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시즌2 장 피에르 주네/마르크 카로 <델리카트슨 사람들> (1991)

띠우
2020-09-12 12:30
628

우울한 시대, 더욱 필요한 웃음

<델리카트슨 사람들>

                                                                                                  장 피에르 주네, 마르크 카로 연출

 

 

1974년, 어느 애니메이션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장 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는 이후 함께 CF촬영이나 독특한 단편을 찍으며 영화적 감각을 익혀나갔습니다. 이들이 훗날 <세븐(데이빗핀처)>, <에일리언4>, <미드나잇 인 파리(우디앨런)> 등에 이어 <옥자(봉준호)>를 촬영하게 되는 다리우스 콘지를 만나면서 그 만화적 상상력은 더욱 더 발휘되지요. 그들의 첫 장편 연출작이 <델리카트슨 사람들>입니다. 1990년 동경영화제 영 시네마 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우리나라에도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원작이 일본만화). 그러나 당시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포스터 한 장으로 국내 상영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칼을 가는 푸줏간 주인의 얼굴과 함께 이상한 몰골로 도망치려는 남자로 시작되는 영화. 이어진 도입부는 독특한 색감과 옛스러운 음악, 세련된 이미지를 속도감 있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는 대중문화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불립니다. 87년 얻어낸 민주화를 통해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의 변화와 함께 이룩한 경제성장률은 국민들에게 대놓고 ‘부~자되세요’를 말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서태지의 음악을 시작으로 아이돌 가수들이 차례로 등장했고 다양한 문화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던 시기였죠. 정치경제적 요건과 함께 대중매체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당시 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욕망을 찾고 그 욕망이 한없이 발산되던 시기였습니다. 한편, 유럽은 동서독 통일이후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힘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유럽은 연합을 구축해나가지만, 80년대 말부터 2002년 유로화 통일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불안은 급격하게 증가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하던 한국 관객들에게 컬트 장르로 소개되며 장기상영에 성공합니다.

 

 

스타일 면에서 헐리웃의 팀 버튼과 비교되기도 하는 장 피에르 주네, 그의 영화는 독특한 표현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것은 클라페와 플뤼스의 정사 장면이죠.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의 빠르기에 따라 줄리의 첼로 소리, 따비오카부인이 카펫을 터는 행동, 메트로놈의 속도,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 따비오카의 펌프질, 깡통에 구멍을 뚫는 로제의 움직임, 깡통에 기계를 대고 소리를 듣는 로베르의 행동, 할머니의 뜨개질 속도, 뤼종의 페인트질 속도 등이 교차 편집되다가 클라페의 행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것들이 모두 정지하며 관객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클라페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그에 의해 조종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은유적이고 율동감있게 보여 주고 있지요. 수직으로 세워진 여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소리와 행동의 편집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2001년 부천 판타스틱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장 피에르 주네는 한 기자로부터 그의 영화가 만화같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그는 사실주의 영화는 찍을 생각이 없다고 하지요. 그는 “영화 속 어느 프레임을 떼어내 벽에 걸어놓아도 좋을 만큼, 하나의 숏이나 씬, 심지어 하나하나의 프레임까지 의미가 풍만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었기 때문에 만화적인 프레임이 계속 내 영화 속에 남아 있는 것이겠지만. 또 내게 특별한 영향을 끼친 '무엇'은 따로 없어도 나는 회화나 음악, 사진, 영화 등을 보고 모으기를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지요. 이러한 면에서 그의 영화는 1930년대 유행한 ‘시적사실주의’의 영향아래 있다고 봅니다. 시적사실주의는 우울하거나 어려운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영화적 언어의 시적 감수성을 통해 드러내지요. 영화 마지막에 이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톱연주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때와 장소가 모호합니다. 암울하고 황량한 화면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과거의 어느 전쟁 후인가 싶기도 하지요. TV에서 흘러나오는 장면들은 대부분이 과거의 모습이지요. 희뿌연 공간에 외롭게 서 있는 델리카트슨 여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살업자인 푸줏간 주인 클라페가 구인광고로 유인한 사람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인육을 먹는 그들은 특별히 사악하게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뤼종의 생김새는 인상적이지만)평범한 사람들 같습니다. 여기서 푸줏간 주인 클라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모습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노동자들로 볼 수 있겠죠. 너무나 상투적인 전개같네요. 클라페는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여관 안 사람들이 아닌 이들로부터 고기를 얻어 여관 안의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그에 따르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자신은 (성)노동과 곡식(화폐)을 받아 마땅하죠.

 

 

식량을 통해 공동체를 지배하는 클라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돌발적인 뤼종의 등장이죠. 서커스예술가인 그는 해맑습니다. 관객도 알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열심히 계단을 고치고 아이들에게 비누방울을 날리고 줄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첫 장면에서 인상적으로 죽어버린, 눈이 지나치게 컸던 남자와는 다르게 클라페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것이죠. 줄리가 아버지로부터 뤼종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떠올린 사람들, 그들은 생존에 위해 곡식을 찾아 지하세계를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뤼종을 구하기는커녕 우스광스런 상황을 연출하는 그들로 인해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곡식(옥수수)입니다. 뤼종을 구하지도 못하고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지하인간들은 왜 나온 걸까요? 옥수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옥수수가 상징하는 것은 화폐입니다. 그러니까 옥수수는 단일통화를 앞둔 유로화의 은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옥수수로 화폐가 통일이 되어도 결국 그 화폐를 다 함께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일통화를 앞둔 그들의 불안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네요.

 

 

영화 후반부, 영화적 모티프로서 물은 종교적 해석을 가져옵니다. 뤼종은 줄리와 함께 방안에 물을 가득 채웁니다. 문 밖에는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방안을 채운 물은 그들을 휩쓸어갑니다. 방은 타락한 인간에게 닥친 대홍수를 피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인가요. 다시 이어진 장면, 파란 하늘아래 아름다운 지붕위에 아이들 옆으로 나란히 앉아서 첼로와 톱을 연주하는 줄리와 뤼종. 극장에서 들었던 그 음악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저에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장면입니다. 그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클라페와 일당들은 벌을 받고 종교적 인간애를 잃지 않은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 다소 서두르듯 마무리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속도감 있는 영상편집이나 적절하게 사용된 다양한 소리들, 그리고 곳곳에 박혀있는 유머만으로도 영화는 볼만합니다. 부족한 고기에서 시작해 옥수수마저 귀한 지하인간들의 모습까지 지나오면서, 일차적으로는 현재의 육식관련 문제들이나 식량난에서부터 화폐로 인한 불평등한 사회모습까지도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네요. 저는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 몫이겠지요. 다시 그들이 지붕 위를 내려가면 마주하게 될 현실을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댓글 2
  • 2020-09-12 15:38

    91년에 종로2가 코아아트홀에서 보고 완전 반했던 영화에요.
    너무 좋아서 주변에 강추했다가 욕만 엄청 먹었던 기억이~~
    코아아트홀 없어질때 진짜 속상했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 2020-09-12 20:37

      전 이화예술극장에서 보았답니다~ 그 시절 함께 환호하고 있었군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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