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마을경제학 #10] 스즈카공동체의 비밀: 경제는 마음에 기대어 있었다

봄날
2020-09-24 02:04
858

이년 전이었던가 지방에서 문탁네트워크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문탁네트워크가 인문학 공동체이며 세미나와 글쓰기 등을 통해 나름대로 깊이있는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을 힘주어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질문은 마을작업장이라든가, 문탁내에서 통용되는 대안화폐인 복(福)이라든가, 2,500원으로 먹을 수 있다는 문탁의 공동밥상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공부를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가’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해갈 수 있는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문탁의 차별성은 그렇게 ‘돈’과 ‘공부’를 잘 결합시킨 ‘모범적인’ 공동체라는 점으로 귀결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10년 쯤 되어가는 나도 처음에는 선뜻 ‘돈 버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문탁의 많은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공부에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문탁의 많은 친구들도 ‘돈’이 아쉽고, ‘돈’ 문제만 해결되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문탁네트워크의 많은 활동 중에서 마을작업장 <월든>이, 그렇게 마을에서 함께 모여 살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꿈꾸면서 시작된 것도 그러한 친구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복’이라는 이름의 대안화폐도, 그처럼 공동체의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꾸려보려는 생각에서 시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미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경제적 자립이라는 차원에서는 현실은 늘 ‘노답’이었다. 이때 우리는 스즈카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즈카라는 작은 마을에 도시락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단다. 이것이 내가 처음 접한 스즈카 커뮤니티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검색을 하고, 친구들과 모여 책도 읽으면서 그곳을, 그곳의 사람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를 더욱 자극했던 것은 우리보다 앞서서 스즈카를 방문했던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친구들은 많은 영감을 얻은 듯, 쓰는 말이나 눈빛들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이 공들여 번역해준 <사람을 듣다>라는 작은 문건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우리의 지형과는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공동체 친구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본격적으로 국경이 막히기 직전, 우리는 인천에서 나고야로, 나고야에서 다시 배로 스즈카에 첫발을 디뎠다. 우리가 그곳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고, 어떤 것을 알게 됐을까.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들

스즈카 커뮤니티를 알아보려면 그 공동체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야마기시 공동체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1960년대에 일본의 농촌에서 야마기시 농부가 주창한 야마기시즘에 따라 생활하는 집단이었다. 야마기시즘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생활 면에서 ‘무소유’ ‘공용(共用)’을 실천한다. 한국에서는 신안마을에서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이라고 야마기시즘을 체현하고 있다. 이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살던 몇 사람이 나와 스즈카에 자리잡은 것이 스즈카 공동체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즈카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 산 것이 어언 이십여 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스즈카에 도착한 첫 날, 우리를 맞이한 데루코씨와 기타가와씨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어떤 일정으로 지낼지 여러 가지를 알려줬지만, 나의 관심은 그저 ‘어머니 도시락(오후꾸로상 벤또)’뿐이었다. 일본은 그야말로 ‘도시락 천국’이다. 수퍼든 편의점이든 어딜 가도 갖가지 도시락이 즐비하다. 그러니 도시락을 스즈카 공동체의 주력 사업으로 잡았다는 것은 내부에 전문적인 경영이 탁월한 사람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스즈카의 어머니 도시락은 인근에서 품질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어머니 도시락에서는 약 45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고, 스즈카에 유학 온 사이엔즈 아카데미 학생들도 많이 일하고 있다. 이곳을 운영하는 스탭의 일원인 젊은 키타가와씨(첫날 우리를 맞아준 기타가와씨와 젊은 기타가와씨는 부자지간이다)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어머니 도시락이 하루 1,500개를 생산하는 ‘번듯한’ 회사지만, 설립 초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그 차이를 알기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자본주의적 경제체계 안에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회사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꽤나 고민을 한 것 같다. 그의 말로는 어머니 도시락만의 회사체제를 만들어가는데 꼬박 6개월 동안 매주 지리한 회의를 계속해야 했다.

어머니 도시락에서 사람들은 하루 평균 4시간 일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자 기타가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른다고 했다. 얼마를 받으며 일하는지를 모른다니? 자신이 받는 월급에 따라서 자신의 삶도 위치지워지는 것 아닌가? 자기 월급을 잘 모르면서 회사 일을 한다는 건, ‘돈’ 말고 회사를 다니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스즈카 커뮤니티의 또 하나의 경제 축인 ‘스즈카팜’에도 들렀다. 여기서는 15명이 일하고 있는데 모두 약 15헥타르(약 45,000평)의 농지를 무상으로 빌려서 경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겨우 두 고랑의 밭을 얻었을 뿐인데, 그 넓은 농지를 무상으로 빌리다니. 일단 농사의 스케일은 우리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게 부러웠다. 스즈카팜의 작물이 쌀이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대개 공동체의 작물은 야채류와 과실로 생각했었는데 쌀이라니. 그런데 스즈카팜의 주요 작물이 쌀이 된 데는 딱 한 사람의 희망이 작용했다고 한다. 쌀농사의 중심은 이나(稻)씨인데, 이나는 일본어로 ‘벼’를 뜻하는 글자이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나씨는 스즈카에서 쌀농사를 지으면서 성을 바꾼 거 아닌가요?”라고 물었고, 스즈카팜의 안내를 맡았던 다카사키씨는 웃으며 원래 성이 그렇다고 했다. 이나씨는 스즈카로 들어오면서 자신이 쌀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스즈카팜에서 이나씨만큼 쌀농사에 관심과 애정을 쏟아붓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해서 스즈카팜은 매년 40톤의 쌀농사를 짓는 농장이 됐다. 한편 다카사키씨는 야채의 싹을 키우는데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가 둘러본 하우스 한쪽은 온갖 야채의 싹들이 아우성이었다. 스즈카팜의 작물 중 쌀 다음으로 야채가 많이 생산되는 것은 다카사키씨 때문이었을까? 한 곳의 온실에는 용과(드래곤플라워)나무가 또아리를 틀며 자라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온 디에고라는 청년이 키워보고 싶다고 해서 만든 온실이었다. 나는 ‘이건 뭐지’ 싶었다. 아무리 경작지가 넓다고 해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인데, 자기가 하고 싶다고 깃발만 꽂으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키울 수 있다는 그 ‘발랄한’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말이 나왔으니 스즈카팜에서 조금 떨어진 사토야마라는 숲에서 일하는 노인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노인은 사토야마에서 숯을 구우며 생활한다. 일년 내내 숯을 굽고, 때로 산 속에 있는 작은 작업장에 아이들을 불러 숲 체험 놀이를 하게 한다. 노인도 젊었을 때는 회사를 다니며 찌들어 살았다고 한다. 높은 소득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온 노인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 숲의 삶에 대해 노인은 한 마디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스즈카 커뮤니티를 지탱하는 이른 바 ‘경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떤 공동체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외부의 충격에 금세 허물어질 수 있다. ‘경제’가 다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그런데 내가 스즈카에서 본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제’라는 관념을 넘어서거나 비껴나간 듯 했다. 우리는 어머니 도시락에서도, 스즈카팜에서도 몇 시간 일하고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고, 그것이 만족스럽냐고 물었고, 그렇게 해서 현상유지가 되냐고 물었다. 회사라거나 사업에 대해 말할 때,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여기에는 투자의 개념, 이익의 개념을 넣지 않고는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의 어떤 질문에도 스즈카 사람들은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대답을 피한다기 보다는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하는 것 같았다. 스즈카에는 그렇게 ‘돈’을 무시하면서도 살 수 있는 든든한 뒷 배가 있다는 것일까? 너무 당연한 질문을 너무 낯설게 받는 사람들. 스즈카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상한 나라 같았다.

 

가난함고달픔의 차이

우리가 하는 질문이 매번 낯선 것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우리가 어떤 고정된 생각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빠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검소한 삶’과 ‘마음’이었다.

문탁에서 했던 여러 가지 공부를 통해, 나는 최소한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여야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야마기시즘을 거친 스즈카 사람들은 소박함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낸 일정동안 자주 같이 했던 기타미치씨의 가방은 낡다 못해 가방끈이 거의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렸다. 가죽과 패브릭 작업을 하고 있는 마을작업장 월든의 친구들은 그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면 가죽으로 끈을 새로 만들어 달아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그렇게 낡은 가방을 보면서 우리가 안타까워 하는 것을, 기타가와씨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쓰는데 하등 지장이 없는 가방을 두고 우리는 왜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을까? 나는 여기서 ‘가난함’과 ‘고달픔’을 구분했던 장자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장자가 누덕누덕 기운 거친 베옷을 입고, 삼끈으로 얽어 맨 신발을 신은 채 위나라 왕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왕이 보고 물었습니다.

“선생은 어찌 이리 고달픈 모습입니까?”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덕과 도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고달픈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낭송장자>중에서)

 

‘가난함’과 ‘고달픔’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는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차원에서는 질적으로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고르게 가난한 사회’의 모습은 어쩌면 억지로 물적인 결핍을 상정하고, 그것을 일종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스럽지 않으니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스즈카에서는 검소함이 일종의 덕(德)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였다. 스즈카 커뮤니티의 어디를 봐도 물건들은 하나같이 오래되었고, 물질은 일체의 ‘넘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난하지만 고달프지 않고, 가난하지만 구차스럽지 않은 삶’이 어떻게 스즈카에 자리잡았을까.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스즈카를 방문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나눠받았고 양보받았다.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것, 돌아다니며 설명듣는 것, 위로받고 관심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넘치는 것’ 뿐이었다. 넘침이 없는 소박한 삶에서 넘쳐 흐르는 나눔은 어떻게 가능할까? 돌아보면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이방인들에게 기울이는 끝없는 ‘마음 씀씀이’였던 것 같다. 마음은 쓰면 쓸수록 풍요로워지며, 그것은 물적인 결핍 혹은 구차스러움을 단번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스즈카 사람들이 무엇보다 ‘마음’에 주목하는 것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체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즈카 사람들은 이 ‘마음’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의 지향을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같은 사회가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탐구와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식을 스즈카 커뮤니티는 ‘사이엔즈(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 Zero)’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알아내는 구체적인 방법을 ‘사이엔즈 메소드’라고 명명했다. 사이엔즈 메소드를 통해 스즈카 사람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상대의 마음, 즉 ‘본심’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생각과 언어라는, 일종의 버퍼링을 통해서만 자각하기 때문에 이 버퍼링의 과정에서 실제가 왜곡되기 쉽다. 정작 중요한 마음은 가려져서 보기 어렵게 된다. 그것을 걷어내고 실제의 사람을 마주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번 걷어냈다고 해서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사토야마 숲의 노인이 이야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요새 숲에서의 생활이 좀 힘들어졌어요. 사이엔즈 연구소에서 코스를 다시 밟으려고 해요.” 스즈카 사람들도 삶 속에서 수시로 그 마음을 잃고 힘들어한다. 요컨대 이 본심이라는 것은 끝없이 애프터 서비스를 받아야 다시 드러나는 것이다.

 

마음에 기댄 경제

짧은 기간동안 우리는 환대하는 마음의 폭탄을 맞았다. 지금도 우리가 나고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나 한참 후까지 마치 춤을 추듯 아련해질 때까지 팔을 세차게 흔들어주던 타케모토씨의 모습이 기억난다. 눈물이 눈물을 부르고 웃음이 웃음을 부르고 아쉬움이 아쉬움을 불러냈다. 나는 마음을 쓰는 것에 인색했던 내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의 역량은 쓰면 쓸수록 커진다는 사실을 먼 곳에서 확인했다. 스즈카에 다녀온 지 반 년이 지난 지금, 벌써 애프터 서비스가 필요할 정도로 우리는 다시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 마음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는 스즈카가 아니니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그저 그들이 우리에게 해준대로 섬세하고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듯 하다. 나에게도 그렇고 주위의 친구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 밥은 먹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 말이다. 나는 처음에 스즈카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알고 싶어 스즈카를 찾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시도가 접근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경제는 따로 있지 않았다. 최소한 스즈카에서 경제는 ‘마음’에 기대고 있었다. 우리의 질문이 자주 허공에 머물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어머니 도시락에서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모르는 청년에게 우리는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물어야 했다. 스즈카팜에서 내가 가졌던 의문도 스즈카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농사는 농사를 짓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어떤 농사를 짓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이라면 돈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돈에 얽혀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은 마음을 알려고 시도하는 순간 풀려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야 말로 공동체의 모든 것을 묶는다. 우리가 경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한데 묶어버린다. 마음이 먼저인 회사, 농부의 마음이 먼저인 농장, 그 마음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는 방법을 가진 곳이 스즈카 사회이다.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돈벌이 경제는 여기서 무장해제된다. 소박하지만 구차스럽지 않은 삶의 형식은 오히려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소박한 삶과 마음이 어울려 내는 이중주에 우리가 이끌리는 것은 우리의 지향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새로운 변주곡을 연주할 차례다.

댓글 5
  • 2020-09-25 14:29

    맞아요! 애즈원커뮤니티와의 만남은 제게도 참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봄날님 글을 통해 다시 그 배움을 되돌아봅니다. 코로나 난리통에 스즈카분들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하고 그립기도 하네요^^

  • 2020-09-28 18:29

    '마음에 기댄 경제' 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ㅎ
    문탁 카톡방 눈팅하다가 반가워서 글 남기고 가요.
    코로나 유행하기 전에 투어 다녀오셨으니 벌써 9개월이나 됐네요~
    다들 잘 지내시지요? 저도, 우동사 친구들도 잘 지내요 ^^

    • 2020-09-29 08:16

      아! 이렇게라도 광합성 이름 발견하니 반갑다^^
      광합성과의 인연으로 스즈카도 알게 되고......우리 인연이 우연이 아니네!

  • 2020-10-08 09:30

    시간이 지나 더 숙성된 된장같이, 오래 두고 만나니 더 음미하게 되는 소감이어요. 조용하고 뜨거운 마음이 전해지네요. 코로나 풀리면 또 가요~~

    • 2020-10-10 16:47

      세리짱~~~~ 보고 싶어요. 스즈카 분들도요.
      本当に会いたい〜。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2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18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72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75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5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19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