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2회]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고은
2020-09-21 15:57
452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

 

   내 친구 중 나와 가장 이질적인 감각을 가진 이는 중학교 동창 A다. A를 만나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는 구겨진 병뚜껑을 가지고도 10분을 웃는다. 물론 웃음기 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에게 벽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무원을 준비하고, 값이 나가는 작고 귀여운 가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질척거리는 공동체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사회문제에 감정이입 할 때면 A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속초 영랑정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나와 A

 

 

   한편으로 내 말이 A에게 전달되지 않는 건 내가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던 때였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를수록 나의 말은 상대를 빗겨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 말을 잘한 날이면 나는 종종 집에서 샤워를 하며 후회했다. 정말 내가 그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겉치레뿐이지 않았나? 말에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 같았다.

 

 

 

 

 

말의 껍데기를 넘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어떤 이는 말을 해도 상사·애인·가족이 본인의 생각을 모른다며 슬퍼했고, 어떤 이는 자신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말하는 것 같아 힘들다며 아예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평생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부질없는 망상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싶고, 말로 공수표를 날리지 않고 싶다. 『논어』를 읽다가 이 오래된 딜레마가 떠올랐다. 공자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子曰 :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5: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내가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행실을 믿었다. 지금은 내가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말을 듣고 행실을 살펴본다. 여[재아]로 인해 이렇게 고치게 되었다.”

 

   재아는 『논어』에 등장하는 매 순간 공자에게 심하게 혼이 나지만, 언어능력으로 공문십철에 꼽힌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언젠가 재아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인(仁)한 사람은 누군가 우물에 빠졌다는 소문만 듣고도 우물로 뛰어 들어갑니까?” 재아는 절대적인 인자(仁者)를 상정함으로써 인(仁)을 어떤 조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진공상태에 두었다. 인(仁)을 언어로 장악하고 싶어 했다.

 

   반면 공자는 형식적으로 말을 세우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인(仁)에 대해 질문하면(問仁) 공자는 묻는 사람의 성향과 주변 상황을 고려해 대답해주었다. 정계로 나가지 못하는 안연에겐 사사로운 욕망을 이기고 예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고, 크게 볼 줄 모르는 소인배 번지에겐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말이다. 말은 행동-경험을 특정한 언어로 기호화함으로써 어떤 부분은 드러내고 동시에 어떤 부분은 누락시킨다.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말 자체에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는 것이라기보단, 자기 상황에 맞게 그 내용을 이해하고 삶 안에서 구현해내는 것이었다.

 

   나도 재아와 비슷하게 질문했던 게 아닐까? A와 만난 지 12년이 되어간다. A는 내 친구 중 가장 착하고 이타적이다. 우리는 주로 동창 B와 셋이 함께 만나는데, 의견이 충돌할 때면 A는 삐진 척 장난치면서도 선의의 마음으로 양보하곤 한다. 나는 평소에 상대에게 맞추느라 대인관계에서 쉽게 지치곤 하지만, A와 있을 땐 마음이 편해져 먹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한다. 그런데도 A가 나를 모른다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A와 B와 나

 

 

 

 

 

 

맥락을 살펴보기

 

   공자의 말에 따르면 나의 딜레마는 말과 행동 사이에서 생기는 거리로부터 나온다. 행동한 것을 말로 다 하지 못하면 말은 부족한 것이 되고, 말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말은 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말과 행동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聽其言而觀其行”
“그의 말을 듣고 행실을 살펴본다.”

 

   말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그래서 말과 행동 사이가 어느 정도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한문을 살펴보면 말을 듣는다는 문장(聽其言)과 행동을 살펴본다는 문장(觀其行)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 공자가 들은 뒤에 들은 것을 검증하기 위해 봤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공자가 듣기도 했고 보기도 했다고 해석하고 싶다. 공자가 재아를 만나기 전에 말을 말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재아를 만난 뒤로는 말을 듣는 것과 행실을 보는 것을 함께 했다고 말이다. 행실을 본다는 것은 미처 말로 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도 살피는 것이다. 가령 침묵은 말 그 자체로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겠지만, 맥락과 배경을 함께 살펴본다면 어떤 말보다 더 강한 의미를 띌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논어』가 공자의 어록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의 말이 실린 구절은 『논어』의 45%밖에 안 된다. 또 공자는 질문에 일관되게 대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말하는 태도를 계속 바꾸기도 했다. 그는 제자들의 스승이기도 했지만 신하이기도 했고 마을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공자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해주었고, 신하로서 듣는 사람이 오해하지 않게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으며, 마을 일원으로서 공손하게 말을 잘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이익을 따져가며 때에 따라 말을 바꾸었다기보단, 처한 상황 안에서 성실하게 말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A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내 말이 전달되지 않는다며 막막해했던 건, 역설적이게도 말을 정말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공자에 따르면 단어와 문장에 함몰된 듣기는 제대로 된 듣기가 아니다. 어쩌면 문제는 다 전해질 수 없는 말의 한계가 아니라, 그 한계에 갇혀 말의 맥락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행실’까지 고려해 A의 말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말은 일종의 신호가 된다.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다는 신호.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각자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을,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감각의 차이를 조금은 좁혀보고 싶다는 신호. 이런 경우에 A의 모른다는 말은 무책임한 거리 두기라기보단 애정 어린 관심에 가까울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애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얼마 전 세미나의 에세이 발표회에 A를 초대했다. A는 자기소개를 하며 말했다. “그동안 고은이가 뭘 하고 사는지 말을 안 해줘서 몰랐는데… 이렇게 와서 보니 좋네요.” 깜짝 놀랐다. A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A는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말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봐도 “넌 안 들어주잖아”라는 불평과 “넌 안 말해주잖아”라는 불평은 대개 같은 순간에 서로를 향해 말해진다. (서로 두 가지 불평을 동시에 말하는 경우도 많다. “넌 들어주지도 않고 말해주지도 않잖아”)

 

 

에세이 발표회에 온 B, A, A의 애인

 

 

   사실 A는 에세이 발표회에서 졸았다고 했다. 전날 공무원시험을 치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멀리서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에 만났을 때 A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함께 왔던 직업군인 애인과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또 집에 돌아와서는 내 에세이를 몇 번이나 읽었다고도 했다. 물론 이번에도 A는 이해를 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이해하지 못한 건 글에 압축적으로 실렸던 구체적인 사례였다. 글에 담긴 나의 바람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앞서 인용한 문장은 공자가 재아를 심하게 혼낸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공자의 말과 더불어 ‘행간’까지 짐작해보자면, 재아를 그저 나무라고만 싶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공자는 재아의 말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도 생각해보았던 게 아니었을까? 말해지지 않은 것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길어 올려 다시 말로 표현하는 일은 보통의 애정을 갖고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누군가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말해지지 않은 부분까지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당분간 듣기 능력이나 말하기 능력 혹은 언어의 한계 같은 것에 집중하던 힘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볼까 한다. “저 말은 무슨 맥락 위에서 나온 것일까? 왜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했을까?”하고 질문해보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다. 공부하는 나의 삶은 말을 읽고(독서), 말을 듣고(세미나), 말을 하는(글쓰기)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말에 둘러 쌓인 곳 한복판에서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실험의 조건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댓글 4
  • 2020-09-21 22:25

    친구 A씨와의 찐우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공자님도 상황에 맞춰 조심스레 말씀하시고 들으셨다니 말하기는 원래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 맞나봐요.
    저도 늘 말하고 후회하는 일이 많아서 공감되네요.

  • 2020-09-22 13:45

    ㅅ ㅏ ㄹ5 ㅎ ㅐ

  • 2020-09-22 22:15

    '말'ᆢ 역시 평생의 화두죠 요즘의 저에게도 아주 반갑고도 유익한 글이네요.
    그리고 헤이 유교걸! 넘 멋져요 ~

  • 2020-09-23 16:02

    한편으로 말로 하지 읺으면 상대가 모를 수 있다. 그래서 계속 빗겨나더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공자는 정명, 말로써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맥락과 상황 파악은 말하기의 또다른 노~오력 아닐까??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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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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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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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조회 11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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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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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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