 그 말이구나. 항상 있는 것이라면 항상 있게 되는 것이어서 안 되고, 이미 끊어진 것이라면 끊어졌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말! 자, 이 씨앗을 봐. 씨앗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생기잖아.(17-7) 씨앗과 열매 사이에는 상속이라는 ‘찰나생 찰나멸’ 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에 끊어진 것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잖아.(17-8) 마음도 마찬가지야. 마음의 상속이라는 것은 선행하는 마음에서 왔겠지. 선행하는 마음이 곧 마음의 업이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한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잖아.(17-10) 업은 있는 거야. 그러니 우리는 선한 업의 십도를 걸으며 그 과보를 금생과 다음 생에서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것이 곧 부처님의 법이야!(17-11)

 

<용수보살>

아!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큰 일 이구나!(17-12)

 

<구사론자>

아니, 뭐라는 거야! 부처님만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야! 부처님 이후 모든 성문들과 독각까지도 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잘 들어 봐! (17-13) 가령 채권, 채무 관계를 생각해봐. 돈을 꿔갈 때 차용증을 쓰잖아. 채무의 증거인 차용증은 빚을 갚을 때 까지 계속 남아 있게 되잖아. 이때 빚을 내는 것이 업이고, 그 과보는 돈을 갚던지, 떼어먹던지, 탕감해주던지, 어떻게든 과보가 있겠지(無記). 그때까지 빚의 효력을 잃지 않게 하는(不失) 차용증이 있는 거야.(17-14) 빚을 갚지 않고 차용증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은 것처럼, 업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不失法)도 쉽지 않아. 단지 사성제를 관찰하는 수준으로는(見道) 어림도 없지. 아주 높은 수행 단계(四向 四果)에 이르러야 가능하지(17-15) 다른 한편으로 잘 생각해 보면, 업이 쉽게 끊겨져도 문제야. 만약 끊는다고 끊겨지거나, 다르게 바뀐다거나(轉變), 사라진다면? 업이 파괴되는 일이 생기게 되겠지.(17-16) 그렇게 되면 그것도 큰 문제 아니겠어? 하여튼 지금 욕계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내세에 태어날 때, 같은 차원의 세계와 그 세계 안의 같거나 다른 모든 업의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어. 업은 이처럼 쉽게 잃어버려지지 않는 것이지(不失法).(17-17)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 세상의 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 각각 과보가 무르익은(異熟) 후에도 없어지지는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게 될거야.(17-18) 그러나 없애는 길은 있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높은 수행의 결과로 다른 차원의 길로 들어섬으로 소멸되거나,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 다른 생을 받는 전변이 생기거나 하는 것 등을 말하지. 근데 여기에는 번뇌가 없는 업(無漏法)과 번뇌가 있는 업(有漏法)처럼 결과의 차이는 크겠지.(17-19) 이와 같이 업의 不失法에 따라 업의 과보가 다르게 무르익는 것일 뿐 없어지는 것도(단멸론) 아니고 윤회하지만 항상한 것도(상주론)도 아닌 것이야. (17-20)

 

<용수보살>

잘 들어! 업이라는 것은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왜? 자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지. 업의 소멸, 전변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생기지도 않은 것에 대해 소멸을 어떻게 얘기하냐? (不生, 不滅) (17-21) 만약 업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항상 있을 것이고, 항상 있는 것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17-22) 또 만약 업이 지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알 수 없는 무엇과 결합하게 된다는 얘긴데, 얼마나 무서운 얘기냐? 착하게 살지 않더라도 착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과 같게 되겠지(17-23) 그러면 세상은 죄를 짓거나, 복을 짓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되겠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17-24) 이숙, 이숙 하는데 만일 업이 자성을 갖는 것이라면 이미 과보를 무르익게 한 업이 반복해서 무르익게 하고, 또 하고, 또 하고......(17-25) 업이 번뇌를 본성으로 한다지만, 번뇌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업만은 진실로 존재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17-26) 부처님은 업과 번뇌를 육신의 조건(緣)이라고 말씀하셨지. 업과 번뇌가 연기적인 것임을(空) 이해할 수 있아야 해. 이제 우리의 육신도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수 있겠지?(17-27) ‘과보를 받았네’, ‘업을 지었네’하는 말들은 연기실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설의 세계에 묶여 있는 너 같은 구사론자들의 얘기일 뿐이야.(17-28) 다시 잘 정리해 줄게. 업은 연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비연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에 업을 짓는 자 또한 존재할 수 없어.(17-29) 업도 없고 업을 짓는 자도 없는데 과보가 있을 수 있겠어. 물론 과보가 없으니 과보를 받는 자도 없겠지.(17-30) 업, 과보, 업을 짓는 자, 과보를 받는 자 등등은 부처님이 만든 환상 속의 사람이 또 환상을 짓는 그런 일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게 바로 이 언설의 세계일 거야. 그것들은 마치 신기루나 꿈과 같은 것들인데, 왜 깨닫지 못하니!(17-33)

 

이렇게 17품을 길게 정리하고는 사람들이 여전히 업, 번뇌, 과보, 업을 짓는 자, 과보를 받는 자에 대해 헛갈려할 것을 걱정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나도 없고, 나의 것이라는 것도 없음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것이 18품이다.

 

18품. 我와 法에 대하여

만일 내가 오온과 같다면 나라는 것은 생기기도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이지. 근데, 내가 오온과 다르다면 나와 오온은 관계가 없으므로 나라는 것은 없게 되지. 이래도 나는 없고 저래도 나는 없다는 것을 알겠지?(18-1) 그러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데, 나의 것은 어떻게 존재하겠냐? 나, 나의 것 이런 집착도 없어지겠지.(18-2) 그런데, 나, 나의 것의 집착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바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18-3) 중요한 것은 안과 밖 모두에서 ‘나’와 ‘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소멸할 때, 그때라야 모든 집착이 소멸 되므로 다시 일어나는 것도 소멸될 수 있어.(18-4) 해탈은 업과 번뇌가 없어진 상태라 할 수 있는데, 업과 번뇌는 언설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야. 자성을 갖는 개념은 연기적 관계를 잘 따져봄으로써(空性) 해체됨을 알 수 있지(18-5) 부처님은 내가 있음도 내가 없음도, 혹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설하셨지.(18-6) 말로 설해지는 것은 대상을 끊어, 개념화 시킬 때 가능한 거잖아. 대상을 임시로 끊어서 얘기한 것일 뿐, 실제로는 없는 거잖아? 이것을 경험해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법성인 것이고 열반인 것이지. 이것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되는 것도 아닌 것이지. 음, 뭐랄까? 적정? 적멸?(18-7) 앞에서 얘기한 것이지만, 다시 말할게. 진실하다, 진실하지 않다. 진실하거나 진실하지 않다.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거나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부처님의 법이야.(18-8) 이 진실은 다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멸한 것이며, 개념화 되거나 정의 되어지는 그 무엇을 넘어서 있는 것이지.(18-9)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여 생겨날 때 그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현상들에 대해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같은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니?(18-10) 모든 깨달은 부처님들의 감로와 같은 가르침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끊어진 것도 아니고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不斷不常, 不一不異)(18-11) 이 깨달음은 부처님도 안 계시고, 부처님의 직제자인 성문들도 안 계셔서 그 분 들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야. 연기의 실상은 이렇게 스스로 깨달아지는 것임을 깨달아보시길!(18-12) 이렇게 용수 보살은 선언하시지!!!

 

 

19품은 시간에 대한 6게송의 짧은 이야기로, 개념적으로 시설 되어지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 시켜 준다. 만일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과거의 시간에 의존한다면 어떻게 되지?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 속에 존재해야만 되잖아. 언설의 세계는 이런 것이야! 알겠지.

댓글 3
  • 2019-10-10 11:20

    "17품의 재구성 : 부제 '업' 따윈 없다" (감독 : 다인)...............시나리오?! 잘 읽었시유. 재밌네요. ㅋㅋㅋ

    근데 저는 가면 갈수록.... 왜? 왜 용수는?....이라는 질문을 하게 되네요. (아마, 그의 논파 방법이 좀 익숙해져서... 그래서 쪼매 지루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시유~~)
    그것은 마치 육상산이 주자에 대해 "그대는 너무 번잡하고 복잡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걸까? (부처의 법을 대하는/공부하는 태도의 문제 -김성철 샘은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더라구요. 용수가 구사론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라구^^)
    아니면 구사론의 이론이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 - 연기 혹은 공 - 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부처의 법을 해석하는 이론적 문제 - 구사론의 실체론적 접근)
    아니면 둘 다 일까?

    그리고 또 하나. <중론>은 정말 체계가 없는 걸까? 1품에서 27품까지... 정말 어떤 관련도 없는 것일까? 혹시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 "무식하면 용감하다!" ㅋ)

    그건 아마도 <17 관업품>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때문일거다.

    아비달마고 중론이고 다 모르는 상태에서 '업'(까르마)을 생각할 때 우리는(어쩌면 나만? ㅋ) 보통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첫번째 생각. 까르마. 자업자득!! "맞아, 우주에는 공짜 점심이 없어" - 모든 문명은 그것을 기초로 성립된 것 같아. 문탁에서 주장하는 '선물의 원리'도 결국 그것에 연원하는 거 아냐?
    두번째 생각. 버뜨. 업과 과보. 인과를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결정론적 사고야. 우리는 숙명론에 빠지게 되지.

    아비달마에서는 업이 숙명론과 구별되는 논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게 수업시간에 신상환 샘이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게 혹시 "삼세양중인과설" 아닐까?)
    둘째는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by <아비달마의 철학>, 38쪽)

    또한 아비달마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하여, 업론과 무아설은 모순되지 않는다)" 업과 윤회의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고 한다. (위의 책, 41쪽)

    그래서 요점이 뭐냐구? 17품은 도대체 뭘 겨냥하는 논파란 말인가?...........라는, 새삼스러운 질문이 또 들었다는 거여유~~

    • 2019-10-10 11:32

      댓글로 긴 글을 쓰는 게 좀 어렵네요. 타이핑도 자꾸 에러나구. 그냥 잡설이예유.

  • 2019-10-10 14:57

    마음세미나에서는 지난 시즌에 <맛지마 니까야>를 읽었습니다.
    <니까야> 곳곳에서 붓다는 견해를 갖는 자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곤 합니다.
    사람인 이상 우리는 견해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붓다가 몰랐을 리가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견해가 옳다(혹은 그르다)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며 견해에 대한 비판의 결정판이 뗏목의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이 비유는 <금강경>에도 등장하지요.)
    다 아시다시피 뗏목의 비유는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 강물이 사이에 있을 때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결정적 도구였던 뗏목조차도
    다시 길을 떠날 때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죠. '진리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진리가 아닌 법임에랴!'
    대개의 경우 우리의 견해들은 진리가 아닌 법일 가능성이 크고
    혹은 어떤 상황에 딱 들어맞는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상황에서만의 진리라는 것을 우리들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는 어떤 견해를 세우고(가립하고), 그것 주위에서 암중모색 혹은 탐구를 계속 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당대의 핫이슈인 조국 사태와 관련한 견해들이 생각나는군요.^^)
    붓다의 교설의 토대중의 토대인 업론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신샘이 계속 강조하듯이 고대인도로부터 업론은 불교만의 것이 아니었지만
    붓다 이래 불교는 당연히 다른 주장들과 차별성이 있는 불교만의 업론을 구축해 갔습니다.
    7종의 업도 그렇고.. 또 업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와 관련된 이론들 또한 그런 것이겠지요.
    구사론에서는 인연의 종류를 6인, 4연(인연, 소연연, 등무간연, 증상연)으로 들 뿐만 아니라
    과의 종류 또한 사용과 증상과 등등 5과로(에고.. 그 어렵고 낯선 단어들을 모두 기억할 수가 없네요.ㅋ)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으니까요.
    또 인과 과의 관계에 관한 수많은 논쟁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용수가 이런 것들이 다 의미없는 것이라 생각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가 창조한 개념들은 불교적 세계관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왔을테니까요.
    35세에 성도한 붓다는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간, 스승으로서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했을까요.
    그 말들이 또 말들을 낳아 팔만사천법문이라 일컬어지는 엄청난 경들을 생산했으니 말이지요.
    아.. 저도 말이 길어지니 점점 피곤해지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몰려오는군요.ㅋㅋㅋ
    말이 말을 낳는 이런 상황에서 정확한 말을 구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 붓다의 말에 대한 갑론을박을 떠나 그 실천적 핵심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18품의 다섯번째 게송을 인용하고 싶네요.
    "업과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해탈이다. 업과 번뇌는 분별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은 희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이 희론은 오직 공성에 의해서 사멸된다."
    결국 <중론>의 각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중론>을 통해 공성에 대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그것을 그냥 무자성=연기=공이라고 순환적으로 뼈대만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다인님과 문탁님의 진지한 후기와 대론에 뭔가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댓글 쓰기를 시작했는데
    횡설수설하다 도달한 곳은 <중론> 강독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걸 왜 읽고 있지?라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단순한 질문이 되고 말았네요.^^
    ** 글구 삼세양중인과는 12연기를 해석하는 하나의 틀인데.. 그건 아마도 26품에서 다루어지지 않을까 하여 좀 미루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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