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양생이다> 4회 내가 배웠던 '학교', 파지스쿨

기린
2020-10-3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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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

 

 문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문탁샘이 청소년인 악어떼들을 데리고 직업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로그램 전 시간이 비는 틈에 악어떼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다음 프로그램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묻는데 녀석들이 도통 대답을 안 했다. 답답해진 나의 음성이 커졌던지 지나가던 문탁샘은 “애들이랑 얘기 좀 해 보랬더니 싸우고 있냐?”고 했다. 싸우기까지야 싶었지만 여튼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다 어린이 서당에서 수업을 맡은 후, 문탁의 청소년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 운영하는 ‘주권없는 학교’(이하 주학) 활동까지 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공동체에 있다 보면 적성운운 할 수 없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주학은 문탁에서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익한 배움의 장을 함께 만드는 실험”을 하려는 활동 단위였다. 당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친구들로 구성되었다. 현재 학교에서 연령별로 나누는 제도를 넘고, 청소년은 공부 어른은 일이라는 분할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일을 함께 경험하는 활동을 비전으로 삼았다. 동시에 흔히 좋은 교육이라는 표상에 맞서 “사심 가득하고 당파성이 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공부”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주학 프로그램은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학생기록부에 쓸 수 있는 이력을 원하는 학생들이 주로 신청했다. 매년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주중에 그들이 모여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친구도 만들고 자기 삶의 기술도 익히는 문탁의 청소년 버전을 열어보자. 문탁에서 우리가 공부했던 내용을 반영하여 커리큘럼을 짜고 학교 이름을 파지스쿨로 정했다. 당시 교실로 쓸 공간이 마을의 공유지였던 파지사유이기도 했고 기존의 인식을 깨트리며 배워나간다(破知)는 의미도 실었다. 나는 그동안 공부했던 동양고전을 원문으로 배우는 고전 담당교사로 합류했다.

 

 

 타고난 목청이 커서 싸우는 것으로 비친 탓도 있지만, 악어떼들과 마주 앉아서 무슨 공부를 하면 좋겠냐고 다그치던 나는 분명 청소년들에게 ‘친절한’ 교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공동체에 접속해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그들에게도 전수해 보겠다는 의지, 기존의 책읽기와는 다른 고전의 원문을 과목으로 만난다는 변화 등이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주학의 비전이 실현되면 어쩌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품었던 것 같다.

 

2. 교사는 어떤 수업을 지향해야 하는가

 

 공고를 내고 신청자를 기다렸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우리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공부가 하고 싶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빗나갔다. 학교에서도 공부가 하기 싫어서 그만뒀는데 여기서 또 공부한다고요? 그것도 재미라고는 없는 인문학이라니. 도통 반응이 없다가 마감 일자가 다가오면서 한 두건 문의가 오더니 결국 여섯 명의 학생이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않은 세 사람, 고등학교를 다니다 휴학 중이거나 자퇴를 한 세 사람. 그 중에 한 명은 두 번인가 수업에 왔다가 파지스쿨의 커리큘럼이 자신과 맞지 않다며 그만두었다. 결국 다섯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 다섯에 교사가 여섯인 학교, 정말 세상에 하나뿐인 학교가 되었다.

 

 

 나는 진달래와 함께 우리가 배웠던 『논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가르치자니 일일이 설명을 해야 했고, 배경지식도 알려주어야 했다. 어느 날 진달래가 내가 수업 시간에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다 알려주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말이 홍수처럼 쏟아져 끊이질 않았나보다. 그럼에도 막상 지적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교사가 말이 많은 수업이 문제가 있다는 의견에도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 또한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해야만 ‘좋은’ 수업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논어』 원문으로 수업을 하다보면 문장의 뜻부터 설명하게 된다. 한자는 표의문자라서 뜻이 하나가 아닐 경우가 많다. 꼭 알았으면 좋겠는 뜻을 부연설명하고 문장 전체의 맥락까지 짚어주노라면 학생들의 머리에 쥐가 나는 게 느껴진다. 그래놓고 자 질문해보자 라고 하면 멍해지는 눈동자들이 나를 향한다. 당황한 나는 뭐라도 더 설명하려고 말이 점점 많아진다. 말이 산으로 간다. 그럴 때 누군가 엉뚱한 질문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전환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듣는 이들에게 질문을 촉발하지 못하는 ‘무지’를 직면하게 되고, 듣는 이들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곤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수업은 끝나고 만다.

 

 그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공자님이 스스로 하늘이 내린 문명의 수호자로 자임하는 내용을 읽더니 잘난 척 쩐다고 놀렸다. 공자님의 애제자 안연의 완전무결함에 그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귀신론을 들고 나왔을 때는 나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소년 인문학 축제인 향연에서 논어 한 문장으로 깨달은 것을 에세이로 발표했을 때, 가슴 뻐근한 감동도 있었다. 서로의 무지에 의지하여 가볍게 문장을 즐기고 진지하게 자신의 질문을 벼렸던 시간, 어쩌면 그것이 배우고 익히는 동안에 일어나는 기쁨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수업 시간에 교사가 말이 많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다른 수업에서도 계속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럴 때 우리는 당시 자신이 수업 시간에 느끼는 한계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기술이 부족했다. 그저 ‘좋은’ 수업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에 묶여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다른 친구들이 당시 주학 교사들에게 너희 오늘은 안 싸웠니? 라며 안부를 물었을까.

 

3. 엄마인가 선생인가

 

 파지스쿨 수업 중에서 N프로젝트라는 수업이 있었다. 고전이나 인문에 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대신 무엇이든 도전해볼 수 있었다. 주제를 정하고 일정을 짜고 진행하는 과정 전체를 학생들이 스스로 해내는 수업이었다. 파지스쿨의 커리큘럼에서 가장 기대를 모았던 과목이기도 했다. 학생이 다섯이었기 때문에 다섯이 함께 하는 기획도 좋고 짝을 지어 협력하는 프로젝트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각자 관심분야에 대한 조사나 도전해보고 싶은 내용을 과제로 삼았다. 교사들은 각자 한 사람씩 짝을 지어 프로젝트 진행과정에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나는 M군이 자신의 일상을 홈피에 기록하겠다는 도전 과제의 조력 담당이 되었다. M군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글쓰기 습관도 들이고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는 기획을 제출했다. 글은 요일을 정해 홈피에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 글, 두 번째 글이 실리는가 했더니 점점 글이 올라오는 텀이 늘어졌다. 언제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까닭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과제나 알바 등에 밀려서 펑크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과제를 점검하는 시간이 잔소리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생활 습관에서도 문제가 일어났다. 멀리서 오는 학생들은 거의 지각을 안 했다. 집이 코앞인 녀석이 매번 지각을 했다. 처음엔 타이르고 다음엔 경고를 하고 마지막엔 얼굴을 붉혀도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혼나도 그 때뿐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공동밥상의 밥당번이나 공간을 청소하는 당번일 때 연락도 없이 안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 원색적으로 윽박지르는 ‘엄마’가 아니라 정확한 근거를 들어 설득하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거의 엄마가 되어 그들을 질책하는 잔소리나 늘어놓게 되었다.

 

 파지스쿨을 열 때 수업은 이틀이지만 다른 날도 공간에 나와서 문탁의 다른 활동에 접속하기를 지향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업이 있는 이틀을 제외하면 공간에 얼씬도 않으려고 했다. 저마다 다른 일정이 있다는 사정도 있었지만,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생들의 ‘엄마’ 연배인 것도 한 몫을 했다. 라이프 스타일도 관심사도 심지어 섭생마저 다른 세대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도 하는 실험은 애초에 불가능한 기획이었을까. 지각하지 마라,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같은 말을 잔소리로 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관계 맺는 방법을 좀처럼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4. 또 한 번의 졸업

 

 2014년 가을 겨울 학기 신입생 모집으로 문을 연 파지스쿨은 2015년 본격적으로 학생을 모집했다. 그러나 신청하는 학생 수는 첫 해의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다. 설령 한두 명 늘어났더라도 졸업까지 하는 학생의 수는 매년 줄어들었다. 2017년에는 입학 신청자가 0명이었다. 결국 파지스쿨 교사들은 강제 휴식년에 들어갔고, 나는 파지스쿨 교사 활동을 접었다. 학생들이졸업까지 못 가는 이유는 다양했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고 다른 진로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교사가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우리의 커리큘럼이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던 것도 떠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 아니었을까.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 당시 12년 개근상은 우등상보다 더 빛나는 상장이라고 으스댔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라고 왜 학교가기 싫은 날이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하는 것이야말로 ‘성실’의 척도인 줄 알고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그 후 학교는 그 성실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불거졌고 학교 제도 자체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지스쿨의 비전은 그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그 성실에 머물렀던 것은 아닐까. 설령 그것이 여전히 가치 있는 덕목이더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좀 더 유연하게 세태의 흐름을 탔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2019년 파지스쿨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 이후 청년들이 하나 둘 공동체에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령에 개의치 않고 문탁의 다양한 세미나에 접속했다. 나는 학생과 교사로 만났던 새은과 니체 액팅스쿨에서 함께 세미나를 했다. 그해 축제공연을 위해 연습을 할 때, 새은은 나의 춤선생이 되었다. 새은샘이 춤의 순서도 익히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나에게 응원의 엄지척을 연발했을 때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 학생이 되었다. 파지스쿨러였던 우현과는 인문약방 팟캐스트에서 녹음편집 엔지니어와 진행자로 함께 일하고 있다.

 

 서로에게 배움을 일으키고 함께 일하면서 좋은 삶을 구성해보자는 파지스쿨의 비전은 파지스쿨이 문을 닫은 후에야 이루어진 셈이다. 배움의 장은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모르는 이들에게 전수할 때 만들어졌다. 그 자리에서는 더 많이 아는 사람의 ‘권력’이 아니라 무지를 깨트리는 ‘협력’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좋은’ 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학교’의 모습이 보였고 교사가 되어보고 나서야 어떻게 배움이 생성되는지 알게 되었다. 파지스쿨은 그렇게 또 한 번의 졸업을 경험하는 장이었다.

 

댓글 7
  • 2020-10-31 09:59

    파지스쿨의 비전은 문을 닫은 후에야... 공감가네요^^

  • 2020-10-31 12:36

    “그렇다면 ‘좋은’ 교육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선생님의 통찰이 뼈를 때립니다:)

  • 2020-11-01 07:45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되는 게 았죠^^

  • 2020-11-01 11:14

    애들이랑 싸우는 모습? ㅋㅋㅋㅋ
    두 아이를 모두 맡겼던 부모로서 저는 좋았던 시간입니다.
    두 아이는? 삶이 계속되는 한 그 무엇이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그 무엇은 계속되고 있으니 용맹정진 하소서~~^^

  • 2020-11-03 09:17

    액팅의 춤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였군요~
    엄청 유연해진 것이 명제자? 명선생! 덕분이군요!ㅋㅋㅋ

  • 2020-11-07 00:00

    파지스쿨이 있었기에 지금의 청년들과 자연스러운(?) 만남 또는 섞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ㅎ

  • 2020-11-09 08:58

    파지스쿨에서 선생으로 좌충우돌 시간을 10000시간쯤 보낸 덕에 지금의 기린이 형준과 우현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않는거군요
    경험치를 쌓는 것
    그래야 배우는 게 있다는 거 또 배웠어요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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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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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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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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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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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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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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