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 강학원 시즌2 두번째 시간 후기

2020-07-1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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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지의 책에는 휴머니즘으로 발생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측면을 다루면서도, 실제 유럽중심주의의 휴머니즘으로 발생한 실제 역사에 대한 언급은 삭제되어있다. 사적 유물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들을 구성해왔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그 존재들의 사라짐에 대한 언급이 없다. 휴머니즘이 어떤 존재들을 실제로 죽여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죽음을 외면해왔는지, 어떻게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선 이야기되어야 나는 유럽에서 주장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중심주의의 휴머니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선의 사과이다. 그리고 그 사과가 이론과의 정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사과냐고,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이론으로 설명되기 이전에 평평한 존재이다. 하루에 얼마나, 혹은 1년에 얼마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까. 우리는 호명되기 이전에는 평평한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호명이 인간 종의 위계를 만들어내며, 그 호명은 이름 불려진다는 관계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생성된다. ‘인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호명’의 관계 속에서 인간 종의 위계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로지가 짚은 것처럼 ‘인간’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 한정된 인간들이 현재까지 호명되어지고 타인을 호명해온 것에서 고전적 휴머니즘의 문제가 고스란히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주의로 이행된 것은 아닐까. 인간 사이의 호명 속에서도 위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호명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위계를 나는 문화자본적으로 받아들인다. 유럽문화는 분명하게 문화자본에 있어서 우위를 지니고있다. 그리고 그 문화자본의 우위 속에서 로지는 포스트휴먼을 논의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나고 자라서 프랑스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학제시스템의 물질 속에서 단단해지며, 자신들 또한 유럽중심주의의 학제시스템 속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가게 만드는 물질적 연결망이다. 그리고 그 유럽중심주의는 비유럽 또한 유럽을 중심으로 재편하게 만든다는 것에서 그 위험성이 반드시 유럽중심에서 폭로되고 해결되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사과는 성찰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한길이가 책 서문을 하나 보내주었다. 서문을 쓴 저자도 신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그는 신유물론을 중심으로 여러 학문분과의 교수와 박사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모집하여 세미나를 진행해가고 있다. 대학원 시절에 나도 이 세미나에 참여했던 적이 있어서 여전히 그 세미나를 운영하는 카톡방에 남아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학을 다녀왔고 유럽 및 미국에 있는 대학과 연구소에 있으며, 그들의 자녀들도 유럽과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한국 대학과 연구소들에서 학문분과들을 이루고 있는 행위자들이다. 이 방에서는 포스트 이론이 목적하는 유럽중심주의의 해체와 신유물론적 접근과 이들의 삶의 실제가 너무나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나의 생활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가 이 책을 통해 느끼는 기만이 비단 이 책에서만 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제 시스템 밖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본 세미나가, 왜 학제 시스템 속에서 첨예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따라가야하는지부터가 불만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유럽에서 나온 모든 학문적 성과들을 비판하고 몰살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모든 것을 불태웠던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유럽중심주의를 반대하고, 고전적 휴머니즘에 기반하여 포스트휴먼을 받아들이는 탈-인간중심주의를 비한파고자 한다면, 자신과 유럽중심주의를 분리시키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성찰에 기반한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성찰과 비판은 낭만적인 것이아니라, 유럽중심주의를 구축하고 있는 학제시스템 속에서의 이론과 그 이론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연결망으로 들어가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의미한다. 한국 학자들을 이야기한 것은, 내가 경험한 한국 학과 시스템은 이미 신자유주의적 학제 시스템 속에서 기업으로부터 스폰을 받는 까닭에 기업친화적이며 인문학은 나라의 사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안에 있는 학자들의 신유물론의 이론은 자신들의 이론들이 이러한 대학환경에서 어떠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반드시 성찰하고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유럽중심주의가 만들어낸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치경제의 위계와 종적 위계를 비교한다면, 전자는 고전적 휴머니즘에 속하는 것 같고, 후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의제에 속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두개가 융화되어 그 위계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결국 포스트휴머니즘의 의제도 유목적 경계선이 아닌 이원론 세계관의 이분법적 세계 중 한쪽 안에 자신들을 위치시키고 일원론적 세계관이 가능하리라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될 것이다.
  세미나가 끝나고, 문제제기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나의 발제 이야기를 세미나 멤버와 더 나누었다. 내게 로지를 ‘우쭈쭈’하며 읽어가면 안되겠냐고 물어봤다. 논의의 어려움과 반성가능성 속에서도 자신의 논의를 지속해가는 로지를 ‘우쭈쭈’하면 안되겠냐고 했다. 마치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남성들을 ‘우쭈쭈’해주어야 한다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나는 또 화를 내버렸다. 아시아인인 내가 왜 유럽인을,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듣지도 못한 채 내가 왜 ‘우쭈쭈’해줘야하냐고 했다. ‘우쭈쭈’는 피해와 가해의 역학 속에서 피해의 영역에서 무엇을 문제화하며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아왔는지를 외면한 채 가해의 입장에서만 행해지는 선의를 피해의 영역에게 일방적으로 이해하기를 요청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로지가 직접적으로 가해를 했다는 건 아니다. 나또한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 정치경제와 순환적 지구에서 ‘직접적 인과관계’라는 것은 환상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개념을 둘러싸고 모든 종이 피해와 가해의 역학으로 묶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예전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오늘날 어떠한 지평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윤리학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휴먼의 논의에서 책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배려나 역지사지가 책임에서 발하는 행동이 아닌 사과가 책임으로 발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종적 위계에서는 어떠한 존재든지 그 차이의 역학 속에서 한 순간은 상위의 위계에 존재하게된다면, 나는 모든 종에게 사과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 번은 ‘종’으로 인식되었던 모든 약자의 존재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이 사과는 발제문에서도 밝혔듯이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존재의 사과와 성찰은 피해와 가해가 각자 단일한 존재로서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인 경계에서 유목하는 서로의 조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피해와 가해의 사실이 분명한 ‘폭력’은 유목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조에 간에 확실한 종적 경계를 짓는 행위로 어떠한 예외 없이 다뤄져야할 것이다.

 

묻고 싶다.
-되기가 하고 싶은 건지, 하고 싶다면 왜 하고 싶은 건지, -되기라는 이론은 어떠한 해석의 정치에 위치해서 우리 각자의 연결망에 위치하게 되었는지, 소비를 필수적인 생존 요소로 작동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에서 소비없는 ‘-되기’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는 소비라는 이름 밖에서 다른 종과의 관계맺기가 어떻게 가능할지... 등등

 

  최근에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코코넛을 따는 원숭이에 관한 뉴스였다. 태국의 어느 농장이 원숭이를 훈련시켜 코코넛을 따도록 원숭이 노예를 만들었다고 했다. 원숭이들은 목에 줄이 매인 채, 코코넛을 기계적으로 따야만 했고, 코코넛을 따지 않을 때엔 지하철의 한 좌석의 크기만한 정육면체에 들어가 있어야했다. 원숭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보였고, 너무나 불안정해보였고, 계속 무언가 말(은유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짐승의 ‘울음’이 아니라 그들의 입에서 성대의 울림을 통해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잔인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제국주의적 폭력에 의해 흑인들이 당했던 일들이었고, “세 번째 천년의 시작”에서는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제3세계에 속했던 태국이 이제는 인간이 아닌 동물을 노예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더 저렴한 것들을 찾아가는 자본주의(‘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참고)의 생존 방식인 것 같다.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적 현상들은 문화적 위계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간을 모사한 SF의 영화들에서 비단 인간과 다른 종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만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수많은 SF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의 계급적 문제, 계층적 문제들이 인간 종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깊게 연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재현 논의로 흐를 수 있을 것이며, 여러 방향으로 재현의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 선택이 어떠한 연결망 속에 위치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야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태국의 원숭이는 태국의 코코넛 내수시장만으로부터 구축된 구조가 아닐 것이다. 전세계적 시장으로 여러 주체들이 연결된 복합적 연결망 속에서 드러난 현상일 것이다. 동물이 수확하는 식물을 먹게 되는 경제 순환 속에서, 채식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히 어떤 종을 소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비의 구조와 연결망이 어떻게 조직되어있는지를 알아가야하는 환경에 우리가 처해있음을 드러내야한다는 정치적 행동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원숭이 뉴스는 ‘하나’라는 양에서 충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뉴스 매체가 다루는 전쟁 현장과 난민 현장의 ‘클립’들을 보고 있으면, 수많은 전쟁의 기계들과 카메라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집, 거리, 나무, 동물들에게 포스트휴먼 이론이 어떤 의미를 생성시키고 실천하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왜 모든 존재-되기가 아니라 동물/지구/기계여야하는 걸까. 여전히 포스트휴먼 인간도 종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로지의 선택이 부르주아적이라 느껴진다.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가 그녀의 연결망 속에서 행해진 선택일 것이다.

 

 

시간 부족으로 더 논의하지 못한 나의 발제 이야기를 시간적으로 세미나-이후로서 작성한 후기(post-stories)였다.
  1장과 2장을 관통해서 가장 흥미로웠던 선진자본주의의 탈-인간중심주의와 포스트휴먼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사실 나는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이론은 언제나 무결한 것이 아니며 중립적인 것이 아니어왔다.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이 되었고, 이러한 휴머니즘적 해석을 비판하는 포스트휴먼 또한 중립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해석의 정치 속에 있어왔던 이론이었다. 가장 프론티어에 있는 이론들은 실제로 그 이론이 프론티어인 것이 아니라, 가장 프론티어라 해석하게 만드는 정치가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포스트휴먼이론이 지난 유럽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을 비판하는지와 동시에 포스트휴먼이 다시 ‘인간’을 유럽중심주의적으로 재편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비판적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두번째 시간에 우리는 로지가 써둔 문장들의 맥락이 우리 멤버들이 각자 이루고 있는 지식의 연결망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했다. 앞서 말한 이론의 해석 정치에 있어서, 현재 우리 각자의 연결망 속에서 반드시 그녀의 논의를 적확하게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지식을 읽기 위한 그녀의 연결망으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도킹할 필요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인위적으로 도킹한다는 것은 그 모든 유럽지식의 흐름과 그 흐름을 만들어낸 역사를 이해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져야할 것으로 인식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발제의 형식 또한 달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 글이라는 형식으로 우리가 편입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그 지적 연결망을 드러내기 위해서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필요하고 그 레퍼런스들은 이미 학제가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만들어져있는 특징으로 인해 유럽중심주의로 편입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세미나 마지막 시간에 영이 얘기해준 영상을 예로 들어본다면, 글이 아닌 영상을 보며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이고, 음악을 들으며, 글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 -되기를 감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다른 맥락속에 있는 글을 써올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 4
  • 2020-07-16 00:50

    정확한 워딩이 '우쭈쭈'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엇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표현을 통하여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잘 전달되지 않고 오해된 것 같아 댓글을 남깁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1
    우선 과연 규혜의 말처럼 저자가 ‘이탈리아와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나고 자라서 프랑스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글을 쓰고 있는가? 그렇다면 "설명책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책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유럽과 다른 곳에서 이들의 역사가 치명적인 배제와 자격 박탈의 역사였기 때문에, 이 ‘타자들’은 권력과 배제의 문제를 제기한다. 휴머니즘의 유산을 다룰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윤리적 설명책임(accountability)*이 필요하다. 토니 데이비스는 그 점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모든 휴머니즘은 지금까지 제국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어떤 계급, 어떤 성, 어떤 유전체에 이로운 특정한 강세로 말한다. […] 인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은 범죄를 거의 떠올릴 수 없다” 정말 그렇다.(26-27)”

    그리고 설명책임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accountability’는 자기 자신에게 귀속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하는 윤리적 책임을 의미하는 말로서, 브라이도티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유럽의 지식 주체들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와 그 역사가 현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설명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27)” 서두만 보더라도, 이미 브라이도티는 ‘휴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유럽중심주의적인 것인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2
    두 번째는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 네트워크라고 추측되는 이들―규혜가 발제문에서 이른바 '역사, 문화적 어휘의 카르텔'이라고 강력하게 표현한 이들―의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한계’로서 규정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규혜는 브라이도티가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언어’를 비판하고 있다는 지점을 지적하며 그것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아마도 히토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려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란 ‘명명하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물, 생명, 비-생명을 포함한 ‘어떤 것’으로부터 잠재성 혹은 역능, 역량potentia을 읽기보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선언하고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반대로 그것의 역량 그 자체를 우리는 ‘사물의 언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브라이도티가 좋은 학교와 그를 통한 네트워크를 활용해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유럽 지식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경향성 또한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을 바탕으로 브라이도티의 모든 말들을 곧 ‘인간의 언어’라고 판정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유럽어’가 인간의 언어인 것이 아닙니다. ‘유럽어’에 비해 ‘한국어’가 ‘사물의 언어’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요. 그것의 특정한 사용방식, 그것이 대상에 명령(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모든 언어는 우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하는 방식, 지시하는 방식이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이름 짓기’를 의심하는 브라이도티의 텍스트가 인간의 언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가 유럽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자격 혹은 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더 그를 그에게 부여된 이름으로, ‘인간의 언어’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규혜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존재든지 그 차이의 역학 속에서 한 순간은 상위의 위계에 존재하게 된다면, 나는 모든 종에게 사과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상위의 위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가 갑자기 상위의 위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나요? 제가 남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모든 여성에게 갑자기 제가 남성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에게 위협을 느끼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저에게도 위협을 느낄 것입니다. 이때 사과는 그 위계를 재생산할 뿐 그것을 바꾸지 못합니다(안희정도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박원순도 유서에 미안하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이 위계에 저항하는 방법은 그것을 벗어나는 행위성을 통해 계속해서 이 이름들을 바꿔나가는 실천들일 것입니다(만약 규혜의 ‘사과’가 제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행위성-실천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제 생각에 브라이도티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과가 하나의 시작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3
    마지막으로 규혜가 묻고 싶다는 것 '-되기'. ‘-되기’는 제 생각에 배려나 역지사지가 아닙니다. 배려나 역지사지는 일반적으로 상대를 약자나 소수자로, 혹은 특정한 무언가로 규정한 뒤에야 가능한 것이죠. 반면 ‘-되기’란 애초에 수행적이고 구성적인 개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토끼를 귀가 크고, 똥을 많이 싸고, 번식력이 좋은 동물이라 파악하죠. 그러나 토끼의 수행성, 내재적 원리와 강도intensity는 그런 표면적 사실들과는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각각의 토끼 개체들은 ‘토끼’라는 거대한 범주로도 묶일 수 없으며 또한 다른 강도를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들뢰즈는 규혜가 말한 것처럼 《천의 고원》에서 '모든-존재-되기'를 말합니다. 그것은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아마도 ‘조에-되기’라 불릴 수 있을 것이며, 각각의 동물, 지구, 기계 되기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향하는 것 같습니다.

    브라이도티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물-되기의 핵심은 제 생각에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동물을 이분법적으로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고, “동물들을 획일적으로 감정이입이라는 종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의 상징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동물/인간 “각각의 ‘본성’을 혼종화 하고 변화시키고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중간지대를 전면에 드러내는 변형과 공생의 관계(106)”의 실험. 아마도 세미나에서 나왔던 맹견의 예시―맹인을 안내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 그의 눈이 되어주는 개의 예시가 저는 더 없이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개의 눈이 된 인간은, 그 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때 개와 인간은 동시에 새롭게 구성됩니다.
    지구-되기란 지구를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지구중심적(브라이도티는 ‘지구중심적인 것’이 사실은 다시 의인화의 늪으로 빠질 것을 단단히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으면서 그 두 가지가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 것임을―스피노자주의적 일원론―상기시키고, 인간적 자연을 재검토하도록 하는 모든 행위들입니다.
    또 기계-되기는 사실상 “동물과 지구행성 거주지 사이의 공생 관계와 다르지 않다”고 브라이도티는 말합니다. 이것의 핵심은 ‘스마트 기술’이 열어젖힌 “횡단적 관계들”의 가능성입니다. 물론 이것에 빈번한 회의감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세미나(시즌1, 미디어와 신체)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 기계가 우리의 인식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를 넘어 브라이도티는 오늘날 유전공학과 정보기술이 열어젖힌 필연적인 “관계의 우선성, 상호의존성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 그리고 이 윤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비인격적 ‘생명’”에서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실천들에 그는 ‘-되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텍스트에는 규혜가 발제에 붙인 괄호 안 ‘(인간의)-되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인간의)-되기’를 얼마나 세심하게 경계하고 있는가를 보며 저는 감탄했습니다.

    규혜가 발제문의 끝에 인용했듯 브라이도티는 다음과 같이 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되기’, “이러한 강도 실험들은 ‘상식적 믿음(doxa)’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한 공유된 실천(praxis)이다. 나의 유목적 주체 개념은 이러한 접근을 구현하며, 관계성이 행하는 존재론적 역할을 전경화함으로써 비단일적 주체성에 윤리적 설명책임을 결합시킨다.(121)”

    정리하다보니, 적절한 예시를 찾아서 넣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저도 규혜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위계 속에서 언제나 누군가의 위에 있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사과’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은 어렵고, 드물고, 계속해서 우리는 휴머니즘의, 자격론의, 정체성과 주체성의 늪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여전히 포스트휴먼 인간도 종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로지의 선택이 부르주아적이라 느껴진다.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가 그녀의 연결망 속에서 행해진 선택일 것이다.’ 규혜는 계속해서 그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인간임을, 유럽인임을 확인하며 분노합니다. 그러나 브라이도티는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휴머니즘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는 주장은 반어적으로 의지와 행위성에 관한 휴머니즘의 기본적 가정에 동의하는 셈이다(44)” 저에게는 이 말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책의 내용이, 그에게 인간 없는 포스트 휴먼, 무결한 존재가 오히려 doxa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여기, 인간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끝없는 실험들praxis이 필요하다는 호소로 느껴집니다.

    말이 언제나처럼 또 너무 길어졌습니다. 횡설수설. 어쨌든 '우쭈쭈'는 비서구인인 우리가, 서구인인 그를 봐줘야한다는 의미보다는, 다양한 실천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그의 말을 잘 해석해봐야 한다는 생각ㅡ그러나 너무 화가 나있는 규혜의 태도ㅡ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규혜가 전달하는 뉘앙스처럼 비서구인인 우리의 서구 권위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텍스트에서 세심하게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우리 모두가 빠져있다고 생각되는 존재론적 한계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 가능성들에 무게를 두고 함께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입니다.

    • 2020-07-19 13:00

      음 제가 말한 사과는 성찰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리고 얘기해준대로 ‘사과하면 끝이냐?’ 안희정과 박원순의 사과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사과라 생각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과의 상상력, 성찰의 상상력이 부족한 거라 생각해요. 미투가 제게 사회적으로 큰 의미였던 것은, 저 또한 미투로 드러나는 연결망 속에 위치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과, 그렇다면 나는 연결망 속에서 사과, 용서, 성찰 등을 관계 속에서 어떻게 타자화, 배제 등의 이분법적 관계 속에 위치하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찰은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이나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구조적 접근이나 낭만적 개인의 반성과 같은 형태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예를 들어주신 박원순과 안희정의 사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어쩌면 제게 로지의 성찰은 고전적휴머니즘에 기반한다고 생각이 드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주어가 결국 ‘나’가 아닌 누구는, 어떤 이론은, 어떤 사건은 등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것에서 그녀의 문제의식은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발합니다. 그리고 그 외부는 유목적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성이 아닌, 나와 외부를 철저하게 나눈 이분법처럼 다가옵니다. 첫번째 두번째 시간 모두 제가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 느꼈던 ‘기만’의 감정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지도 모릅니다.
      긴 생각의 정리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글을 쓰면서 제 생각도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동의와 비동의의 관계가 아닌 다른 모습일 수 없을까요.

  • 2020-07-18 17:13

    먼저 저는 규혜가 발제를 해온 내용과 고민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기뻐서에요, 참 좋구, 다행이라 생각해서요. 맥락은 저랑 규혜가 길드다 미디어와 신체 시즌 1 뒷풀이에서 했던 이야기들, 규혜의 고민 지점들을 지금 여기까지 데려와서 우리들과 규혜 스스로 앞에서 당신의 언어로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어요. 감히 제가 규혜의 변화를 (나의 관점으로 성장으로 인식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관계를 계속 형성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기뻤어요. 저는 그 ‘우리’에 방점을 계속해서 찍고 싶어요. 마음 고생 많고, 지금도 많을테지만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요. -> 저도 저의 이야기들을 고민들을 잘 못내어놓는 사람이여서 더 감정적으로 공감해서 더 기쁜가봐요!

    저는 후기를 읽고 드는 생각은 이래요.

    유럽중심주의와 학교-네트워크를 '유럽'과 '학교'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 이것은 마찬가지로 유럽과 학교네트워크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담론들을 형성하고 권력의 도구로써 사용했던 방식을 재생산하는 일 아닐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유럽'의 학문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학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유럽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권의 문화와 언어들을 박탈한 방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유럽과 학교네트워크가 해왔던 그 곳의 속하지 못한 배제된 사물과 인간들을 또 다른 '타자'로 만드는 일이 아닌가요? 서양이 동양을 동양이라는 이유로 서양 담론에서 동양을 타자화시키고 권력을 생산했듯이, 우리가 서양을 서양이라는 이유로 배타적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유럽중심적인 사고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규혜의 이야기처럼 '유럽'이기 때문에‘를 비판 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 곳에서 사과와 성찰의 움직임을 만드는 일도 무척 중요합니다. 다만 저는 그 연장선에서 사과의 방식으로써 브라이도티와 21세기 몇몇 사상이 유럽중심주의를 파괴하는 움직임들을 계속해서 전복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생각해요. 그 가능성들을 열어주는 텍스트로써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럽 인간의 언어를 부수고, 계속 그 과정 속에서 재구성 하고 재구성 되는 ‘인간의 언어’를 저는 감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브라이도티가 유럽인이기 때문으로 배타적으로 대하기 보다, 브라이도티의 언어와 가능성을 통해 다른 세계를 상상 할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구요. 물론 이 지점에서 규혜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유럽중심중의를 비판하는 일만큼 유럽의 언어를 재해석하는 ‘우리’가 실천적으로 행하고 있는 지금, 여기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둘 중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다만 저는 현재 같은 텍스트를 읽고 있고, 그 유럽의 지식을 그 '인간의 언어'들을 재해석하고 재전유하는 '우리'에 집중하고 그 가능성들을 규혜랑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우리‘는 인간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되기에 대해서
    저는 -되기란 새로운 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히지 않게 만드는 언어, 기호이며, 행위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기존 ‘근대적 주체‘에서는 완벽하고 자율적인 인간 개인 주체만을 호명했다면, -되기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그 ’사이의 지대‘에서 변신을 일으키는 지점 아닐까요? 그렇기에 -되기는 사이의 지대를 형성하고 그 사이의 생성을 계속해며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양과 동양 사이의, 자민족과 이민족 사이에 그 새로운 지대를 형성 할 수 있는 의미에서 -되기에 접근하고 있어요.

    “들뢰즈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생성은 가장 차이 나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들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는 분류상의 거리라기보다는 스케일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생성은 거시적인 관념과 미시적인 감각 사이에서 일어난다. 생성은 새로운 속도, 새로운 정동을 만들어내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과 사유 방식을 개방한다.“ - 들뢰즈, 괴물의 사유

    정말로 저는 규혜랑 저 ‘사이의 지대’를 그리고 같이 공부를 하는 우리들 ‘사이의 지대’를 닫는 것이 아닌 열어내는 방식으로 형성해나가고 싶어요. 그 사이에서 우리의 생성이, 새로운 속도가, 새로운 감각이 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요. 저는 이번 시즌 에세이 제목을 정했어요. <차이에서 ‘차이’로, 차이를 재전유하기!> 훔쳐서 쓰지 마세요 헷^^

    • 2020-07-19 12:46

      ㅋㅋㅋㅋㅋㅋㅋ훔치지 않을게요 헷

      그럴 수 있는 관계라는 말이 따뜻하네요.
      말씀해주신 것에서, ‘새로운’ ‘우리’ ‘관계’라는 단어들이 잔상에 남습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것은, 그 ‘새로움’이라는 것에 있어서, ‘주체’라는 것에 있어서, 그 진보적 세계관에 있어서 우리가 받아들일 때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진보 또한 문화적 자본에서 먼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학교-네트워크라는 것으로 한길이 비교 예시를 잘 들어준 것 같아서 고마워요.
      글이 아닌 실천으로 이번 세미나에서 어떠한 ‘우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실험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함께 고민해주고 긴 글 시간 내어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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