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레의 인문약방 / 12회> 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둥글레
2020-07-02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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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레의 인문약방 / 12화]

 

 

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약사가 되기 싫었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그다지 소명의식이 없었다. 약대 대신 미대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그 어떤 과목보다 미술 시간에 집중했다. 미술로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엄마가 권한 약대에 갔지만 미술은 내게 못다 이룬 꿈이었다. 약사가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그 돈으로 미술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제로 스물아홉 되던 해에 국내 미술 대학원 두 곳에 지원했다. 한 곳은 무참하게 떨어졌고 다른 한 곳은 전문과 과정으로 합격했다. 서류전형인 곳에서는 인터뷰 내내 미술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받았고, 시험을 치른 곳은 탈락자가 한 명도 없어서 이건 뭔가 싶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유학을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났다. 학비가 비싼 미국에서 공부할 방법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국 약사가 되는 것 밖에 별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미국 약사 면허를 따겠다고 세 가지 시험을 패스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인턴 약사에 지원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하느라 미국을 세 번이나 다녀 왔다.
결국 미국에 가지 않게 되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미술을 공부하려고 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나 약사라는 일이 하기 싫었던 것일까? 한참 뒤에야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생각해 보면 미술은 내게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변명’ 같은 것이었다. ‘미술을 하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구나!’라는 생각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면 떠오르곤 했다. 8년 전 오빠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다 간 오빠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돈돈’ 하는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제약회사를 퇴사하고 수녀회에 입회했다.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좇는 게 아닌 신에게 봉헌하는 영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난 수녀회를 나왔다. 세상에서 벗어나 깨닫는 삶을 살고자 한 내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문탁네트워크(이후 문탁)에 접속하고 인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문학 공부를 깊이 있게 해서 이쪽에서 길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약사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이 양생(養生)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고 자꾸 나한테 말을 걸었다. 양생이 삶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말로 들리지 않고 자꾸 의료나 치료에 관련된 협소한 범위의 일로 들렸다. 내가 약사라고 이러는구나 싶어 싫었다.
내 공부 내공이 짧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만, 사실 난 약사라는 직업에 흔들릴 때마다 그 직업 속에서 벼르질 못했다. 엄마가 권해서 갖게 된 직업이라며 쉽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바빴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이라 아쉬울 땐 돌아갔다. 그래도 먹고사는 업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히 임했던 것은 최소한의 내 양심이었다.

 

 

인문학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성적이 안 좋아서 국어 선생님한테 불려 간 적이 있을 정도로 난 국어를 못했고 또 싫어했다. 특히 고전 문학은 관심 밖이었고 이과생인 내게 이런 무관심은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문과였던 고딩 절친은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면 나는 학교 공부를 한다며 책과 점점 멀어졌다. 친구와 나의 차이를 문과와 이과의 차이 정도로 여겼다. 내가 책을 멀리하게 된 데에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책벌레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엔 세계문학에서부터 종교, 예술, 정치 서적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책들에 내 손때가 묻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2004년이었다. 34살이 된 내가 왜 그 책을 사게 되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우연히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사서 읽었다. 의외로 재밌었다. 그때의 일기장을 찾아보니 짧게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18세기에 박지원이란 멋진 사람이 살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어쨌건 고미숙 선생님의 책이 지금 생각해보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다던 ‘수유 너머’ 연구 공간도 궁금했지만 금방 잊혔다.

 

 

 


2012년 고미숙 선생님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출간되자 반가운 마음에 사서 읽었다. 미신이라고 치부했던 명리학엔 음양오행이라는 고래의 동양철학 이론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대학 때 배웠던 한방원리와도 맞닿아 있었다. 또 인문의역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관심이 생겨 다음 해 감이당에서 하는 동의보감 강좌를 들었다. 여름에는 인문학 캠프에 참여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기초를 뗐을 정도였지만 내 사주를 보고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그냥 내가 있었다. 오지랖 넓고, 미술을 좋아하고, 종교에 관심이 깊고, 의료 계통에 직업을 가진 내가 말이다. 내가 상처받은 영혼도, 트라우마 때문에 왜곡된 존재도 아니라니 좋았다. 어떤 사주도 음양오행을 모두 갖출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래서 삶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주는 평등하다는 새로운 관점. 운명애란 주어진 (생)명을 잘 운전해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읽고 쓰면서 공부를 했다

문탁에 합류하고 1년 정도는 일본어 세미나와 동의보감 세미나를 했다. 어느 날 우쿨렐레를 함께 하며 친해진 친구 히말라야가 내게 이제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좀 황당했다. 내가 그간 한 공부들을 다 나열하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그 친구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뭐 그럼 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가장 먼저 열리는 ‘글쓰기 강학원’에 무작정 신청을 했다. 생전 처음 듣는 루쉰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획세미나였다.
첫 시간부터 멘붕이 왔다. 문학하고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책을 반복해서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글이라곤 초딩 때 숙제로 썼던 거나 일기 쓰기가 다인 상태. 첫 시간에 난 세 명에 뽑혔다. 튜터 선생님(문탁샘)이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고른 예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그땐 너무 창피했다. 그다음 시간에도 문탁샘은 세미나가 끝난 후 조용히 나를 불렀다. 친절하게 내 글에 대해 조언해 주었지만 내 눈은 그렁그렁해졌다.
두 번이나 지적을 받고 나자 오기가 생겼다. 최소 세 번 책을 반복해서 읽었고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참고 서적도 더불어 읽었다. 일주일 내내 루쉰 책만 붙들고 있게 되었다. 내 책상 주변으로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일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독해력도 부족하고 글도 못썼다. 두 시즌에 걸쳐 공부하는 동안 당시 발간되지 않았던 너댓 권 정도 빼고는 루쉰 전집을 다 읽었다. 시즌을 마무리하는 에세이를 대여섯 장 쓸 때는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사유는 좀 더 치밀해졌고 그럴수록 내 삶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 강학원을 거치면서 난 새삼 느꼈다. 내가 이제껏 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구나! 읽고 쓰기라는 ‘공부법’을 배우고 나니 다른 공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다른 기획세미나에 들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공부했다. 그중 스피노자 철학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특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내게 스피노자의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은 충격적이었고 견고했던 나의 종교관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내게 타인은 신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이었고 나는 신에게 선택된 사람이었다. 신에게 선택된 만큼 그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내가 착해지고 특별해져 구원받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상호 영향 속에서 그때그때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은 내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존재들 사이에 더 낫고 못나고는 없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들은 완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에 대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늘 나와 경계 짓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존재들에 대해서. 이제 나 혼자 잘해서 잘 살 수 있는 건 불가능함을 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능동적인 상태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힘들다고 말한다. 타인들과 공통의 감각을 키울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내 존재적 조건인 외부와의 관계에서 정념도 어쩔 수 없이 생기지만, 정념을 넘어 이성 또는 지혜를 만드는 조건도 다름 아닌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과 (공)통할 수 있을 때 그 차이도 받아들일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정’이고 지혜이다.

 

 

인문약방을 시작하다
요새는 소통을 잘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난 ‘공통’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우정이라는 확장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연인과의 단 둘 간의 사랑이나 가족에 갇힌 사랑만으로는 우린 지혜로워질 수 없다. 문탁에서의 공부는 나밖에 몰랐던 나를 ‘우정’이라는 차원으로 이끌었다. 우정이 자기와 마음 맞는 사람과 만드는 끈끈한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내가 마음을 쓰는 것도 연민보다는 연대라는 우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전혀 공감을 안 하는 것 보다야 마음 아파하는 연민이 좋겠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좀 더 살펴보려 하고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공통 감각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노력이 모두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걸 이제 알겠다.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그리고 더 큰 공동체로 관점이 확장되고 나니, 자의식이란 좁은 곳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예술가이든 수도자이든 약사이든 큰 상관이 없다. 명리학으로 보아도 이 중 내가 무엇을 하든 다 개연성이 있다. 어쩌면 이것들은 겉보기에 다른 직업군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는 같은 지향을 가지고 다른 분야에서 다른 형태의 일을 하는 것일 뿐일지도. 그래도 약사로 일하면서 그간 내가 쏟아온 시간과 공들이 있고 그렇게 얻은 것들이 있으니 되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만큼 다른 약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공부하고 있는 친구 새털이 처음 ‘인문약방’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래서 반가웠다. ‘인문약방’에서 무엇을 할지 딱 정해진 것은 없었지만 이 말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또 친구들과 함께 먹고 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세 명이다. 새털, 기린, 그리고 나. 하지만 처음 ‘으쌰 으쌰!’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잘 모아지질 않았다. 각자가 방점을 찍는 지점이 다르고 몸이 움직이는 방식도 달랐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 셋은 작년 1년 동안 ‘양생 세미나’를 조직하고 특히 몸에 대한 공부를 했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감각의 차이를 확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슷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올해 ‘인문약방’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문탁 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에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인문약방, 호모큐라스를 위한 처방전>이라는 팟캐스트를 하고 있고, ‘양생 프로젝트’라는 기획세미나를 열었다. 난생처음 팟캐스트 대본을 써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글선생 새털은 술술 쓰던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던지. 그래도 대본 회의를 하면서 또 팟캐스트 녹음을 하면서 우리 셋은 좀 더 통하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만큼 ‘인문약방’의 그림에 디테일이 더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양생프로젝트’에서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1, 2, 3, 4권과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공부로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로마시대에는 의학과 철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며 살았고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자기’가 되기 위해 타인을 초대한다. 즉 자기를 수양하기 위해 타인들의 충고와 지혜를 받아들인다. 이 개념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배려’인데, 자기 배려에서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자기 배려, 자기 수양은 종국에 자기를 떠나 훨씬 더 확장된 시야를 갖게 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과 ‘우정’의 다른 변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더 공부해가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좋은 삶’ 즉 ‘양생’에 대한 담론과 실천들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제 난 친구들과 함께 ‘인문약방’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인문약방 약사가 되고 싶다. 그간의 공부 덕에 내 직업이 나에겐 ‘로두스’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나를 위해 따로 마련되어 있다거나 하는 건 없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사람들의 변명이고 지금-여기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망상이다. 투닥거리다가도 의기투합하면서 나와 함께 공부하고 활동해 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여기서’ 뛰고 싶어 졌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1

 

주석)

  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 출판사, 291쪽.

 

 

 

p.s. 이번 회로 <둥글레의 인문약방>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형편없이 쓴 글에 정성껏 피드백을 해주느라 에너지를 소진하신 <북앤톡>의 요요샘과 새털 그리고 함께 글을 썼던 기린샘, 뚜버기샘! 정말 고맙습니다. 댓글과 피드백으로 제게 사랑을 쏟아주신 샘들, 친구들과 함께 글을 쓰면서 제 직업, 공부 그리고 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0^

 

 

 

글 : 둥글레

        프로필 01.jpg

      문탁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엄청 흔들렸다. 내 흔들림과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약방을 차려볼까 한다. 약학과 인문의역학이 버무려진 ‘인문약방’을!

댓글 19
  • 2020-07-02 07:46

    둥글레가 루쉰세미나 할 때 그리고 둥글레가 파지사유 매니저할 때 정말 들들 볶았었는데^^....새삼 추억 돋네요.
    각설하고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둥글레, 훌륭해요!! 진심입니다.

    • 2020-07-02 11:56

      저를 볶으셨다고 했지만 제가 버팅겨서 샘 이를 두세 개 정도는 흔들리게 했을 겁니다. 빨간 펜으로 제 글에 적어주신 피드백이 제게 피가되고 살이 됐어요. 샘~ 스승이 돼주셔서 감사합니다~^0^

  • 2020-07-02 10:06

    그동안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공부해서 훌륭해진 사람 꼽으라면 단연 둥글레!
    저도 진심이예요^^

  • 2020-07-02 10:21

    같이 뜁시다!!
    진심입니다^^

  • 2020-07-02 10:38

    모두 진심이군요^^
    무엇을 해도 집중하는 둥글레 저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2020-07-02 10:51

    둥글레쌤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듯합니다.
    치열하셨군요 .
    지금 여기서 땅을 짚고 즐겁고 의미있게 사는것 같아 보이네요.
    인문약방 기대됩니다~
    아주 특별한 약방이 되길 바랍니다.
    몸과 마음이 나아지는....

  • 2020-07-02 11:05

    이 글은 마치 서문 같은데 마지막이라니요^^ 새로운 시작에 응원을 보냅니다~

  • 2020-07-02 11:15

    둥샘~
    그 동안의 노고와 분투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재능은 쉬이 주어지는 게 아니었군요. 응원합니다^^

  • 2020-07-02 12:26

    옛날이름이 생각이 안나네...
    고대인도에서는 약을 주관하는 이름이라고 한다지만 무슨 깡패같은 이름이었던거 같은데 ㅋㅋㅋ

    • 2020-07-02 13:27

      건달바!! 난 아직도 기억나네^^

      • 2020-07-02 14:22

        아 맞다! 건달 건달바!
        그런데 저는 처음에 건달바를 들었을 때 반지의제왕의 간달프가 생각났어요^^

  • 2020-07-02 12:32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인문약방 앞으로의 활동에도 기대만땅입니다~

  • 2020-07-02 17:06

    끝까지 해낸 둥글레에게 박수를^^
    의기투합한 인문약방에 응원을~~
    그대들과 함께 해서 지금-여기 양생입니다^^

  • 2020-07-02 18:58

    파지사유 텃밭의 간판을 아트적으로 만드셨을때부터
    알아봤는뎅..! 이런 스토리가..!
    인문약방이 첫 뜀이 실까 싶기도 하공
    같이 뛰고 싶네용!

  • 2020-07-02 19:50

    찐찐 친구들이 되어가는 이 느낌! 좋아요!
    오랜 동안 연재~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저 사진~ 다시봐도 둥글레스럽습니다ㅋ

  • 2020-07-03 10:54

    자신만의 산 하나를 힘차게 넘으신 둥글레샘께 축하와 부러움을 전하며 ᆢ많이 애쓰셨어요~~~

  • 2020-07-03 16:01

    둥글레에 대해 난 모르는게 많았네요.
    오랫기간 연재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우리집 홈닥터 둥글레! 땡큐

  • 2020-07-03 23:57

    너어~무 훌륭해지셔서...이제 공부 그만하셔도 되겠어요 ㅎㅎㅎㅎㅎ

    제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시건방지게 공부를 해라마라...그랬군요, 죄송하고 또 영광이고...감사하고 그러네요! 글 연재하시느라 고생은 많으셨겠으나 읽는 사람로서는 즐거웠습니다!

    '공부와 우정의 인문약방은, 훨훨 날아서 둥글레라~^^'

    • 2020-07-06 12:45

      히말의 따갑지만 따뜻했던 말들이 그립군요.
      지금은 주로 새털에게 따뜻하고 폐부를 찌르는 말을 듣고 있지만 ㅋ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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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48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3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0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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