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3강 후기

요요
2021-01-24 13:47
494

<실천이성비판> 강의를 듣는 내 심정을 한 마디로 줄이면 '점입가경, 오리무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칸트에 대해 아는 것이 매주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

실천이성비판이 현상계가 아니라 예지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예지계는 경험의 영역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실천이성은 감성적 자연이 아니라 초감성적 자연의 세계에서 노닌다.

그말인즉슨.. 칸트의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지만, 초감성적 자연과도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

이거야말로 영성세미나에서 주목하는 영역이기도 한데..

나는 왜 <실천이성비판>이 이다지도 어려운걸까?흑흑...

 

칸트에게 사물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상계의 사물(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사물)이고, 다른 하나는 예지계의 사물(사물 그자체)다.

현상계의 사물은 자연의 필연법칙을 따른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자유롭지 않다(인과에 매여 있다).

다른 한편 예지계의 사물 자체는 자연의 필연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사변이성은 자유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는 없어도 사고(생각)할 수는 있다.' 

현상계의 사물을 고려할 때, 자유는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사변이성이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이다.

그런데 예지계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자유는 원인개념으로 등장한다.(자기원인적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자유의 등장??)

 

안타깝게도 자유의 의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증명될 수 없다!!!

순수한 실천법칙으로서 도덕법칙(정언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 철학에서 자유는 실존적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칸트 윤리학의 중심에는 자유라는 이념이 있다.(어쩌면 자유는 칸트 형이상학의 중심개념?)

<순수이성비판>에서 오성의 범주가 선험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선험적 사실로 제시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자유(의지)는 적극적으로 실천적 실재성을 갖는다.

 

자유는 자유의지이기도 하고 자유인과이기도 하다.

자유의지는 도덕법칙을 따르는 자유로운 의지이다.

 그러므로 '좋음과 나쁨' 혹은 '선과 악'은 자유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표상이 된다.

선은 욕구능력(의지)의 필연적 대상이고, 악은 혐오능력의 필연적 대상이다.

 

바로 이것, 선악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의지에 따라 선악이라는 대상이 결정된다는 것, 

이것이 칸트가 이룩한 윤리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행복=좋음의 윤리학을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리라.

자유가 먼저(원인)이고 선악은 그 다음(결과)이다.

선한 것이 나의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자유의지)이 선의 개념을 규정한다.

나에게 좋은 것,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쾌, 불쾌의 질료적 욕구-정념에 따르는 것일 뿐,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름지기 윤리적인 행위란, 자유와 도덕법칙에 기초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답하는 행위인 것이다.

선악개념은 순수이성(도덕법칙, 자유의지)라는 원인성을 전제하므로 이것들은 객관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다.

흑흑.. 나는 이런 생각의 전개가 너무나 관념론적이라 따라가기 벅차다. 여기엔 어떤 질료적인 것도 끼어들 틈이 없다.

기실 의지라는 말 안에는 이미 원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의지가 원인이고 선악이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는 자유인과라는 말을 쓸 수 있을 터이다.

 

이수영샘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어쩌면 칸트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칸트의 윤리학에는 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라고 이해한다.

칸트에게 도덕의 근거는 신도 아니고, 선악도 아니고, 실천이성의 선험적 원리로서의 자유와 도덕법칙이니 말이다.

그런데 순수하게 예지체의 것인 자유의지, 이런 것이 신적인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유나 도덕법칙은 현상계가 아니라 예지계와의 관련성 하에서만 접근가능하다. 

 

자유는 사유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만큼 그것은 오직 윤리적 실천에 의해서만 확인가능하다.(좀 멋지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현상계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선악은 현실에서의 효용성과는 무관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무릇 모든 실천적인 것은 동기를 함유하는 한에서 경험적인 인식원천에 귀속하는 감정들과 관계맺고 있다.'(<순수이성비판> B판 서론)

원인은 예지계의 것이나 결과는 현상계의 경험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예지계와 현상계를 연결해야 해서 <실천이성비판>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몰려온다.(아니면 말고!ㅎㅎㅎ)

 

 

 

 

 

 

댓글 1
  • 2021-01-28 19:31

    '인간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는 일은 사람들의 눈길과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 일이다.---
    나는 줄곳 하이데거에게 특별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는 인식하지 않았다.
    그리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이미 적지 않게 생각한 것들을 새롭게 사색했다'
    탕누어 책에서 읽다가 발견한 구절인데요 우리가 칸트공부하는 것도 이런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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