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클래식 주체의 해석학3: 아스케시스

요요
2021-07-20 12:21
398

이 뜨거운 여름, 금요클래식을 신청한 건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번째 목적은 문탁님이 열심히 공부해서 잘 숙성시킨 푸코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거였다.

이 목적은 충분히 성취되고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노트북 앞에만 앉기만 하면 머리 속으로 새로운 지식이 흘러들어오니 이 얼마나 간단하고 좋은가! 지난번 <세미나책>북콘서트에서 여울아는 자신이 세미나주의자라며 강의는 뭔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이 여름, 나는 강의주의자가 되고 싶은 심정이다.ㅋㅋ

 

두번째 목적은  <주체의 해석학>을 완독하는 거였다. 

강의로 들은 것은 워낙 쉽게 휘발되는지라 이 기회에 강좌의 기운에 힘입어 <주체의 해석학>을 읽어보자고 발심했다.

그런데! 푹푹찌는 날씨에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려 하니, 아~ 이거야 말로 고행이고, '아스케시스'구나!! 탄식이 절로 나온다.^^

 

3강까지 강의를 듣다보니 <주체의 해석학>에서 헬레니즘과 스토아주의 시기의 자기배려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중세기독교가 행했고 이후 근대로까지 이어진 주체화 방식과는 다른 주체화의 형상을 서구의 역사에서 발견하기 위한 것임을 알겠다. 물론 강의에서 계속 강조되었다시피 그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적 자기배려와 확실한 변별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강의 개요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스토아윤리에 방점을 두고 <주체의 해석학>을 읽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지금 스토아 윤리가 제시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에피쿠로스학파, 견유주의, 스토아주의 등, 비슷한 시기의 각 학파마다 다르게 제시한 삶의 양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닐 터이다.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주체화해가고 있는가, 라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인문학 공부를 통해 어떤 다른 삶의 양식을 발명하고 있는 걸까? 스토아윤리는 그런 질문을 전개해 나갈 때 하나의 준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강의의 마지막 파트가 바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자기배려를 해방의 양식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푸코의 대답 말이다. 푸코는 "대체로 해방은 자유의 실천을 확립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유의 실천, 사려깊고 신중한 자유의 실천이 아니라면 윤리가 무엇이란 말입니까?"라며 윤리를 정식화했다. 자기배려는 결국 삶의 윤리, 삶의 에토스를 만들어내며 내가 자유를 실천하는 다른 존재로 변형되는 것이라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사실 우리에게도 이미 자기배려의 테크네를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가르침들이 있다. 이천오백년 동안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삶과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는 불교가 있다. 삶의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유가나 도가의 고전들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불교, 유가, 도가 등을 신앙의 대상이나 지식의 축적(데카르트적 자기인식)으로서가 아니라 '사려깊고 신중한 자유의 실천'(자기배려)의 양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스토아 용어로는 '전향(conversion)'으로서의 공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와 관련해서 항상 아쉬운 점이 있다. 공부를 덜 해서 그런걸까, 공부만 해서 그런 걸까, 공부하는 방식이 문제인 걸까, 어떻게 이 아쉬움을 해결해 가야 할까?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며 새삼 다시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댓글 2
  • 2021-07-22 01:21

    지금 여수 밤바다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요요샘의 마지막 뼈 때리는 말씀에 패드를 두들깁니다.

    ’공부를 덜해서’, ‘공부만 해서’, ‘공부하는 방식이 문제라’, 어느 것 하나에도 살포시라도 빠져 나가지지가 않네요.

    그래서인지 ‘전향’이란 말 앞에서 ‘비전향 장기수’가 똭! 떠오르면서

    제 머리속 ‘전향’은 나쁜 건데

    자꾸 푸코가  ‘전향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듯해, 공부는 ‘전향적으로’에 선뜻 동하질 않더라구여.

    이건 절대 ‘아스케시스’가 힘들어보여 핑계를 대는게 아닙니…

     

    그나저나 ‘자기 배려’의 테크네는 고대의 동서양이 어쩜 이렇게 찰떡처럼 한 목소리인지 

    푸코의 스토아 해석을 부처님 말씀이나 맹자의 말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더라구여. 

    삶의 지혜는 이렇게 간결한데 인간만 점점 더 복잡해져서 푸코는 다시 고대로 돌아간 것일까요?

     

    벌써 마지막이네요. 이제 좀 푸코 아저씨한테 ‘말걸기’를 해볼까하는데 말이죠.

    ’순삭강의’에 헤헤거리는 ‘강의주의자’였습니다.

     

     

     

     

     

  • 2021-07-22 10:10

    제 책의 '강의 상황' 제목 페이지에는 "푸코는 어떤 의도로 이 강의를 했는가?"라는 질문이 적혀 있네요.  2년 전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며 자꾸만 올라오는 이 질문을 조금이나마 해결해보고 싶어 읽던 도중에 강의 상황을 찾아 읽으며 써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강의를 시작하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연표'!를 보고 문탁샘은 푸코의 이 강의가 놓여 있는 맥락을 파헤치고 고민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까... 싶었습니다. 

    문탁샘께서 인용하신 아도의 말을 보면 "철학적 담론은 생의 선택, 실존적 선택권으로부터 기원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흔히 생각하듯 (또는 제가 믿어왔듯이..) '먼저 참된 담론을 찾고 거기서 따라나오는 실천적 방법대로 산다!'와 정반대입니다. 푸코는 이 책에서 참된 담론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찾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참된 담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자신을 진실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말했던 스토아 학파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여전히 이 지점에 붙들려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는 걸 내가 안다면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겠지, 정말 그런 것인지 봐야 하겠어,가 여전히 제 방식인 것 같습니다. 마치... '의심하는 도마'가 된 기분이네요. 

    그리고 또 하나, 이번 강의를 들으며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주체화 양식이 놀랍도록 기독교적 실천 윤리와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기독교의 도덕은 타자 배려에 자기 포기인 반면 스토아의 윤리는 철저히 자기를 중심에 두는 자기 배려라고 구분짓는 것 같지만, 그 구체적 실천은 너무나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 둘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요. 스토아 공동체에 들어가 타자의 도움을 받아 참된 담론을 수용하고 재활성화하는 에토스가 기독교 공동체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강의 시간에 기린샘이 질문하셨듯 도덕적 코드의 내면화와 윤리적 실천이 어떤 지점에서 갈라지는지...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게 <주체의 해석학>은 알쏭달쏭 미로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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