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2회] 관중, 능력주의 시대에 필요한 것

진달래
2021-09-22 22:42
362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관중은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힌다. 그런데 자로의 질문을 보면 이 당시 관중에 대한 다른 평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중이 공자 규를 모시고 있었으면서 규가 죽었을 때 함께 죽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례대로라면 규가 죽었을 때 관중이 함께 죽는 것이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관중은 규를 제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제나라로 들어가는 소백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백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자의 제자들이 보기에 관중은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인물로 비춰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관중은 인한 사람이 아니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 따라 죽지 않았고 또 환공을 도왔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했고, 천하를 한번 바로잡아 백성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보통사람처럼 사소한 신의를 지킨다고 스스로 도랑에서 목을 매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와 같겠는가.”(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헌문」18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제자들의 생각과 달랐다. 공자는 관중의 공적을 높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 관중을 인하다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답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공자의 입장에선 관중이 규를 따라 죽지 않고, 제 환공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관중이 썼다고 알려진 『관자(管子)』를 보면 백성을 풍족하게 해 주는 것이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 뿐 아니라 관중은 제 환공에게 명분 없는 싸움을 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을 배부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공자 역시 제 환공과 같은 제후를 만난다면 자기도 하고 싶은 일로 여겼다.

 

관중은 그릇이 작다

 

관중은 『논어』에 네 번 등장한다. 이렇듯 모두 칭찬의 말인 듯싶으나 한편, 공자는 관중을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평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어떤 이가 말했다. “관중은 검소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집이 세 채나 있었고, 가신에게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만이 병풍으로 문을 가릴 수 있는데 관중도 병풍으로 문을 가렸다. 임금만이 두 나라의 임금이 회합할 때 반점(사이에 두는 탁자)을 두는데 관중도 반점을 두었다.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구인들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然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팔일」22

 

공자가 관중의 업적을 높이며 칭찬했으면서 이렇게 그의 그릇이 작다고 한 것은 사실 어떤 면을 보고 한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공자의 말을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한 혹자의 질문을 통해 공자가 관중의 어떤 면을 지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菅晏列傳)」에 “관중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현신이었으나 공자는 그를 소인이라고 하였다.(管仲世所謂賢臣,然孔子小之)”고 적었다. 아마도 사마천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공자가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평한 이 문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관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공자는 관중이 제 환공을 패자로 만든 것을 문제 삼지 않았으나 후대에 맹자는 관중이 왕도(王道)를 행하려 하지 않고, 단지 제 환공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머물게 한 것을 비난했다. 북송의 소순(蘇洵)은 「관중론」에서 관중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혼란을 예견했을 터인데도 그것을 막지 못함을 한탄했다. 제 환공은 재위기간 내내 관중에 의지하여 정치를 했기 때문에 관중이 죽을 때 그를 대신 해 누가 정치를 맡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이 때 관중은 절대 등용해서는 안 되는 세 사람(역아, 개방, 수조)을 언급하는데 제 환공은 처음에는 관중의 말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둠으로써 말년에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제 환공이 제대로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들이 제후의 자리를 두고 싸우느라 환공의 장례를 제 때에 치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제나라는 이 시기에 국력이 많이 쇠해졌다.

그런데 공자가 혹자와 나눈 대화를 보면 이전 관중의 평가들과 달리, 공적이 아닌 평소 행실에 대해 문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이 집을 세 채나 가지고 있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둔 것을 보고 사치스럽다고 했다. 제후처럼 집을 만들고 제후나 쓸 수 있는 물건을 자기 집에 가져다 놓는 것은 예를 모르는 행동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논어』에 제 환공이 백씨라는 사람의 땅을 빼앗아 관중에게 주었음에도 백씨가 죽을 때까지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고, 『사기』에도 관중이 사치스러웠음에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공자가 예를 모른다고 했지만 관중이 주나라를 침략한 융적을 물리치고 주 양왕에게 갔을 때 양왕이 그를 상경(上卿)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자기는 제후국의 하경이므로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니까 관중의 흠이라면 좀 과하게 사치스러운 정도,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관중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하고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왜 굳이 이를 문제 삼았으며, 사마천은 관중을 소인(小人)이라고까지 칭했을까?

 

능력주의의 함정

 

어쩌면 공자가 관중에 대해 ‘그릇이 작다’고 한 것은 그저 관중이 그의 업적에 어울리는 좀 더 훌륭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내비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말이 『논어』의 여러 편 중에 「팔일(八佾)」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다. 「팔일」편은 대체로 당시 대부들이 제후와 맞먹는 부를 누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의 사치스러움이 단지 검소하지 않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예를 모른다고 한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 사회 혼란은 이렇게 예를 지키지 않는 것, 그러니까 각자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는데서 온다고 보았다. 거기에 덧붙여 공자가 살았던 시기가 춘추시대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공자가 관중의 사치스러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것은 이것이 가지고 올 파장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관중은 공자보다 약 100년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이렇게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최고의 재상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탁월한 실무 능력 때문이었다. 포숙아는 관중을 제 환공에게 추천하면서 제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관중을 죽여도 좋으나 패자가 되고 싶다면 관중을 등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관중에 대한 평가는 당대보다 공자가 그의 업적을 칭하고 난 뒤, 오히려 공자 사후 전국시대에 이르러 높아졌다. 일례로 『한비자』를 보면 “지금 나라 안의 백성이 모두 정치를 논하며 상앙이나 관중의 책을 소장한 사람이 집집마다 있다(今境內之民皆言治 藏商管之法者家有之)”고 하였다. 아마도 관중의 탁월한 능력과 그에 의해 누리게 된 부(富)와 권력이 전국시대 지식인들이 바라는 바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시대는 어떠한 배경 없이도 오로지 능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많았던 시대였다. 제후국들은 7개로 통합되었고, 각 나라들은 누구보다 부강해지기 위해서 각지의 능력 있는 인물들을 끌어 모으기 바빴기 때문이다. 이 당시 소진이나 장의와 같은 이들은 평민출신으로 관중에 버금가는 부귀와 명성을 얻었다. 이렇듯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의 가장 큰 매력은 출신이나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이렇게 누리게 된 부와 권력을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주목한 것을 보면 능력으로 출세한 것 자체라기보다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부보다 더 한 것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태도이다.

 

 

능력과 공정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공정(公正)’이 화두가 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 공정함은 무척 예민한 일이 되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통과한 이들은 노력으로 얻은 보상은 당연한 것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혜택’으로 흔히 말하는 ‘부모 찬스’와 같은 것에 민감하다. 자기 노력으로 얻은 자격, 즉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부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가를 생각해보자.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정하다는 착각』 52p

 

능력주의는 자기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스스로 많은 재화를 취득하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게 만들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과도하게 사치스러운 것에 당당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성공이 과연 능력만으로 혹은 노력만으로 가능한가를 묻는다. 성공은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되는 경우도 있고, 그만큼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관안열전」에 1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나는 관중과 안영(안자)을 함께 배치했다. 그리고 그들의 공적이 아닌 그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기록했다. 특히 관중에 대해 사마천은 그의 친구인 포숙아의 행동과 비교하여 당시에도 관중의 능력보다 관중의 사람됨을 알아본 포숙아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관중의 능력이 탁월한 것은 맞지만 포숙아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관중은 없었을 것이다. 공자 규를 함께 모시던 소흘은 관중에게 자신은 죽어서 신하의 예를 다할 테니 살아서 신하의 예를 다하라고했다. 제 환공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듯 관중의 성공은 관중 혼자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공자는 관중의 능력에 대해서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관중을 ‘소인’이라고 칭하면서 그를 알아본 포숙아를 칭찬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안영의 삶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능력만큼 대가를 받는 것은 공정한 것일까? 관중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 능력으로 누린 사치스러움에 대해 지적한 공자의 이 한 문장이 우리 시대 능력주의의 공정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공정함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댓글 5
  • 2021-09-23 18:32

    몇년전 중국에 갔을 때 도심 중앙 벽마다 논어의 핵심 키워드들이 프린트돼 있어 놀랐다. 논어의 말들이 아직 유효한가? 그런데, 논어에 나올 법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유독 눈이 갔다. 공정...  당시는 공정을 내건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라 공정이 세계 유행인가 싶었다. 진달래샘 글을 읽으니, 공정이란 말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능력주의의 횡포를 포장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 2021-09-24 20:08

      그러니까요.... 그러고 보니,  도대체 원래 처음부터 그런게 있기나 한 거였어 ?  라는 허무주의 (?) 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으네요...흠...

  • 2021-09-23 19:08

    관중은 오랑캐로부터 중국의 예를 지켜냈지만 스스로는 분수에 맞지않는 사치로 예를 벗어났다는 공자님의 평가는 다시 생각해볼만 한것 같습니다

    공적은 공적 잘못은 잘못

    우리가 잘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어버리는 잘못을 하는 일이 적지 않잖아요

    관중의 이야기를 능력주의 공정과 연결란 진달래샘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명절연휴에 글 낳느라 애많이 쓰셨습니다 짝짝짝!!!

  • 2021-09-23 23:33

    관중에  관한  평가를 능력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 이 글을 읽자니, 포숙이 알아본 것도 관중의 인간됨이 아니라  '능력'이 아니었을 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 2021-09-24 21:36

    능력과 공정, 한번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아요.

    그런데 관중의 사치함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댈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관중의 능력으로 중원을 안정시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바를 따지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수도 없을것 같네요. 도덕성의 문제라면 모를까. 

    갑자기 헷갈리네요. ㅋㅋ

    질문을 만드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2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18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67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71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19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