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8] 공유지는 살아있다

뚜버기
2020-07-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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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마을경제학개론 #8]

공유지는 살아있다

 

생소한 단어 ‘공유지’는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훅 들어왔다. 작업장을 만들고 일년쯤 지나서이다. 좁은 공간에서 어느 날은 빵을 굽고 어느 날엔 미싱을 돌리면서 복작복작 거리다보니 공간부족에 대한 어려움이 하나둘 늘어났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꿈들이 새록 새록 생겨나고 있었다. 청년들이 공연도 하고 아지트를 벌일 수 있는 곳,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더 많은 이들고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이 커져 갔다.

문탁네트워크 맞은 편에는 걸핏하면 간판이 바뀌는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새로 개업하고 좀 지나면 문 닫는 날이 점점 늘어나는 패턴이 반복되는 그런 가게자리였다. 아마도 짐작컨대 넓은 홀을 다 채울 만큼 장사가 잘 되지 않으니 차라리 영업을 안 하는게 덜 손해인 상황이 반복되는 듯 했다.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되는 그 자리에 문탁의 세 번째 활동공간을 만들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보증금이며 공사비용까지 따져보면 이제껏 벌여온 일들과는 규모가 다른 일이 될 게 뻔했다. 월세며 각종 공간유지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넓은 공간에 마음껏 활동을 펼치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걸 상상하니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공간을 계약한 뒤 준비단계에서 마을카페, 마을쌀롱 등으로 칭해지던 공간은 언제부턴가 공유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가을, <마을공유지 파지사유>는 문탁네트워크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었다.

 

SVC 이슈] 참여로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문학 커뮤니티

 

공유지 X file

 

개업 이후 파지사유에서는 가지각색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한국탈핵>,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와 같은 좋은 책들의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파지사유라는 멋진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탈핵, 탈성장, 세월호와 같은 문제들에 조금씩 더 깊이 다가가게 되었다. ‘녹색다방’이라는 탈핵활동 동아리가 만들어졌고 파지사유는 수시로 녹색다방의 공작소로 변신했다. 일주일에 한 번 벌이는 탈핵일인시위를 위한 피켓공작과 시위 나갈 사람을 조직하는 공작이 함께 벌어지곤 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열심히 단체모임에 장소를 제공하고 식사를 서빙하기도 했다. 매출로 따지자면 재료비를 제하면 인건비도 안 빠지는 손해였지만 그렇게 해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고 싶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전국송전탑반대네트워크의 회의가 열렸던 어느 밤의 기억도 생생하다. 매니저들이 열심히 날라주던 뒷풀이 어묵탕의 온기와, 전국각지에서 모인 활동가들의 뜨거웠던 열기가 그립다. 연대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만큼 지속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늘 힘이 부쳤다. 하기 싫은 데 억지로 한다와, 왜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가 사이의 갈등에 점점 기운 빠져갔다.

2030 청년 모임을 만들고 싶어 했던 매실과 광합성이 파지사유에서 소셜다이닝을 주최하기도 했다. 그때 만난 2030 여자청년들이 ‘언니들의 옷장’을 열었는데, 그간 이어가게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웠던 패셔너블한 옷들을 펼치고 팔던 광경은 신선했다. 청년의 접속이 늘면서 공부로, 활동으로 청년들을 만날 기회도 차츰 빈번해졌다. 일회성의 만남은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청년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은 다른 경험이었다. 일요일엔 청년들 맘껏 파지사유를 쓰라고 했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청소 안 된 지저분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마음은 자꾸 청년들에게 일을 맡기는게 미덥지 못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동시에 청년들을 이해 못 하는 나는 꼰대인가 아닌가 자기검열 중인 내 모습을 보는 일 또한 피곤했다.

월세도 내고 전기세도 내려면 매출이 일정 수준은 되야 한다. 강좌를 열고 공간대여도 하지만 일상적으로 차를 팔아 매출을 올려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니저들은 열심히 메뉴를 개발하고 복잡한 제조 순서를 익히며 차(茶)판매에 힘썼다. 공유지를 유지하기 위해 파지사유에 올 때 차 한잔은 마시자는 캠페인도 전개했었다. 그럼에도 파지사유 매출은 점점 떨어졌고 커피가 맛이 없어서라는 진단이 잊을 만하면 제기되었다. 공정무역커피 탓이냐 아니냐의 논쟁 속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도 생겼다.

우리는 왜 카페를 만들었을까? 동네에 찻집이 부족해서? 주인 눈치 안 보고 맘껏 이야기 나눌 곳이 필요해서? 근본적인 부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함께 만든 공간인데 우리 대부분은 그저 찻값 내고 서비스를 받는 고객에 머물러 있었다. 매니저들 역시 관리와 서비스 활동에 치여서일까 관계를 만들고 활동을 조직하는 데까지 힘쓰기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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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 변천사

 

파지사유 오픈 3년째, 파지사유를 접수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나왔다. 이름하여 주술밥상. 물론 나중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들은 파지사유에 새로운 주술을 걸고 예술적인 공동체 밥상을 차리겠다고 나섰다. 당황스러웠다. 비록 손님은 얼마 없지만 명색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지 카페인데 점심때마다 된장국 냄새를 풍기면서 밥상을 차리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니. 카페 손님들에게 어떻게 그에 대해 양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예 외부 손님들은 오지 말라는 말인가? 이게 과연 공유지라고 할 수 있나.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의 명분은 딱히 서지 못했다. 외부로의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적인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유지를 채워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겠다고 나선 친구가 있다는 점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주술밥상엔 엉뚱발랄한 기획들이 많았다. 공연과 디너를 결합한 메인디쉬 덕분에 지금은 oo밴드로 유명해진 모 피아니스트의 쇼팽 연주를 떡볶이 먹으며 듣는 호사도 누렸다. 또 덜컥 맡아온 급식사업 덕분에 십대청년들과 중년학인들이 함께 공동식사를 했던 시절도 있다. 주술밥상으로 자리잡은 파지사유의 공동체밥상은 지금은 은방울키친으로 변신하여 찬방보다는 더욱 공동체밥상의 성격을 강화했다. 이제 점심시간마다 파지사유에서 공동체밥상이 펼쳐지는 광경은 어떤 이질감도 느낄 수 없다.

얼마 전 파지사유는 공간을 크게 리모델링했다. 세미나실 하나를 고쳐서 작업장이 파지사유로 들어온 것이다. 그 사이 청년들의 활동이 늘어나서 원래 월든 공방이 쓰던 옛 작업장을 아예 청년들에게 넘겨주고 온 것이다. 밉네 곱네 해도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문탁의 안과 밖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매주 의심과 감시 속에서 영화감상회를 열던 젊은 시네필들은 공모사업 프로젝트를 따내고 고급프로젝터를 장만하여 우리도 눈호강을 하고 있다. 예술프로젝트로 인연이 된 연극하는 청년은 인문약방 팟캐스트를 위해 한 걸음에 달려와 준다. 청년들이 주축이된 활동들이 활발해지면서 문탁의 감각도 촌티(?)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새삼 느끼기도 한다.

처음엔 막연히 공유지란 마을사람들이 누구나 제집 드나들 듯 편안히 드나들면서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여겼다. 파지사유엔 늘 문탁 사람들만 바글바글한데 우리는 공유지를 과연 꾸린다고 할 수 있나? 라는 의구심이 몇 년동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문탁 주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다. 파지사유라는 장소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람들이 만나게 하고 서로를 두드리게 하고 자신을 열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왔다. 남의 출판기념회 열심히 열어주다가 급기야 자기 소리를 글로 쓰고 책을 내어 출판기념회 주인공이 된다. 라이브뉴스쇼를 기획하고 리포터가 되고, 연극배우가 되고, 낭송유랑단이 되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자기공부를 표현하고 공유한다.

그 과정은 당연히 순조롭지 않다. 의욕넘쳐서 시작했다가도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갈등을 겪게 되고 일들은 실타래 꼬이듯 꼬여만 간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해 나가는 가운데 각자의 견고한 벽을 깨고 서로 만나는 순간들을 만들면서 왔다. 외부로의 확장은 우리 안에 갖혀있던 이절적인 것을 끄집어 내는 것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다. 그런 화학 반응 속에서 우리는 다양하게 변신하는 존재가 되어갔고 그러는 가운데 파지사유는 살아 숨 쉬고 있다.

 

자율성을 키우는 공간

 

파지사유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서비스 매니저제를 없앤 것이다. 카페 이용자는 손수 차를 타고 장부에 기록하고 돈계산도 직접한다. 처음엔 가능할까 싶었으나 메뉴 단순화로 해결했다. 지금은 오히려 자신만의 레시피로 음료를 제조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유자차와 레몬차를 혼합하고 생강차로 라떼를 만들기도 한다. 커피맛 논쟁도 셀프 드립커피의 등장으로 마침내 종결되었다. 숨은 드리핑 고수들이 등장해서 우아한 자태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파지사유의 새로운 풍경으로 추가되었다. 자기가 내려 마시는 드립커피 값이 왜 전기쓰고 기계를 사용하는 커피보다 비싼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잠시 투덜거리던 이들도 자본주의 논리와 무관한 파지사유 가격정책에 그러려니 한다.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찻값지불방식도 자리를 잡아서 장부기록과 돈통잔액이 틀린 날이 별로 없다. 모두들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파지사유가 자율공간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또 다른 변화는 청소다. 예전에 매니저가 도맡았던 청소를 세미나팀들이 돌아가면서 맡게 되었다. 세미나 회비 내고 공부하러 왔는데 왠 청소냐고 어이없어 하지 않을까 말을 떼기가 조심스러웠으나 걱정은 기우였다. 그래, 문탁은 이렇게 운영되는 곳이었지...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였다. 하지만 자기 팀 청소 당번인 날 이외에는 청소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까지는 관심이 미치지 않을 때도 많다. 밤새도록 난방이 켜져 있거나 에어콘이 신나게 돌아가는 일도 잊을 만하면 일어난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세미나도 열리지 않던 시기를 겪고 나서 나는 문득 내가 그 시기에 공유지의 문은 누가 열었는지, 청소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전혀 무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흔히 공유지의 비극을 말한다. “모두에게 개방된 초원을 상상해보라. 모든 목동들은 마음껏 자신의 가축을 공유지에 풀어놓고 키운다. 저마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가축 수는 늘어나게 되고 결국 초원은 황폐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유지를 꾸리는 것도 헛된 수고란 말인가. 공유지의 비극 우화는 중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공유에 대한 추상적 개념만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공유지를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주인없는 땅으로 보는 것은 크나큰 오류다. 목동들은 함께 초원을 관리할 것이고, 지나치게 이용한다든가 관리에 무책임한 목동에 대한 제재 규정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규범들은 긴 시간 목동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공유지는 무작정 열려있는 공간이 아니다. 공유지는 공동의 책임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나름의 특이성으로 구축된 규범이 주어진 곳이다.

 

막연한 느낌만 가지고 공유지라 명명한 공간을 만들고 꾸려나가면서 비로소 우리에겐 공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누구에게나 오픈한다고 해서 공유지가 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공유지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머리를 맛대고 이 궁리 저 궁리할 때, 공유지를 터전삼아 스스로의 활동을 조직할 때 그 장소는 공유지가 됨을 체득하게 되었다. 또한 공유지의 경험은 우리에게 사적소유 아니면 공공서비스라는 이분법 너머가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니것 내것의 구별을 넘어선 공유지에서 공통의 것이라는 신세계를 구체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아마 공유지가 있었기에 우리는 감히 사적소유를 넘어보자며 무진장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을경제로 시장을 흔들겠다고 뭉친지 십년 남짓. 어떻게 시장의 방식과는 다르게 경제를 보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할지 질문하고 답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다. 시장의 강력한 중력 탓에 한 발짝 떼는 일도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공유지가 있다. 메마른 시장사회에서 공유지는 오아시스다. 공유지가 있었기에 우리는 활력을 얻고, 우정을 쌓고, 유쾌한 삶의 순간들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오아시스를 잘 돌보지 않는다면 그곳 역시 메말라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파지사유 한쪽 벽면엔 에코챌린저들이 에코라이프 도전 상황을 보여주는 스티커판이 붙어 있다. 중앙 벽면엔 전태일 50주기를 기리며 문탁인들이 책을 읽고 필사한 종이들이 빈틈없이 빽빽하다. 또 다른 한 켠엔 나눠쓰고 돌려쓰는 반짝이어가게가 한창이다. 오늘도 마을공유지에선 다양한 삶이 좋은 삶을 향해 서로 얽히며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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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뚜버기

나는 글 쓰는 게 하나도 재미없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쓰려고, 그것도 재미없는 경제로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건 ‘마을경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다.

 

 
댓글 4
  • 2020-07-11 08:36

    메마른 시장 사회에서 오아시스가 될 수 있는 공유지~
    오아시스에서 해보면 제밌는 일... 아~ 상상력이 더 필요해 ㅋ

  • 2020-07-11 11:15

    이공유지가 그 공유지였음읊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올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다가다 주역을 공부한다기에 들른 세상 개인자본주의에 찌든 일인이 느끼기엔 낯설고 불편한 시간도 제법 되었습니다 물론 기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커피맛이 없었던건 콩탓이 아니고 머신탓인것 같습니다.

    • 2020-08-04 11:37

      ㅋㅋ 뚜띠님 방학 끝나고 오시면 파지사유에서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 2020-07-12 02:09

    이런 공간이 있어 정말 기쁘고 감사해요~
    잘 가꾸고 잘 지켜나갑시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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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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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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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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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69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73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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