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후기]바람과 풀에 대한 생각

요요
2021-05-2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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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의 군진(君陳)편을 마쳤다.

군진은 주나라 성왕 시기의 사람이다.

주공 밑에서 일을 배웠고 성왕이 보기에 덕이 있는지라, 주공이 죽은 후에 군진에게 낙읍을 다스리게 했다.

군진편은 성왕이 신하 군진에게 낙읍을 맡기면서 한 말을 모았다. 

성왕이 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凡人未見聖 若不克見 旣見聖 亦不克由聖 爾其戒哉 爾惟風 下民惟草(4장)

사람들은 성인을 아직 보지 못하였을 때는 마치 능히 보지 못할 듯 하다가

이미 성인을 본 뒤에는 성인을 따르지 않으니 너는 그것을 경계하라. 너는 바람이요, 백성은 풀이다.

 

채침은 이 문장을 풀이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논어>> <안연>편의 그 유명한 문장을 인용했다.

 

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上之風 必偃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서경을 읽다보면 공자님의 말 중에는 서경을 읽으며 나름대로 궁구하여 더 풍부하게 해석한  한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그 시대에 '온고이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를 열심히 익힌 성리학자들에게는 바람은 언제나 다스리는 사람이요, 풀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는 그림이 나온다.

 

爾惟風 下民惟草(너는 바람이요 백성은 풀이다.)

이 문장을 보면서 김수영의 <풀>을 떠올렸다.

김수영 평전을 읽다가 안 것인데 김수영은 어려서 한학을 배운 뒤에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에는 한학적 교양의 흔적이 제법 묻어 나오는 것 같다.

초기시에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시가 있는데  시의 제목도 그렇거니와 더하여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연상케하는 시어가 나온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논어>를 읽기 전에는 김수영의 <풀>이 한학적 교양이 스민 시라는 것을 몰랐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이 그렇듯이  <풀>이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한 시라는 해석을 먼저 배웠기에

필요에 따라 <풀>의 저항적 이미지를 원용하기는 하였으되, 좀 따분하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논어>를 읽고나서 바람과 풀이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되었다.

이번에 100일간 김수영 시를 읽는 프로젝트를 하며 날마다 김수영 시를 읽다보니

<풀>이 그런 전통적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바람과 풀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효과가 아주 상쾌한 시라는 것에 감탄하게 되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를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로 바꾸다니, 이 얼마나 참신하고 창조적인가!!

 

이렇게 기존의 관습적인 이미지를 비틀고 재해석하고, 다른 언어로 형상화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시인인 것 같다.

말의 리듬을 만들고 시어를 자유자재로 형상화하는, 그런 능력은 없지만

고전을 읽더라도 자구의 해석이나 문장의 의미 파악에만 매달리지 않고,

삶의 지혜를 기르는 공부가 될 수 있도록 풍부하고 치열하게 읽을 줄 알아야할텐데.. 쩝!!

새삼 고전을 읽는 게 나의 경우는 어떤 효과를 내고 있나,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댓글 3
  • 2021-05-23 19:03

    샘 ~ 

    서경 후기라 아니라, 김수영 후기인데요 ^^

    • 2021-05-23 19:45

      그런가요? 의식의 흐름을 따라 후기를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ㅎㅎㅎ

  • 2021-05-27 12:00

    저도 그 시의 구절 떠올라 속으로 너무 놀랬거든요 .  이렇게 대단한 시를 그렇게 얄팍하게 이해했구나 싶어 찾아보고 다시 읽었더랬습니다

    요요님의 편안하고 깊은 글을 읽으니 생각이 정돈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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