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2 롤랑 조페 <킬링 필드>

청량리
2020-08-29 05:14
647

카메라는 편안하게, 질문은 날카롭게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런던국립극단의 최연소 연출가로서 일찍이 이름을 날렸던 롤랑 조페는 이후 영국 TV방송사에서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담당한다. 그리고 1984년 영화 <킬링필드>는 그의 첫 장편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분(남우조연상, 편집상, 촬영상)을 수상한다. 롤랑 조페 감독은 천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며 인상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영상의 구도는 화면 내의 인물과 물체를 배열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구도에 따라 내용은 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되기 때문에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영화 <킬링필드>(1984)를 시작으로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 등을 연출한 롤랑 조페 영화 대부분의 장면들은 눈높이 시점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구도로 이뤄진다. 다소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으나, 적절한 트래킹과 딥 포커스 등을 통해 지루하지 않으며 원만한 흐름을 유지하며 연출하는 게 롤랑 조페의 장점이다.

안정적인 구도를 유지하는 <킬링필드>에서도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캄보디아의 상황이 안 좋아져서 대부분의 현지 기자들이 철수한다. 그러나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남아서 끝까지 취재하겠다고 하면서, 현지인 통역가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에게도 함께 할 것인지를 물어본다. 원한다면 가족들은 안전하게 미국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서 자신과 함께 계속 취재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과 함께 떠날 것인지 시드니는 프란에게 묻는다.

이때 카메라는 시드니와 프란을 한 화면으로 잡지 않는다. 상대의 배우들은 각자의 프레임 바깥에 있다. 의자에 앉아서 프란을 올려다보는 시드니, 맞은편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프란을 따로따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일반적인 대화 장면처럼 두 배우의 시선을 따라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카메라 앵글이 프란을 알레한드로와 같은 앙각으로, 시드니를 케이트와 같은 부감으로 잡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면은 시드니가 다소 위압적으로 프란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중이다. 결국 롤랑 조페는 안정적인 카메라 앵글 안에서 시드니의 앙각 시선을, 프란의 부감 시선을 찬찬히 보여준다. 카메라 대신 시선의 각도로 내면의 심리를 드러내는 이 장면은 꽤 매력 있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아도 좁은 공간에서 훌륭하게 두 사람을 잘 드러냈다. 프란은 시드니와 계속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도 그 두 사람은 영화 제목과 같은 ‘킬링필드’와 마주한다.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한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다.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은 세력이 약해지고, 결국 그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되고,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끔찍한 대량학살이 일어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러나 롤랑 조페에게 캄보디아는 영화의 ‘배경’ 그 이상의 의미를 넘지 못한다. <미션>(1986), <시티 오브 조이>(1992) 등 이후 롤랑 조페의 영화들이 대부분 비슷한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8세기 남미(미션)나 20세기 인도(시티오브조이), 동남아(킬링필드)는 롤랑 조페 감독에게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 백인은 선구자 혹은 지식인, 구원자이며 지역의 원주민들은 그 대상이 된다. 그 때문인지 이 세 편의 영화 이후 그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다. 예전에 봤을 때는 몰랐으나, 적어도 이번에 본 <킬링필드>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다소 눈에 띄었다.

 

비행기의 연착으로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프란이 보이질 않자 시드니는 씩씩대며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다. 사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동안 뭔가 불길함을 직감한 프란은 그 정황을 확인하려고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뉴욕타임즈 기자 시드니는 미군 헬기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화를 내고, 프란에게도 화풀이를 한다. 결국 프란이 사방팔방으로 뇌물을 써가며 현장으로 갈 수 있는 루트를 알아내고 두 사람은 처참한 현장에 도착한다.

이 부분에서 황당한 장면이 나오는데, 크메르 루즈군이 정부군의 병사를 공개처형하려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프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드니는 필름도 없는 카메라의 셔터를 크메르 루즈군 앞에서 눌러댄다.

“괜찮아. 난 기자니까.”

그러나 안 괜찮았다. 크메르 루즈 군인은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오고, 카메라는 압수되고 두 사람은 어디론가 끌려간다. 도대체 시드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외에도 영화 내내 시종일관 시드니는 프란에게 보채기만 한다. 그의 내적갈등은 오로지 사건을 취재하지 못할 때만 일어나는 듯하다. 프란은 그런 시드니를 철없는 아들처럼 열심히 챙긴다. 심지어 그는 그의 가족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미국으로 보내면서까지 그를 돕는다.

크메르 루즈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는 무력으로 대사관을 포위하며, 안에 있는 캄보디아인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내라고 압박한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이 만나 화제가 된 영화 <그린 존>(2010)에 등장하는 ‘그린 존’은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뒤 바그다드 궁을 개조한 미군의 특별 경계구역이다. 그 안에는 미군 사령부 및 이라크 정부청사가 자리하며 고급 수영장과 호화 식당, 마사지 시설, 나이트클럽 등이 있으며, 이슬람 국가에서는 금지된 술까지 허용되는 안전지대를 말한다. <킬링필드>의 프랑스대사관은 정도의 차이가 많으나, 분명 캄보디아 내 ‘그린 존’, 안전지대다.

그린 존을 둘러싼 담장을 사이로 천국과 지옥이 나뉜다. 시드니와 사진기자 알(존 말코비치)의 도움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프란은 대사관에 잔류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사진이 문제를 일으켜 결국 프란은 크메르 루즈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프랑스대사관에 억류된 서구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프란을 비롯한 캄보디아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간다.

시드니는 미국으로 돌아와 프란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용했다. 수용소를 겨우 탈출해 태국국경까지 오는 건 오로지 프란의 몫이었다. 알은 프란을 이용한 거라며 비난하지만, 시드니는 울면서 항변한다. 자신이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고 시드니는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많은 제3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고 침공했던 서구사회에게 필요한 건 ‘변명’이 아니라 ‘질문’이다. 롤랑 조페는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불편함을 서둘러 해결하려고 하는 듯하다.

영화 <그린 존>은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미 육군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상부의 정보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밀러는 미군의 정보에 의심을 품는다. 이때 이라크 지역주민인 프레디(칼리드 압달라)가 제보를 하고 밀러는 후세인 정부 고위인사들의 모임을 급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프레디는 미국을 돕는 게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왜 이라크의 문제를 당신들 미국이 해결하려고 하나? 난 당신에게 돈을 바라고 제보를 하는 게 아니다. 이라크의 독재정권이 물러나길 바란다. 난 이라크를 사랑한다.”

프레디를 만난 후로 밀러는 충격을 받는다. 상부의 정보와는 달리 대량살상무기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자신이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한다.

롤랑 조페는 변명과 자책이 아니라 밀러와 같은 질문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실망이다. 태국 국경에서 만난 두 사람. 프란을 보자마자 시드니는 사과하지만, 프란은 “용서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 둘 사이로 존 레논의 <이매진>이 맥없이 흐르며 영화는 끝난다.

 

성직자와 원주민(미션), 의사와 농부(노동자)(시티 오브 조이) 등의 구도가 계속 유지되면서 롤랑 조페의 영화들은 ‘백인우월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킬링필드> 역시 그러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로 프란을 연기한 응고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극중 시드니가 기자상을 받으며 기사의 절반 이상은 프란의 도움으로 쓰였다는 수상소감을 전한다. 이 영화 역시 응고르의 연기에 절반 이상을 기대고 있었으나 캄보디아 출신인 그는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다. 더욱 안타깝게도 그는 미국에서 1996년 크메르 루즈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총에 피살되었다. 영화 <킬링필드>는 끝났고, 시드니와 프란은 상봉했지만, 캄보디아는 내전의 상처가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다.

 

댓글 1
  • 2020-09-02 23:24

    좋은 글이네요. 저도 이번에 인도에 두 달간 역류당하면서 글에서 나온 그린존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호텔 외부는 코로나로 매일 수천명이 걸리고, 호텔은 외국인은 한국인 몇명과 공연이 없는 러시아 가수만 있는 지역으로 인도 경찰에게 조사를 받거나, 구속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공존하였습니다. 청량리님 글에 공감이 되며, 다음 영화 모임에는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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