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강학원> 3회차 - '축음기, 영화, 타자기' 후기 (1)

woo3445
2020-04-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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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에서 매체의 역사로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을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드다 강학원에서는 새로운 책을 시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책입니다. 아직 책 한 권이 남아있기에 조금 섣부르긴 하지만, 키틀러의 이 책이 이번 길드다 강학원의 타이틀인 ‘미디어와 신체’와 가장 잘 부합하는 텍스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디어/매체의 발전사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그의 작업이, 제게는 ‘미디어’와 ‘신체(더 나아가 인간)’라는 각기 다른 두 단어를 일련의 흐름 속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시도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소개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구이자, 책의 서두에 놓여 키틀러 매체사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문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문장이  드러내는 바 그대로 키틀러는 이 책에서 매체의 탄생-발전-쇠퇴 곧, 물적 조건의 변화가 인간 사유조건의 변화를 어떻게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기술 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지각체계가 변화하고 지각이 각 매체에 종속됨으로써, 결국 총체적 인간이라는 상이 해체되게 된다는 키틀러의 매체사는 그 자체로 이번 세미나의 화두였습니다. 그의 논의는 이 책의 해제에서 한국어판 역자들이 얘기하는 대로, 우리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매체의 주체적인 사용’이나 ‘인간 지각의 확장’의 맥락에서 매체를 수용하고자 하는 매체 이론가들-예를 들어, 마셜 매클루언과 같은-의 관점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책을 익숙지 않은 느낌을 가지고 읽어내려갔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상황을 이루는 조건/토대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논의에 흥미를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축음기’ 파트에서는 축음기를 통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소리, 소위 소음이나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단어들의 조합과 같은 발화 등이 포착되기 시작함으로써 일어나는 여러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미나의 첫 번째 시간에 가장 많이 이야기됐던 주제는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이었습니다. 축음기가 발명되면서 소음, 즉 인간의 언어 착란이나 단어 잡탕 등이 녹음될 수 있게 되었고 무의미-무의식의 세계가 비로소 인간의 앞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키틀러의 주장은 인간의 역사가 매체의 역사로 다시 쓰이게 되는 강렬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키틀러의 매체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은 토대의 변화로 야기되는 사유조건의 변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매체의 역사로 다시 쓰이게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의지에 대한 기대 혹은 가능성이 더 이상 주된 논의의 주제로 삼아지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입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의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중추신경계가 외화된 매체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그렇다면 기술 매체의 발전을 조건으로 삼아 물적 토대를 분석해 상부구조로 나아가는 키틀러의 작업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는 계기를, 현실을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세미나의 두 번째 시간은 바로 이러한 논의, 키틀러의 매체사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이 텍스트 내에서 키틀러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슈타이얼을 읽으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치적인 경험이나, 반성과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얘기하는 바가 무미건조하다 여기거나, 텍스트를 읽는 우리에게 일말의 자극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키틀러는 축음기의 등장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왜 이런 조건에 살고 있는지를 축음기를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축음기 담론 분석이 열어젖힌 기존과는 다른 세계. 매체에 의해 변화된 그 세계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기존 체계에 맞춰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의식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는 제안합니다. “주파수 개념의 승리"가 이뤄졌지만 그럼에도 “수천 년도 넘게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음계의 협소함"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그럼으로써 소음과 주파수를 음악이라 여길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소음이 산출하는 신체 그 자체”를 포착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91) 소음과 주파수는 하나의 예지만 이로써 키틀러는 우리가 자리 잡고 서 있는 기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제안’하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을 텍스트 깊은 곳에 간수해두었던 이론가로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보입니다. 키틀러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면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준범)

댓글 2
  • 2020-04-19 10:08

    준범, 깔끔하게 정리된 후기 감사해요. 앞으로의 2주, 키틀러 세미나에서도 이 후기가 좋은 지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맞아요. 사실은 오늘 날의 우리가 놓여있는 구체적인 조건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 그리고 '변화'를 시험해 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 2020-04-20 19:39

    발제도 후기도 분명하게 핵심을 잘 짚어주시니, 읽는 사람으로서 참 좋네요 :]

    이번 세미나에서는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질문 떄문에 이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들 이 책으로 어떻게 할까? 그래서 다들 이 책을 어떻게 오늘날의 '나'와 만나게 할까?
    그래서 남은 시간도 "그래서 어쩌라고"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세미나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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