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중등인문학교 S2 네 번째 시간 후기

명식
2020-01-14 14:50
57

 

  안녕하세요, 2019 중등인문학교 튜터를 맡고 있는 명식입니다.

  이번 주는 2019 중등인문학교 S2 <집이라는 낯선 곳> 네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시우와 서인이가 집안일로 오지 못해, 열 명의 친구가 함께 책을 읽었는데요. 이번에 읽은 책은 오스트리아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동화 『오이대왕』이었습니다.

 

  『오이대왕』의 주인공인 볼프강은 할아버지,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동생 닉과 함께 사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이처럼 생긴 괴물인 ‘쿠미-오리 2세’, 즉 오이대왕이 느닷없이 집에서 나타납니다. 못생기고 거만하며 강압적인 오이대왕을 모두가 기피하지만 오직 아빠만은 유독 오이대왕의 말을 신하처럼 받듭니다. 그로 인해 아빠에 대한 가족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그 과정에서 오이대왕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집안 모두가 아빠를 두려워하며 아빠의 말을 억지로 따랐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함께 힘을 합쳐 아빠와 오이대왕을 떼어놓고 오이대왕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여 마침내 성공합니다.

 

  『오이대왕』은 동화책인 만큼 길이도 그리 길지 않고 삽화도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그림이 들어가 있는 책을 읽어본 건 오랜만이라는 친구들도 꽤 많았지요. 진지한 가족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판타지 같이 전개되어서 당황했다는 가람이도 있었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어린 아이들이나 읽는 책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오이대왕’의 메타포(은유)는 분명 어떤 중요한 문제를,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이대왕』에 대한 감상 중에서 가장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한 내용은 ‘짜증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이 재미없어서 짜증이 났다는 게 아니라, 너무나 제멋대로인 볼프강네 아버지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는 것이었지요. 멋대로 딸에게 과외를 시키고 돈은 다 저축하라고 명령하질 않나, 딸과 아들의 노는 것부터 연애, 옷차림까지 사사건건 제한하질 않나, 억지로 소풍에 가야한다고 우겨대질 않나, 모두가 싫어하는 오이대왕을 기어이 우겨서 집에 남겨 두질 않나. 다른 모든 가족들이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하며 그의 눈치를 따르지요. 볼프강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집안의 왕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집안의 ‘왕’이란 어떤 뜻일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걸 하고 그걸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집에서 오직 홀로 ‘자유’로운 존재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저번 시간에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다 하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런 ‘자유’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아버지도 사실은 ‘자유’롭지 않을 겁니다. (실제 역사 속 ‘왕’들도 신하들의, 백성들의, 교회의, 나라 전통의, 다른 왕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겁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아버지가 수행해야 하는 책임, 아버지가 행해야만 하는 권리입니다. ‘가족’이란 단위에서는 모두에게 그러한 자리가 있습니다. 지켜야만 하는 자리.

 

  우리는 먼저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빠는 누구인가?’ 우리 아빠가 아니라, 학교에서, TV에서, 인터넷에서, 책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말하는 ‘아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무얼 해야 하고, 무얼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은 필요하지 않은가? 그에 대해 여러분은 이런 답들을 썼지요.

 

  - 회사에서 돈을 버는 사람, 집안의 큰일들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 아이를 가진 남자, 집의 기계들을 고치고 운전을 하는 사람, 집안일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 집에서는 주로 쉬는 사람, 힘들어도 자기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

 

  이것이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조금 낡은 관점이지만 ‘세상’은 아버지란 존재를 이렇게 그려냅니다. 그는 돈을 벌어와 집안의 경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고, 그러한 책임을 군말 없이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며, 대신 세세한 집안일 같은 것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소위 ‘큰일’들을 결정하고 가족들에게 명령하는 사람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이 전통적으로 아버지에게 요구되는 역할입니다. 볼프강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후반부에서 볼프강의 아버지는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오이대왕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는데, 그가 왜 그렇게 승진에 매달렸는가를 만약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어쩌면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답할지도 모릅니다. 승진을 하고, 더 많은 돈을 가족들에게 벌어다주고, 가족들에게 더 우러름을 받고,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를 더 잘 해내기 위해서.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그런 볼프강 아버지의 선택은 다른 모든 가족들을 오히려 더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역할을 더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다른 가족들은 더 숨막혀했고, 그를 두려워하면서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가족들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지요.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볼프강의 아버지는 언제나 다른 가족들과 혼자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모든 가족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마무리되는 엔딩에서도 볼프강의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일하며 보내야 하며, 자기 감정을 시시콜콜 다른 가족들과 나누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 명령‘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명령 ‘받는’ 다른 가족들과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비단 볼프강 아버지 뿐 아니라, 전통적인 가부장적 아버지의 자리는 원래 이렇게 다른 가족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드라마 등에서 흔히 나오는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나서 집에서 겉도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사실, 뜬금없이 나타난 괴물 ‘오이대왕’은 이런 ‘아버지의 자리’가 만들어내는 헛된 목표를 빗대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것이 아버지가 책임을 다 하는 것이며 가족들을 위하는 거란 헛된 믿음과 속삭임 말입니다. 아무튼 그 속삭임의 화신인 ‘오이대왕’은 ‘오이 백성’ 쿠미오리들의 쿠데타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볼프강의 가족들은 그런 식으로 아버지를 쫓아내길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볼프강 가족들은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볼프강네 가족은 그러다 치고, 우리에게는 그게 가능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아빠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고, 취미는 뭐고, 꿈은 뭐였고, 친구들은 누가 있고, 어렸을 땐 어땠고 젊었을 땐 어땠고……. ‘아빠’로서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우리 아빠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버지의 자리’에 두지 않고서, 내가 알고 있는 아빠는 어떤 사람인가?

 

  이 이야기는 밝히길 원치 않는 친구들도 있었기에 구체적으로 쓰진 않겠습니다. 다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썼고,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았지만, 사실 저런 질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친구들은 드물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가족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으며 그 자리 바깥에서 가족들 각각을 마주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족이란 시스템의 강력한 힘이며, 어쩌면 때로는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런 이야기도 했었지요. 근 수십 년 사이, 가족 시스템은 아주 큰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의 자리’, 즉 아버지의 역할이었던 것들 중 상당수는 이미 ‘어머니의 자리’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가령 ‘회사에서 돈을 버는 일’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아버지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집안일들의 결정권’들 또한 더 이상 아버지들만의 것은 아니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이대왕』을 통해 ‘아버지의 자리’를 살펴보았듯 ‘어머니의 자리’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김고연주의 『우리 엄마는 왜?』를 통해 만나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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